
정한의 세상이 또 무너졌다.
벌써 94번째 맛보는 고통이었다. 비가 쏟아졌다. 정한이 우는 만큼, 딱 그만큼 하늘도 함께 울었다. 이 세계에선 정식으로 결혼도 해보지 못하고 가버린 정한의 94번째 사랑. 어린 날의 그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꿔왔다 했다. 하지만 정한은 딱 하나뿐인 그녀의 소원을 이뤄주지 못했다. 정한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존재였다.
하늘이 검었다. 검은 하늘에는 마른강물을 불리고도 남을 만큼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들고 있을 힘도 없어서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다 맞았다. 그녀를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아 그녀가 있을 땅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를 내서 울 힘도 없었다. 정한은 하염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검은 하늘을 쳐다봤다. 장대비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정한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도 없었고, 친구도 별로 없었다. 모두 정한 때문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모두가 정한을 안쓰러워했다.
저 청년이 말년에 많이 돌봐줬다던데,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나보다, 혼자 외롭게 산 사람이었는데 저리 울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편적인 것만 보고 멋대로 지껄여댔다. 정한은 웅성거리는 소음이 듣기 싫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빗소리를 타고 쓸데없는 말이 들려왔다. 정한은 억지로 일어서서 겨우겨우 중심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정한이 걸어가는 길마다 작은 풀꽃들이 피어났다. 그와 동시에 정한의 가슴속에 피어난 94번째 장미는 막 생을 마감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정한은 제 주변을 감싸는 풀꽃을 보며 작게 조소했다. 빌어먹을 능력이었다. 이딴 능력 오늘만큼은 잠시 사라져도 좋았다.
벌써 94번째 이별을 겪었는데도, 도무지 이별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6명을 더 사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6번이나 더 이별해야 한다.
[윤홍]
w. 버블티
1.
며칠을 끙끙 앓았다. 그녀와의 추억을 쉽게 지우기엔 60년은 긴 세월이었다. 이미 수천 년을 살아온 정한이라 할지라도, 6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녀가 떠난 후, 3일은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녀와 찍은 사진을 보며, 그녀와의 시간을 추억했다. 4일째 되던 날부터는 그녀의 흔적을 하나둘씩 지웠다. 그녀가 입던 옷, 그녀가 쓰던 물건, 그녀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 일주일이 지났을 땐 그녀의 사진을 지웠다. 미련 없이 삭제 버튼을 누르고선 그녀와의 추억을 마음속 한켠으로 옮겼다.
이제 새로운 사랑을 찾을 시간이었다.
"이 짓도 이제 곧 안녕이네."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면 정한의 안에 장미꽃이 피어난다. 장미꽃 100송이를 다 피워내야만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간다.
이것이 정한이 짊어진 숙명이었다.
정한은 무심한 얼굴로 거리를 나섰다. 다행히 정한은 수려한 얼굴과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시작이 쉽다고 한들, 백이면 백 진정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난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꽃의 신이시여, 저는 이제 95번째 꽃을 피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100송이의 장미를 피워내면, 당신은 저를 용서하실 건가요. 이 가혹한 세계에서 저를 구원해 주실 건가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정한의 분위기에 홀려 정한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정한은 최대한 무심한 얼굴을 하고 옅게 미소 지었다.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등 뒤에서 검은 머리통이 불쑥하고 나타났다. 새까만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새까만 티셔츠. 온통 새까만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 주위는 환하게 빛났다. 참 아이러니하다고 정한은 생각했다.
"여기요."
"....."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헐렁한 옷이 감겨서 그의 마른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무난한 옷차림이었는데도 몸의 선이 고와서 잘 어울렸다. 눈을 휘어가며 웃는 그의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네?"
"이건 제게 아ㄴ.."
"네?"
"아, 아니요. 감사합니다."
"아녜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정한에게 눈인사했다. 그가 뒤를 도는 찰나, 그의 가슴 언저리에서 명찰 비슷한 것이 반짝였다.
"홍지수."
정한은 낮게 읊조리며 지수가 들어간 건물을 조용히 응시했다. 건물 안은 카페였다.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지수와 같은 차림이었다. 아, 여기서 일을 하는가 보다. 정한은 낯선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 거리를 다시 올 이유가 생겼다.
2.
이 일이 벌어진 것은 아주 사소한 실수로 부터였다.
정한은 장미를 관장하는 꽃의 정령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령이었다. 지금은 꽃의 신의 노여움을 사서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인간 행세를 하고 있으니, 정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정령이 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능력만 조금 남았을 뿐이다.
정한이 사는, 아니 정한이 살았던 꽃의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꽃의 신 플로네였다. 그는 여러 정령의 지원을 받으며 세상에 있는 모든 꽃을 관장했다. 정한은 그 정령 중 하나인 장미의 정령이었다. 신계와 인간계의 모든 장미가 피고, 지는 것은 모두 정한의 손에 달려 있었다. 장미를 심을 때 정한의 기분에 따라 장미의 색이 변했다. 정한은 다른 정령들과 비교해서 풍부한 감정이 있었으므로, 정한의 손에서 피어나는 장미의 색은 다양했다.
"윤정한, 너 또 장미에 독을 심었니."
"....플로네님, 그게 아니라."
"너 때문에 한 아이가 목숨을 잃었어. 예정에 없는 죽음이었지."
"하지만 인간들도 장미 가시를 조심해야 하는 건 이미 알고 있는걸요."
"장미 가시에 독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인간은 아주 드물지."
"....그치만 가시가 있어야 장미가 더 빛나는걸요."
"그 가시 때문에 일어난 전쟁인데도 그럴까?"
가시를 가진 꽃이 장미가 유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장미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도 없었다. 정한이 장미를 심고 피게 할 때 독기를 품으면, 그 독기가 그대로 장미에 전달이 되었다. 숙련된 장인이 잘 손질하면 독성은 힘을 잃고 제거된다. 하지만 독을 품은 장미 가시가 여린 손에 닿는다면? 그는 예정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벌써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정한의 실수로 세상에 피어난 장미 가시에 독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은 때로 사랑하는 연인의 슬픈 이별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엄청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네가 사랑을 안다면 그러지 못했을 거야."
"사랑은 인간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그 마음을 헤아린다면 실수를 하지 않겠지."
플로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한의 뒤로 정한의 아름다움을 쏙 빼닮은 화려한 장미들이 가득 폈다. 아름다운 장미가 빛을 발하기 위해선 장미의 정령의 아름다운 마음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한에게는 사랑이란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사랑은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다. 꽃의 신은 그 말을 노여워했다. 꽃의 정령들도 저마다의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정한만이 사랑의 마음을 부정했다. 그런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고, 어그러진 감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배워 오도록 해."
"지금요?"
"너를 인간 세계에 보낼 거야."
"그럼 제 장미는요?"
"그런 것쯤,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까?"
정한에게 주어진 벌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 당장 인간 세계로 내려가 100송이의 장미꽃을 피워라. 꽃의 신이 명령했다. 정한은 코웃음을 쳤다. 장미 100송이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이틀 만에도 피워낼 수 있었다. 하지만 플로네가 원한 건 그런 장미가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피어나는 장미 100송이를 피워내야, 너는 다시 꽃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진짜 장미가 아니었다. 정한의 속에 있고, 정한에게만 보이는 장미였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장미가 피고, 사랑이 끝나면 장미가 시든다. 비로소 그렇게 한 송이의 장미를 피워낼 수 있다.
정한은 모든 일을 쉽게 했다. 뭘 하든 운이 따랐고, 정한에게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정한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정한은 사랑을 몰랐다.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한숨을 푹 쉬었다.
꽃을 피우는 데는 간단한 규칙이 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정한의 안에 있는 씨앗이 싹트고 꽃이 핀다. 두 사람이 서로 진정한 사랑을 나누게 되면 꽃이 활짝 피고, 상대방이 죽게 되면 꽃이 진다. 죽음 이외의 이별은 무효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이별하거나, 버림받게 되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간단하지만 전혀 간단하지 않은 룰이었다.
정한은 장미의 정령이었으므로 늙지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는다. 사랑을 나누는 상대방만이 나이를 먹고, 홀로 늙어간다. 정한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끝까지 정한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과 성향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트렌스젠더, 무성애자, 양성애자, 범성애자, 이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정한이 인간의 형상을 하게 되면서 `남성`이란 성별을 얻은 것 뿐이지, 정령은 처음부터 성별이 없었다. 정한의 사랑에는 성별도, 국경도, 나이도, 성향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진정으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정한의 수려한 외모에 반해서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정한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는 일도 생각보다 간단했다. 하지만 사랑을 유지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홀로 늙어가는 상대방이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정한은 늘 처음 만났을 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여전히 매력적인데, 혼자 늙어가는 자신을 보며 버틸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났다. 정한은 드디어 94번째 장미를 피워냈다.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과 이별을 94번이나 경험하면서 정한은 많이 지쳤다. 하지만 이제 곧 원래의 왕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에 차올랐다. 아픈 기억 따위, 꽃의 세계로 돌아가면 다 잊혀질 일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까지의 과정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와 사랑하면서 정한은 진심으로 행복했다.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행복했던 만큼 이별은 힘들었고, 추스르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었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사랑이 가면 새로운 사랑이 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랑이 끝나면 꽃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앞으로 6명, 6명과 진정한 사랑을 나누면 될 일이었다.
꽃의 세계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정한의 앞에 95번째로 나타난 사람이 지수였다. 봄바람처럼 정한의 마음을 살랑이게 한 사람. 지수의 맑고 예쁘고 순한 눈동자에 정한이 가득 담겼다.
"나랑 사랑할래?"
턱을 괴고 조곤조곤 얘기하는 정한의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지수는 놀란 눈을 깜빡이며 정한을 바라보다가, 푸흡 하고 큰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정한에게는 농담을 진담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뭐야."
"장난 아니야, 정말로."
"사귀자는 거야?"
"응, 필요하다면."
내가 원하는 건 너랑 사랑을 하는 거야. 정한이 꿈을 꾸는듯한 얼굴로 속삭였다. 지수는 꺄르르 소리를 내며 활짝 웃었다. 곧 그런 이상한 말은 처음 들어본다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정한은 손을 뻗어 지수의 찰랑이는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실수로 손이 엉켜서 앞머리가 드러났다. 매일 앞머리로 덮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마가 동그랗게 예뻤다.
"예쁘다."
"너 정말 선수구나?"
"네가 먼저 나 꼬신 거 아냐?"
"뭐?"
"먼저 말 건 건 너잖아."
일전의 일을 생각하며 지수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억울한 모양이었다. 아니, 정말 난 네건줄 알았다니까! 지수가 울컥하며 언성을 조금 높이자, 정한이 은근슬쩍 지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새초롬한 눈매를 휘어 밉지 않게 정한을 노려보는 지수는 누가 봐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정말 그게 다였어?"
"아니.."
"그럼?"
"너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어."
지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낮게 속삭였다. 진지하던 정한의 얼굴이 히죽 웃음을 짓는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이 어린애 그 자체였다. 몇 번을 들어도 기분 좋은 소리였다. 그것이 지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더더욱.
3.
지수와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지수는 다정했고, 사랑스러웠다. 정한은 지수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마음이 녹았다. 이번 사랑은 큰 걸림돌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순조로웠다.
정한에게는 다년간에 걸쳐 축적된 노하우가 있었고, 수천 년 동안 겪은 수많은 경험이 정한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정한이 가진 특별한 능력 또한 지수와의 사랑을 더 순조롭게 했다. 정한은 장미의 정령이긴 했지만, 꽃의 신의 관할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절대 없는 특수한 능력이 있었다. 정한이 지나가는 곳마다 정한의 기운으로 시들었던 꽃잎들이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향기로운 꽃내음이 정한을 감싸듯 꽃들이 정한을 반겼다. 미처 싹을 틔우지 못하고 움츠려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다 죽어가던 꽃들도 생기를 얻었다. 정한의 주위에선 늘 향기로운 꽃향기가 가득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꽃잎이 흩날렸다. 정한과 함께 있으면 늘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한과 함께 길을 걸으면 지수는 행복했다.
"너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
"내가 그렇게 좋아?"
"응, 막 세상이 엄청 아름다워 보여."
지수는 굳이 행복함을 숨기지 않았고, 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행복해하는 지수를 보면 정한도 덩달아 행복했다. 지수는 `고마워`, `미안해`, `행복해`와 같은 솔직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수와 함께할수록 정한에게 더 풍부한 감정이 생겨났다. 지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널 만난 건 기적이야."
지수를 와락 끌어안은 정한이 지수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였다. 간지러운 듯 킥킥 웃던 지수도 정한을 마주 안았다. 한여름의 열기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란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보다 훨씬 깊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정한의 심장 근처에 피어난 95번째 꽃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초록은 부끄러움이었다. 지수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다.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어하는 지수가 사랑스러웠다. 정한은 통통한 지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지수의 커다란 손을 쥐었다.
나란히 걷는 이 거리가 우리의 마지막일지라도, 이 길의 끝까지 꼭 함께 걸을 수 있길.
이 길의 끝에선, 마주 보며 환하게 웃을 수 있길.
정한의 안에 있는 장미는 금세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핑크는 행복이었다. 감정에 솔직한 지수였기 때문에, 제법 직관적인 색을 띠었다. 정한은 제안에 숨어서 피어난 장미의 색으로 지수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선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사랑을 몰랐던 정한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정한이 누군가와 사랑을 시작하면 판판했던 가슴속 한구석에 작은 장미꽃이 싹을 틔운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장미의 크기도 커진다. 정한 안에 장미가 만개하면 그때부터 사랑의 시작이었다. 처음 피어난 장미는 모두 흰색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장미의 색이 변한다. 그것은 사람마다 아주 같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주 다르지도 않았다. 장미의 색으로 감정을 알아내기 위해선 정한의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지수에겐 그마저도 필요가 없었다. 지수는 감정이 얼굴로 다 드러났다. 다르게 말하면 정한에게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소중한 것에 대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아낌없이 마음을 표현했다. 정한은 지수를 만나 또 한 번 사랑을 배웠다.
"오늘 옷 너무 예쁘다, 잘 어울려 지수야."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응, 난 매일 생각하는 건데."
"치, 생각만 했지 말은 잘 안 해줬잖아."
지수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눈앞에 놓인 딸기 셰이크를 괜히 휘휘 저었다. 파랑은 우울이었고, 보라는 슬픔이었다, 정도에 따라 채도가 달라졌다. 하지만 정한 안의 꽃은 연한 핑크색을 띄었다. 툴툴거리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지수는 행복했다. 그 차이가 너무 귀여워서 정한은 지수의 말랑한 볼을 와락 꼬집었다.
아아, 지수가 앓는 소리를 내면서 우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장미는 점점 짙은 핑크빛으로 물들어 갔다. 정한과 함께라면 지수는 행복했다. 지수가 행복하면 정한의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4.
지수와의 데이트는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수와 함께였기에 모든 순간이 특별했다. 커플석에서 영화를 볼 때면,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장면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지수가 귀여웠다. 지수는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으면서도 끝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우리 지수 울었어?"
장난스럽게 물어보면, 지수는 전혀 그런 적 없다고 발끈했다. 그러는 동안 장미의 색은 보라에서 초록으로 바뀌었다. 분명히 슬퍼한 게 맞으면서, 순식간에 부끄러워했다. 정한은 지수의 결 좋은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으며 지수의 손에 콜라를 쥐여주었다. 쪼로록 음료를 빨아들이는 말랑한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정한의 시선을 느끼며 지수는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화가 끝나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해는 이미 다 넘어갔지만, 한여름의 열기는 밤까지도 가득했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을 손풍기 하나 들고 걸었다. 지수 한번, 정한이 한번. 바람을 나눠 쐬며 꺄르르 웃었다. 강바람이 시원했다. 함께 있으니 더위쯤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마저 아침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보이게 했다.
가끔은 집에서도 데이트를 했다. 보통은 정한이 지수의 집으로 갔다. 더울 땐 유독 식욕이 없는 정한을 위해 지수가 한 솜씨 발휘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정한은 그 속도에 맞출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여유로운 지수와 함께 있으면 저절로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메뉴는 정한이 좋아하는 갈비찜이었다. 정한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수의 온 얼굴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까지 야무지게 쪼옥 입을 맞추고 나서야 한입 가득 갈비를 베어 물었다. 지수가 눈을 반짝이며 정한을 응시했다.
"맛있어."
"얼만큼?"
"일어나서 춤이라도 출까?"
"응."
정한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 이상한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맛이따, 마시따, 우리 지수가 한 거 마싯따! 양손은 엄지척하고 엉덩이를 쑥 내밀로 씰룩씰룩 흔들었다. 정한의 이상한 춤에 지수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식탁 위에는 지수가 장식해둔 꽃병이 있었다. 일전에 정한이 지수에게 선물로 준 그 꽃이었다. 정한의 따뜻한 시선 한 번에 시들어가던 꽃이 고개를 들고 활짝 피었다. 집안에 은은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진짜 신기해."
"뭐가?"
"너랑 있으면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니까?"
"지수.. 갈비 먹고 취했어?"
"아니이, 분명 어제까진 꽃이 이렇게 싱싱하지 않았는데."
억울해하며 밉지 않게 정한을 흘깃 째려보는 지수를 보며, 정한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수가 좋다면 뭐든 좋았다. 지수를 위해서라면 온 세상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해주고 싶었다. 그게 아무리 수고롭고 힘든 일일지라도, 제 뼈를 깎는 일일지라도.
정한은 지수의 얘기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다며 지수 쪽으로 몸을 좀 더 기울였다. 정한의 냄새가 한가득 쏟아졌다. 정한은 지수의 말랑한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입술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퍼부었다. 호선을 그리는 지수의 입술을 가르고, 혀를 간질이며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조금은 장난스럽지만 애틋한 키스였다. 키스를 하는 지수는 달콤한 소리를 냈다.
"너는 내가 좋아하는 걸 너무 잘 알아."
"싫어하는 것도 알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정한은 지수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손을 뻗어 지수의 손을 꼬옥 쥐었다. 더운 나라에서 온 지수. 커다란 손이 지수의 시선처럼 따뜻했다. 정한의 떨림이 미묘한 파동이 되어 지수에게로 전해졌다. 지수는 두 팔로 정한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정한이 늘 그랬던 것처럼.
"중요한 얘기가 있어."
한참을 침묵하던 정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파들거리는 입술을 들키지 않으려 힘을 주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벌써 몇 번째 고백이던가, 하지만 이것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익숙해 질 수 없었다. 이토록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만, 지수의 미래를 함께 하고 싶다. 지금은 그저 그 마음뿐.
5.
정한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던 날 밤, 지수의 커다란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말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알아주는 정한이 좋았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서웠다. 정한을 사랑하고부터 정한과의 행복한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이건 지수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미안, 나 생각을 좀.."
지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황스러움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억지로 지탱해 똑바로 섰다. 지수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낀 정한이 한 발짝 다가왔다. 지수는 꼭 그만큼 뒷걸음질 쳤다. 정한은 주먹을 말아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서부턴 지수만의 시간이었다. 정한이 더이상 어떤 설명을 하든, 지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해 줄래?"
"...응."
지수의 집을 나온 정한은 어두운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긴 시간 동안 무려 94번의 꽃을 피워냈고, 그 과정에 실패도 많았다. 지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수는 달랐다. 정확히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본다면 말로 잘 설명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달랐다. 그렇기에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기대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 억지로 약해진 마음을 붙잡았다. 그렇다고 파괴되는 심장이 다시 견고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수와 함께 걸었던 거리를 정한 혼자 걸었다. 마음이 미어져서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꼭 그만큼 정한 안에 자리한 장미꽃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불안한 건 정한이 아니라 지수였다. 지수의 불안한 마음을 정한은 온전히 느꼈다. 장미꽃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검정에 가까워질수록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커진다는 뜻이었다.
"지수야..."
속절없이 파리하게 흔들리는 장미꽃을 보며 혼자 불안해하며 고민할 지수가 걱정이었다. 지수의 사랑이 불안할수록 정한의 안에 있는 장미가 힘없이 흔들렸다. 장미가 흔들릴수록 정한의 마음이 불안했다. 장미의 색은 점점 색을 잃고 옅어졌다. 흰색으로 돌아오면 태초의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좋았다. 그러니 지수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정한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럴 힘 또한 없었다. 그저 지수의 결정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지금까지 94번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정한은 어느 정도 사랑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떠나가지 않을 사랑, 그리고 자신을 떠나갈 사랑. 정한에게 지수는 전자였다. 하지만 이 또한 틀린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꽤 여러 번의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정한은 여전히 사랑이 어려웠다.
지수는 며칠 밤을 잠을 이루질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윤정한 생각뿐이었다. 취향도 성향도 하나도 맞지 않지만, 어쩐지 너무 잘 맞던 사람. 지수는 정한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두 정한이 짜놓은 판이었다.
그렇게까지 고약하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눈빛만 봐도 제 마음을 잘 알아주고, 말 안 해도 뭐든 척척 아는 정한이 좋았다. 그것마저 사랑이라고 느꼈었다. 하지만 그게 정한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제 감정을 모두 알아버리는 정한이 두려웠다. 사랑의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하는 정한이 무서웠다. 정한은 병이 들지 않고, 나이를 먹지 않는다. 정한과 함께한다면, 필연적으로 저 혼자 나이를 먹어 갈 것이다.
그런 미래가,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난,
"보고 싶어."
미치도록 외로워.
"정한아."
네가 너무 그리워.
새벽 내내 침대에서 뒤척이던 지수는 날이 밝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정한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어렴풋이 장미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정한은 이미 지수의 행복을 지배하고 있었다. 정한이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아. 지수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직 6시밖에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밖은 이미 동이 튼 지 오래였다. 환해져 오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지수는 정한을 생각했다. 정한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정한의 심장 근처에 피어난 장미는 지금쯤 노란빛을 띠고 있겠지. 정한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렜다. 그 설렘을 정한이 빨리 알아채 주길 바랐다. 지수는 있는 힘껏 달렸다. 제 모든 에너지를 태워서 정한에게로.
만약 내게 두 번째 삶이 오더라도,
"지수야."
그때도 너를 위해 피어나는 꽃이 될래.
6.
그 후로의 연애가 모두 평탄하게 흘러간 건 아니었다. 장미 한 송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건 사랑이고, 그에 뒤따르는 건 연애라 할지라도, 결국엔 모두 현실이었다. 지수는 종종 늘어가는 주름이나, 하얗게 새버린 머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거울 너머의 정한은 여전히 처음 만난 그날처럼 아름답고 빛났다.
"아직도 나를 사랑해?"
30대의 지수는 아름다움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집에 오면 잘생긴 20대 남성이 날 반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40대의 지수는 점점 커지는 격차를 받아들였다.
"이제 네가 내 아들 같아 보이겠다."
50대의 지수는 부족한 체력이 늘 미안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너만 보고 있었으면 좋겠어."
60대의 지수는 평온한 삶을 즐길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오랫동안 내가 늙어가는 걸 보니까 기분이 어때?"
70대의 지수는 정한과 함께하는 지금이 머지않았음을 짐작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80대의 지수는 혼자 남을 정한이 걱정이었다.
"다음 생엔 장미로 태어나고 싶어."
그렇게 하면, 너의 나라에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잖아. 많은 장미 속에서 피어나도, 나를 알아봐 줄 거지? 지수는 힘이 다 빠진 손으로 정한의 작은 손을 쥐었다. 정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수는 부쩍 잠이 늘었다. 지수가 잠들어 있을 때면, 정한은 말없이 곁에 앉아 지수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오랜 세월 함께 한 만큼 이별은 두려웠다. 지수와 함께 피운 장미가 밝고 건강한 색을 유지할수록, 시들어가는 꽃잎이 가슴 아팠다. 꽃이 한 잎 떨어졌다. 나머지 장미도 끝부분이 조금 말랐다. 정한은 지수에게 말 할 수 없었다. 그저 오래도록 곁에 있을 뿐이었다.
정한은 자주 지수와 함께했던 날이 기록된 사진첩을 펼쳐봤다. 지수와의 사랑을 기록하기 위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진을 남겨왔다. 사진은 어느 순간 줄어들었다가, 최근에 와서 또 많아졌다.
"다 늙은 사람 찍어서 뭘 하게, 창피해."
"그런 너를 사랑해."
정한은 한결같았다. 투정을 부리고 싫증을 내도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지수를 품에 안고 잠들기 전, 정한이 꼭 하는 말이었다. 지수는 정한의 다정한 목소리와 굿나잇 키스가 없으면 하루를 끝내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래도록 정한의 얼굴이 보고 싶을 때면, 부러 키스를 미루기도 했다.
"가끔은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어."
"여전히 사랑스러워."
"네가 내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나를 만나서 행복했어?"
"응, 더할 나위 없이."
지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7. 그 후, 정한.
지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연인이었다. 마음을 담아 사랑했고, 지수의 평생을 지켜봤다. 지수는 다른 어떤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94번의 이별을 겪었다. 그럼에도 유독 95번째 이별은 회복하기 힘들었다.
"나를 잊어."
"못하겠어."
"머지않아 너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고 싶지 않아."
자신이 없었다. 다른 사랑의 소멸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심장의 일부가 떨어지는 고통을 맛본 건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지수는 내 일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수의 얼굴은 선명해져 갔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수가 멸하는 그 날까지.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다.
지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수가 아니었다. 지수의 말투, 지수의 목소리, 지수의 표정, 지수의 상냥함, 지수의 사랑스러움을 가진 건 오직 지수 한 사람뿐이었다. 누구도 지수를 대신할 수 없었다.
이대로 다시 5번의 사랑을 한다면, 그토록 그리던 꽃의 왕국에 돌아갈 수 있다. 꽃의 신께 허락을 구하면, 사랑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었다. 지금의 고통은 바로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수가 이 세상에 살다 간 흔적은? 나와 열정적인 사랑을 해서 피워낸 장미의 흔적은? 내가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다.
정령이 다시 인간 세계에 나오는 일은 흔한 게 아니다. 한 번 꽃의 왕국으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지수를 만날 수 없다. 지수는 장미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지수를 사랑하고 싶다. 지수가 그리운 밤은 늘어만 갔다. 온몸 가득 지수가 흐르고 있다.
"지수야, 다시 태어나도 나를 사랑해줄래?"
시간을 돌고 돌아 얻은 게 있다. 정령이 아닌 인간의 삶은 돌고 돈다. 언제 어디가 될진 모르지만, 지수는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날 거다. 나는 지수를 기다리기로 했다. 지수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든 내가 만나러 가면 된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지수와 사랑을 할 것이다. 내 가슴속에 남은 5개의 장미는, 모두 지수와 함께 피우고 싶다.
그리운 왕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지수를 또 만나고 싶었다. 백 년, 이백 년, 아니 수천 년이 걸려도 좋았다. 그동안의 삶은 지수를 기억하는 데 쓸 것이다. 왕국으로 돌아가는 데 수억 년이 걸려도 좋았다. 그런 것쯤, 아무래도 좋았다.
"기다릴게, 네가 사랑하는 그곳에서."

안녕하세요, 버블티입니다.
합작에 참여하는것이 처음이라 굉장히 설레고, 또 떨리네요.
이번 윤홍 합작 주제를 보자마자, 몇 달 전에 정한이가 찍었던 '그' 향수 광고가 딱 떠올랐어요.
정한이가 장미 그 자체이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합작 형태로 글을 쓰는 것이 처음이라, 분량과 내용 전개 면에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포인트를 루즈해 지지 않게 하자! 로 잡고,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다 보니까..
(전개는 빠르지만) 조금 불친절한 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름의 끝자락에, 존잘님들의! 재미있는 글과 그림, 그리고 영상들 보시면서 행복한 시간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