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 나 오늘 늦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 윤정한. 너 어제도, 아니, 오늘도 술 먹고 아침에 들어왔잖아.
"종강도 했는데 뭐 어때."
핸드폰 너머가 적막하다. 소맥 비율을 두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술자리에서는 전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잠깐 친구들의 눈치를 본 정한은 "잠깐만." 하고 속삭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뒷골목. 옆에서 텁텁하고 기름진 바람이 나온다. 잠깐 핸드폰을 막고 있던 손을 뗄 때까지도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 초. 정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여기서 웃는 걸 들키면 큰일이다.
"지수야."
너머의 이름은 홍지수.
"나 기다릴 거야?"
─ …….
"홍지수. 대답해 봐."
─ 아빠한테 홍지수가 뭐야.
"나 보고 싶어?"
─ 그렇다고 하면. 지금 올 거야?
"어."
깊게 울리는 숨소리. 정한은 눈을 감고 지수의 숨소리를 만끽한다. 이제 곧 그가 바라던 대답이 들려올 것이다.
─ 와. 윤정한.
기다릴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정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방도 겉옷도 술집 안에 그대로 남겨두고 망설임 없이 집으로 향한다. 집에는 사랑하는 홍지수가, 윤정한을 기다리는 홍지수가 있다.
*
처음엔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태어나서부터 중학생 때까지의 기억이 없다. 모든 기억은 그와 가족이 된 순간부터 시작한다. 그는 정한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정한은 그를 만나기 이전의 기억을 모두 지우기를 선택했다. 그는 정한과 달랐으나 지금껏 정한이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도 정한을 사랑해주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은 후에도. 정한 역시 그를 그 어떤 인간보다 사랑했다.
"그들"은 인간과 달랐다. 마구잡이로 태어나고 버려지는 인간과 달리, "그들"은 무섭도록 일정한 수를 유지했다. 하나가 사라져야만 다른 하나가 태어난다. 그렇기에 "그들"은 종족 보존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그들"이 인간 사회에서 어떤 일을 벌여도 제재하지 않았다. 최고의 가치는 오직 생존. 그 외는 모두 용인. "그들"은 죽지도 않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불멸의 초능력자. 혹은 뱀파이어.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인간들이 인간의 언어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홍지수는 우리를 굳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신에 가깝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그들"이 인간을 키우는 목적은 둘 중 하나였다. 키워서 잡아먹거나, 노예로 쓰거나. 그러니까 홍지수는 인간과 가족이 되기를 바란 최초의 존재이다. 지수는 "그들" 답지 않게 도덕적 기준이 높은 편이었다. 수백 수천 년간 그 어떤 인간과도 관계를 맺지 않은 채 홀로 살았다.
그러다 정한과 마주쳤고, 그를 키우기로 했다. 아주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그날, 하필 지수가 그곳에 갔고, 하필 정한이 그곳에 있었다. 정한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지수는 그를 가여이 여겼다. 정한은 기꺼이 아름다운 지수를 따랐다. 인간을 혐오하는 것은 정한도 "그들" 못지않았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은 것도 그러했다. 지수는 정한에게 집을 주었고, 새 교복과 먹을 것을 주었다. 매일 따뜻한 곳에서 배불리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지수는 정한에게 부모였고, 가족이었고, 친구였다. 지수는 이십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어른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했던 열네 살의 윤정한은 그를 선뜻 아빠라고 불렀다. 지수는 그 호칭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인간의 아버지가 되려면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투자 효율이 높지 않고 정서적 손해가 더 커 보였으나, 긴 역사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부모가 되기를 반복했다. 부모를 욕하는 인간도 부모가 되곤 했다. 지수에게는 그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윤정한 중딩 때 진짜 귀여웠는데." 지수가 이렇게 말하면, 정한도 지지 않고 대답한다. "내가 아빠 놀아주느라 고생이 많았지."
인간의 아이는 빠르게 자란다. 정한이 성인이 된 후로 지수는 거의 매일 밤마다 와인을 홀짝이며 정한의 어린 시절을 추억했다. 불멸을 사는 "그들"에게는 찰나같이 짧은 순간일 텐데도, 지수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인간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자 애썼다.
정한과 보낸 몇 년동안 지수는 제가 더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다. 성장이라는 단어를 잊고 산 영겁의 시간. 많은 지식을 갖고 살았지만, 누군가를 걱정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지수는 편의상 스물여섯의 인간으로 살았다. 한국에서 살다 보면 인간 나이가 있는 게 편하다. 스물여섯에 멈춰선 홍지수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홍지수는 늙지 않는다.
그러니 언젠가는 정한이 지수보다 나이가 많아질 날도 올 테지.
너희 아빠는 왜 저렇게 젊어?
그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정한은 지수가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았다. 열네 살에 들은 말이었으니, 호칭은 아빠일지언정 진정으로 지수를 아버지로 생각한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처음에는 삼촌 정도로 느껴지다가, 성인이 되고 지수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을 즈음에는 형으로, 그러다 기어코 지수와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는.
지수는 육아에 진심이었고 정한은 사랑하는 지수의 아빠 놀이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계속 나이가 들어가는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세월에 불안해하며.
*
"아. 윤정한 개부럽네 진짜."
"왜?"
"근무지 기획3팀이래. 거기 홍대리님 계시잖아."
옆에서 뭐라고 떠들어댄들 당사자는 심드렁한 표정이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고. 정한은 담배를 한 개비 더 물었다.
인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옥상 정원에 다른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조무래기 인턴들은 슬슬 돌아가자는 분위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꼰대 김부장이 인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같이 피우지? 하며 담뱃갑을 흔들길래, 그만 내려가 봐야 한다며 사람 좋은 웃음으로 거절했다.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만, 전환형도 아니고 방학 동안만 하는 체험형 인턴이라 굳이 애를 쓸 필요도 없었다.
이런 것도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는 거야? 무리 사이에 지수가 있었다. 부자지간에 생이별까지 도모했던 지수를 생각하면, 이건 절대 지수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지수는 많은 일을 그냥 내버려두곤 했다.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인간들이 속한 세상이 굴러가는 대로.
*
언젠가의 날에.
지수는 키우던 아이를 독립시키기로 결심했다.
정한의 제대 후. 졸업을 앞두고 있을 즈음. 순순히 대학을 가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 정한은 흥청망청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장학금을 받기도 어려워진다는, 대한민국 대학생이라면 대다수가 공감할 딜레마도 정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지수는 한참 전부터 제가 정한에게 있을 집과 음식, 옷을 주는 것이 더는 제공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지수가 가진 모든 것은 곧 정한의 것이다. 정한은 지수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니까.
그러나 정한에게는 제가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한이 저를 아버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된 지 한참 됐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감정을 즐긴 것도 사실이다. 자식이나 다름없는 인간과 성애적 관계를 상상하기도 했다. 내가 진짜 아빠는 아니니까. 몇 년 전의 지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으로 자신을 변명하기도 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을 여러 번 읽었다. 광기에 휩싸인 워더링 하이츠에서 몇 세대에 걸쳐 일어나는 금지된 사랑에 대해 곱씹었다. 그즈음의 지수는 "그들"과 전혀 왕래가 없었다. 오로지 인간 윤정한에게만 푹 빠져 있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윤정한이 홍지수를 위해 술자리를 마다하고 돌아온 날 밤에.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잠든 정한의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며.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윤정한은 인간이다. 고로, 윤정한도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홍지수는 죽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될 수 없다. 반대의 경우는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그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다름없을 것이다. 지수는 정한이 떠나고 난 뒤 홀로 남겨질 저를 상상한다. 그리고 정한이 죽을 때까지 곁에 남아 그의 인생을 오로지 홍지수만의 것으로 채우는 상상. "그들"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지수는 정한을 저와 동등한 존재로 생각했고, 그를 사랑했고, 그렇기에 그가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기를 또한 바랐다.
정한은 격렬히 반대했으나, 지수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사실에 또 한 번 좌절했다. 홍지수는 인간이 아니고, 차마 제가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떠나보내는 정한의 얼굴에서 지수는 처음으로 배신감을 읽어냈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받기에는 다분히 고통스러운 감정이었다.
지수는 정한에게 작은 아파트를 얻어주었고, 생활하는데 어렵지 않을 만큼의 돈도 남겼다. 그리고 떠났다. 이제 우리는 완벽한 타인인 거야. 지수가 결심하면 정한은 따를 수밖에 없다. 멋대로 주워와 자식 삼아놓고는 버릴 때도 멋대로네? 하지만 정한도 이유는 알았다. 내가 아들로 보이지 않아서 그런 거지. 정한이 근사한 성인 남성으로 자랄수록 지수의 도덕적 관념에 금이 갔다. 안녕, 윤정한. 잘 지내. 그래서 지수는 정한과 떨어져 있기를 선택했다.
새로운 생활에는 빠르게 적응했다. 그러지 않으면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정한은 이를 박박 갈며 엉망인 학점을 복구하고, 토익을 따고, 돈을 처바른 자소서로 대기업 인턴에 붙었다. 지수가 곁에 있었더라면 진작 이렇게 하지 그랬냐고 말로는 툴툴대며 기뻐했을 것이다.
정한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글쎄. 일년 넘게 생사도 모르고 연락 한 번 주고받지 않았지만 어쩐지 지수와 이대로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년, 십년 후, 혹은 정한의 머리가 백발이 될 즈음. 적어도 정한의 임종은 보러오지 않을까. 죽기 전에는 지수를 다시 만날 것이고, 그때까지는 번듯하게 살고자 결심했다. 그뿐이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좀 대충 살걸. 하필 정한이 인턴을 시작한 회사에, 하필 정한의 사수가 되어. 이쯤 되면 정한은 이것마저 지수가 의도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얄궂은 운명이다.
회사에서의 지수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대체로 상냥했지만, 업무에 관해서는 단호했다.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일정 미루셔서, 제가 두 번은 절대 안 된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기억 안 나시면 5월 23일 자 결재 문서 확인해 보시구요. 내일 오전까지 메일 없으시면 다른 업체로 알아보겠습니다." 정한은 지수가 안 된다, 절대, 불가능, 이런 말을 쓰는 것을 처음 봤다.
이미 보통의 가족에게 품는 감정은 아니었으니 진짜 아버지라면 오히려 곤란했다. 하지만 정한의 중학교 졸업식과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사진을 찍고, 아픈 정한을 데리고 응급실에 갔던 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어린이날 백화점에서 신발과 농구공을 사준 것도 지수였다. 정상궤도에서 조금 엇나간 성장기를 보낸 정한의 기저에는 별수 없이 지수가 심어놓은 부자간의, 말하자면 효심 같은 게 한 톨쯤은 남아있었다. 둘 사이에는 대체로 둘밖에 없었으므로.
이곳에서는 누구도 정한과 지수를 아들과 아버지로 보지 않는다. 사이가 좀 데면데면한 사수와 부사수. 홍대리는 친절하고 일을 잘하는 직원이며, 회사 내의 평판도 좋다. 아침 6시쯤 일어나 피트니스에 들렀다가 그대로 씻고 출근한다고 정대리가 말해주었다. 원래는 정한의 아침을 챙겨주던 시간이다. 웃음이 나려던 것을 겨우 참았다. 정한은 그들이 모르는 홍지수를 알고 있다. 동시에 지금의 홍지수는 무척 낯설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섹시하고. 흥분돼.
이제는 정말 조금의 망설임 없이 지수를 사랑할 수 있다.
"홍대리님 고생이 많아. 정한씨 또 복사기 망가뜨렸다며?"
"정수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팀장님도 위층 정수기 쓰시던데."
"둘 다래. 근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일은 잘하던데."
"그러니까요. 제안서 깔끔하게 잘 쓰더라고요."
대리들끼리 커피 타임. 지수는 그냥 구석에서 아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늙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삶에 적응한 지수였다. 정한을 떠난 뒤로는 아주 행복하지도 아주 슬프지도 아주 간절하지도 않게 되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영원의 무료함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인간으로도 살아보기로 했다. 자소서도 쓰고 상사한테 욕도 듣고. 매일 새로운 자극으로 가득 차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인간의 흐름에 개입하지 말아야지 결심도 했다.
……딱 한 번만 쓸까. 윤정한이 고장 내놓은 복사기 앞에 서서 심각하게 고민한다. 엑셀로 주소를 왕창 던져주고 라벨지에 뽑아서 우편물에 붙이라고 시켰는데, 라벨지를 어떻게 넣은 건지 중간에서 죄다 구겨졌다. 그냥 구겨지기만 하면 다행인데. 스티커가 녹아 입구에 죄다 눌어붙기까지 했다.
팀장님이 뽑은 인턴이라 자를 수도 없고. 키울 때는 안 치던 사고를 다 크고 나서, 그것도 한 달 만에 벌써 몇 번이나 저지르는지.
정한이 일부러 그런다는 건 알고 있다.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겠지. 팀장은 계속 인턴 좀 잘 챙기라고, 면담이라도 해보라고 한다.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아 번번이 중요한 이야기를 피했다.
소식을 듣고자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한이 지수 없이 완벽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빈자리를 다른 행복으로 채우길 바랐다. 다른 평범한 인간들처럼. 그러나 둘은 다시 만났다. 지수의 의도가 아니었으니 운명이라고 봐도 좋을지. 다시 만난 윤정한은 그 사이 또 조금 더 자랐고, 지수를 향한 원망이 가득했고, 그러면서도 지수에게 예쁨 받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고 싶었지. 당연히. 꿈에서만 그리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어 죽을 만큼 기뻤다.
"홍대리. 오늘 일찍 퇴근하고 정한씨랑 같이 가서 저녁 먹어. 둘이 허심탄회하게 얘기도 하고. 어?"
팀장이 법카를 쥐여주며 지수와 정한의 등을 떠밀었다. 정한이 지수의 눈치를 봤다. 잠시 정한과 그대로 눈을 맞춘 지수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킷과 브리프 케이스를 챙기는 지수를 보고 정한도 자리를 정리했다.
"사이 좋게. 어? 요 앞에서 소주도 한 잔 하고." 팀장의 살가운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지수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정한과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탄 뒤로는 정적.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손끝이 너무 저릿해. 정한은 자꾸만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둘은 비슷한 보폭으로 회사 건물 밖을 빠져나간다. 누가 봐도 또래 직장 동료의 모습일 것이다.
"정한아."
서늘한 가을바람이 파고든다. 정한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러뜨린다. 한 발자국 앞서 걷던 지수가 뒤를 돌며 정한의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목소리로 듣는 이름.
정한은 낮게 욕을 읊조린다. 왜 나를 떠났어. 꼭 떠나야만 했느냐고.
"집으로 갈까?"
지수가 손을 내밀었다 .
*
지수가 데려간 집은 정한과 지수가 함께 살던 집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지금 정한이 혼자 살고 있다. 낯선 집으로 들어선다. 지수가 어두운 집안에 불을 켜자 곳곳에 익숙한 가구와 카펫,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정한의 집에 있는 것과 같은 물건들. 다를 바가 없다. 정한이 기가 차다는 듯, 한숨처럼 웃음을 내뱉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열면 보이는 풍경은 눈보라가 치는 설원. 문을 닫고, 다시 문을 열면 라일락과 아이리스, 수선화 따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지베르니 정원이 보인다. 프랑스 특유의 여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마저 전해진다.
이 문은 정한과 지수가 같이 살던 집에도 있던 것이었다. "그들"의 집에는 모두 이런 문이 있다. 지수는 어린 정한을 데리고 종종 지구 어딘가로 넘어가곤 했다. 정한이 좀 더 큰 뒤에는 혼자.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가상이 아닌 현실이어서, 다 큰 인간이 문을 통해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을 들키면 일이 귀찮아진다. 지수가 집을 떠난 뒤로는 그저 장식에 불과한 문이 되었다. 문 너머의 세상이 그리울 때면 정한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몬스터 주식회사」를 봤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도시, 다른 세상과 연결되는 이야기. 지수가 문을 통해 잠든 저를 보러 올까 기다리던 밤들.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잘 지냈어?" "어." "보고 싶었어." "……나도." 부루퉁한 정한의 대답에 지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춘기 온 아들 같아. 지수가 웃자 냉랭하던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정한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지수가 과일을 깎았다. 원래는 칼질도 서툴렀는데, 정한에게 과일을 먹이려고 계속 연습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능숙해졌다.
"이걸 다 깎아버리면 어떡해. 혼자 이만큼 먹지도 못할 거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복숭아 한 상자를 다 깎은 뒤였다. 아. 정한의 말에 지수가 화들짝 놀라며 과도를 내려놓았다. 혼자, 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돌아가기 전에 좀 챙겨줘야겠어. 하나만 남기고 다시 다 냉장고에 넣었다. 정한은 어디서 찾아낸 건지 도수 높은 양주를 가져왔다.
소주는 아니었지만 일단 팀장이 바라는대로 술을 마시면서 얘기를 하긴 했다. 사고 좀 그만 치라는 홍대리의 말에 정한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더 큰 사고 안 친 걸 다행으로 알아. 정한이 마음을 먹으면 정말 더 큰 사고를 치고도 남을 것 같아 지수는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것 말고는 별다른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정한의 행동은 저를 두고 떠난 지수를 향한 반항이자 시위였으므로.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전지전능한 불멸자지만 술은 약하다. 지수가 할 수 있는 아주 많은 일을 생각하면 지극히 사소한 약점이었다. 원래도 차분하던 눈꼬리가 더욱 나른해진다. 붓으로 그린 듯 길게 빠진 눈꼬리. 지수의 눈이 천천히 깜빡이는 것을 정한은 멍하니 바라본다.
저 눈꼬리에 입을 맞추고 싶어.
스물 여섯의 정한이 영원한 나이에서 멈춘 지수를 보며 생각한다.
"……정말, 이대로 영영 안 볼 생각이었어?"
기분 좋게 취해 소파에 기대있던 지수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간다.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갈 거란 것도 다 알았지. 기획 3팀으로 배정받을 것도. 대체, 대체 어디까지 나한테 잔인하게 굴 거야. 니가 먼저 나를 주웠잖아. 사랑한다며. 그래놓고 멋대로 떠나고. 아버지 대신 대리님이라는 호칭이 듣고 싶었어?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그랬어. 못하는 게 없으시잖아. 마음 하나 조작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닐 거면서."
"정한아. 그렇게 말하지 마."
말하는 너까지 아프게 하지 마.
지수가 다가가 정한의 눈물을 닦았다. 정한이 거칠게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친다. 괴로워. 부탁이야. 너를 그만 사랑하고 싶어. 정한이 울며 속삭였다. 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아. 정한의 말이 맞다. 제가 먼저 주워왔고, 멋대로 떠났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아파. 지수가 천천히 정한의 얼굴을 더듬었다. 정한은 여전히 지수를 사랑하고, 그 절박한 사랑이 지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가 너를……네 마음에 손을 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지수의 말에 정한이 결국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참을 성없는 아들로 오냐오냐 키운 건 너야. 물어뜯을듯 지수의 입술을 씹었다. 지수가 저항 없이 입을 벌린다. 정한이 두 손으로 지수의 볼을 어루만졌다. 정한의 손길을 따라 지수의 턱이 따라간다. 결국, 지수도 팔을 뻗어 정한의 목에 둘렀다.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간다. 정한의 혀가 지수의 입안을 사정없이 헤집는다. 키스하는 법은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문득 지수는 낯선 질투를 느낀다.
정한이 혀를 물고 당기자, 지수의 다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한참 물고 있던 입술을 지나 턱으로, 목덜미로, 쇄골. 더 아래. 지수가 목을 뒤로 꺾으며 흐느꼈다. 인간의 애무로는 느끼지도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정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몰아치는 키스에 정신이 없었다. 정한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홍지수. 나 봐."
당신이 머뭇거리는 동안 저는 벌써 이만큼 자랐습니다.
머지않아 정한은 지수보다도 나이가 많아질 것이고.
"형이라고 불러봐."
지수 위로 올라탄 정한이 발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가 힘 빠진 얼굴로 웃는다. 정한이 다정한 손길로 지수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만 포기해. 세상에 어떤 아빠가 아들이랑 키스하면서 흥분하는데. 그리고는 지수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다시 입을 맞춘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수가 위에서 정한을 내려다보고 있다.
"윤정한. 적당히 해."
이제 진짜 안 봐줄 거니까. 정한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제발 나를 봐주지 마. 키우고 지켜야 할 무엇으로 생각하지 마.
정한은 기꺼이, 사랑하는 연인의 몸을 끌어안는다.
회사에서 재회한 순간. 둘은 결국 그들의 관계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멋대로 씨앗을 심은 건 정한이었지만 그걸 키운 건 지수였다. 지수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한은 나무가 될 수도, 가시덤불이 될 수도, 그대로 썩어버릴 수도 있었으나. 많은 선택지 중에서 그는 지수의 물가에서 피는 꽃이 되기를 골랐다. 지수가 바랐던 정한의 자유의지로.
사랑해……. 정한의 위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며 지수가 말했다. 몇천 몇만번이고 상상했던 순간. 덜컥 밀려들어 오는 지수의 고백에 정한도 벅차오른다. 일렁이는 감정이 만개하는 순간. 몸을 일으켜 지수를 끌어안았다.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나도. 나도 사랑해.
"여기로 내일, 짐, 옮길 거야."
"응, 응."
"다시는……. 또 이러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으응. 미안."
우선은 눈앞의 것에, 지금 당장 마음이 향하는 쪽으로 가자. 원한다면 정한은 불가능에 가까운 방법을 가능하게 만들어 지수와 동등한 "그들"이 될 수도, 혹은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 같은 홍지수를 귀여워하며 늙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해.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았어.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그런 마음을 담아, 지수가 정한의 머리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다녀왔어."
지수의 팔에 입을 맞추며 정한이 대답한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홍달서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몇 년 만에 윤홍 합작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그동안 늘 윤홍을 좋아하고 있던 터라 참여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쁩니다. 여러모로 도와주신 진행팀께 정말 감사드리고요ㅠㅠ 조만간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윤홍으로 찾아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