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fgebluht


내 이름을 아는 남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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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괴담 같은 거 잘 믿지 않아. 세상에 아무리 믿을 게 없다지만. 그런 거 믿는 애들이 눈 뜨고 코 베이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사는 거야.

 

   2021년 8월 20일 오후 세 시 이십칠 분. 정한의 자취방에서 그의 괴짜 지론이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박살나고 있다. 그동안 남의 코 베고 발등 찍고다닌 업보빔을 맞는 중인가? 먼지 쌓인 찬장에서 어떻게 찾아냈는지 모를 찻잔을 달그락거리는 제 방의 이방인을 보며 정한은 여태껏 써먹었던 미신 및 각종 찌라시를 복기한다.

 

   정한의 이름을 아는 남자. 많지. 정한의 학력을 아는 남자. 지인이라면 적지 않지. (지인이 아니라서 문제다.) 그렇다면 정한의 매장당한 가족사를 아는 남자는? 있어도 된다. 하지만 정말 존재한다면 구구절절한 신파의 비밀을 위해 땅 아래 묻혀야 한다. 파리바게트 앞 사거리에서 H 기업 셋째 윤정한 씨 아니세요? 속삭이며 다가올 수 있는 남자. 검증된 마법의 주둥아리 윤정한을 아가리로 꼬셔서 집에 들이게 하는 남자. 이건 진짜 도시 괴담이 아니고서야.

 

   괴담 같은 남자는 고상하게 홀짝대던 찻잔을 내려놓고 얼마 있지도 않은 살림살이를 뒤집어 엎는다. 위험한 초대 찍던 손님에서 루저 케어 세스코가 되어 정한의 쓰레기장이자 공터이자 보금자리를 뜯어고쳤다. 냉장고가 그냥 편의점이네. 이거 날짜 지났어. 이것도. 다리 부러진 거울은 왜 안 치우는 거야? 책도 없으면서 책장 갖다 놓은 게 진짜 이해가 안 된다. ....... 레고는 뭐야?

 

   안 그래도 버릴 거였어. 하루이틀 지난 건 괜찮대. 그건 오늘까지잖아. 거울이야 비치기만 하면 됐지. 벽이 비어서 갖다 둔 거야. 레고는....... 몰라도돼. 정한은 단정하게 정돈된 미모의 외부인과 같은 집에서 같이 자고 일어난 게 맞는지 모를 부스스한 꼴을 하고 외부인의 뒤를 쫓아 해명을 늘어놓는다. 테이프도 뜯지 않은 레고 박스 더미를 끄집어내는 건...... 할 말이 없다. 그러든 말든 외부인은 어젯밤 진탕 취한 정한과 뒹굴었던 침대를 마저정리한다.

 

   "일어나면서 이불 정리해."

   "알았어."

   "지금부터 해."

 

   듣는둥 마는둥 하는 대답에 꼴받았는지 제 손으로 각 맞추던 이불을 확 흐트러트린다. 정한은 하는 수 없이 몇 번 덮은 적도 없던 이불을 손에 쥐고 꼼지락댄다. 외부인은 지체 없이 행거로 향한다. 몸을 숙여 떨어진 옷걸이를 줍는다. 옷 벗고 막 쌓아 둘 거면 옷걸이는 왜 쓰고 행거는 왜 샀어. 볼멘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방인은 뒤를 돌아본다. 정한은 없고 화장실에서 수도꼭지를 여는 소리가 들린다.

 

   "아. 신경 쓰지 마."

 

   화장실에 들어서니 흰 티에 핏자국 흘린 채로 휴지로 코를 막는 정한이 있다. 잔뜩 퀭한 얼굴이다. 어제 일로 피곤했을 거라 추측하기에는 막 재회했을 때 얼굴도 비슷했던 터라, 외부인은 정말 별 신경 안 쓴다.

 

   "내가 원래 체력이 안 좋거든. 그래서 운동도 잘 안 해. 어느 쪽을 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전 아닐까?"

 

   정한은 피 묻은 손을 닦으며 주절거린다. 냉혈한 같은 외부인이 걱정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고, 정한의 버릇이다. 주절대는 거. 외부인은 고개를 갸우뚱.

 

   "그걸 나한테 물어?"

   "나보다 많이 아는 것 같길래. 비꼬는 거 아니야. 구면인 것 같은데 나는 영 기억이 안 나네."

   "응. 당연하지."

   "너 말하는 거 진짜 수상한 거 알아?"

   "응. 실컷 의심해."

 

   정한은 외부인을 흘기며 수건을 찾는 척하다가 그의 얼굴에 물을 튀기고 후다닥 도망친다. 돌부처와 흡사한 외부인의 걸음소리가 일정하다. 정한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기억을 샅샅이 되짚는다. 중고등학교 동창인가? 부모님 지인? 아니면 또 그쪽에서 보낸 사람? 그럼 몇째 형 쪽에서 보낸 사람이지? 외부인이 정한의 옆에 앉는다. 무슨 생각 해?

 

   "네 정체에 대해서."

   "내 정체? 뭐, 외계인? 그런 거?"

   "아니. 누구한테 사주받고 나한테 칼 꽂으려는 건지."

   "칼 맞을 짓 했어?"

   "응. 많이......."

   "심각하네."

 

   정한은 자세를 고쳐 앉고 외부인을 똑바로 마주본다. 정한의 눈깔이 텅 비었다. 어쩌면 조금 미친 걸지도....... 그래. 사는 데 별 미련도 없는 거 그냥 일찍 맞고 죽자.

 

   "들어봐. 의심 가는 놈이 두 명 정도 있어."

   "응."

   "첫번째는 첫째 형. 두번째는 셋째 형."

   "둘째 형은 어디 갔어?"

   "식물인간 됐으니까 묻지 마."

   "알았어. 근데 둘 다 아닌데."

   "......."

 

   둘 다 아니면 대체 누구야. 우리 집이 아무리 콩가루라도 그 둘 아니면 나 죽이려고 사람까지 쓸 사람은 없단 말이야. 아니다, 꼭 가족이란 법은 없지. 내가 한두 곳 사기 치고 다닌 건 아니니까. 와. 이거 진짜 업보빔 맞네? 정한의 입이 습관처럼 주절거린다. 따지자면 중얼중얼에 가깝다. 출신 모를 외부인은 정한의 떨리는 손을 본다. 가족들이랑 사이 안 좋아? 그의 목소리가 나긋하다. 정한은 이상한 박자로 웃는 짓을 멈춘다. 응. 안 좋아. 친족 살해로 진작에 빵 들어갔어야 할 인간들 천지인걸.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외부인은 사르르 웃는다.

 

   "거기까지는 몰랐어."

   "그럼 내가 지금 다 불어버린 거네?"

   "그렇지."

   "와. 좆됐다. 야 이거 진짜 비밀이야."

   "응. 가정사 스펙타클한 게 놀랍긴 한데, 그런 거 아냐. 그냥 네가 잘생겨서 잔 거야."

 

   외부인은 또 사르르 웃는다. 경련하는 정한의 손을 잡으며. 정한은 눈물도 안 나왔으면서 코를 한 번 훌쩍거렸다. 한참을 손을 맞잡고 있더니 진정이 된 건지 긴장이 풀린 건지 정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노트와 펜을 찾아온다. 외부인은 펜을 딸깍이는 정한을 가만히 바라본다. 노트에 적히는 내용을 흘긋 본다. 1 우리는 잤으니까 지금부터 사귄다고 전제하고 동거를 시작한다 (거부할 수 없음) 2 집안일은 번갈아 하기 3 니 취향이라고 길거리에서 취한 사람 아무나 잡고 집 어디냐고 묻지 않기

 

   "사 번은 뭐 쓰지. 추천해 봐."

   "우리 사귀는 거라고?"

   "엉. 연애는 해보고 죽어야지. 난 내일 당장 차에 치여 죽을지도 모르는데. 싫어?"

   "아니. 생각보다 빠르네."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고 네가 맞춰."

 

   정한이 사 번을 끼적인다. 4 비밀 만들지 않기. 그대로 부욱 찢어 외부인의 눈앞에 내민다. 검지로 사 번을 쿡 찌른다. 자, 비밀 만들지 않기.

 

   "일단 첫번째 질문. 너 진짜 뭐 하는 사람이야? 어떻게 얼굴만 보고 내가 어느 댁 어느 영감 몇째 아드님인지 아는 거야?"

   "너무 일찍 묻는 것 같아. 원래 이런 건 헤어지기 직전에 밝히잖아."

   "연인 사이에 비밀 만들면 안 돼."

   "그래....... 나는 네 전남친이야."

   "장난치지 마라."

   "또 기억 못 하네? 섭섭하게. 우리 백 번은 사귀었을 텐데."

 

   한숨을 쉬던 정한의 표정이 점점 굳는다. 외부인의 웃는 얼굴이 어딘지 오싹했다. 괴담 같은 남자. 오늘이 생전 최후의 날이라는 망상을 끝낸 직후라 잠깐 들떴었다. 정한은 남자 주변의 공기를 살핀다. 어쩐지 서늘해진 것 같았다.......

 

   ".......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백 번은 과장한 거고. 몇십 번은 만났는데."

   "진심이라기엔 지금 상당히 성의 없는 태도인데."

   "정한아. 너도 몇백 년 동안 한 사람한테 똑같은 말 반복해서 설명해 볼래?"

   "......."

   "솔직히 이젠 굳이 설명해야 하나 싶어. 너도 나 딱 보고 느꼈잖아. 운명이랄까, 그런 비슷한 어떤. 알지?"

   "그런 거 없었는데?"

   "그럼 넌 원래 아무나한테 집 알려 주는 사람이야?"

   "아니지......."

   "그치? 넌 원래 처음은 혼란스러워해. 전생이고 나발이고 진지하게 말해 봤자 믿지도 않아. 곧 괜찮아질 거야."

 

   정한은 혼란스럽다. 장장 이십칠 년 몸 담았던 스릴러에서 생뚱맞은 로맨스 판타지로 장르 변경된 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장 당혹스러운 건 눈앞의 외부인이 말하는 멜로 대서사시가 곧이곧대로 믿긴다는 점이다....... 그래....... 뭔가 홀린 것 같다는 느낌이 있긴 했어....... 아니 근데 그건 술기운 아니었냐고. 정한이 머리를 싸맨 틈을 타 외부인이 종이와 펜을 가져간다.

 

   5 모레에 헤어지기

 

   여기서 더 터질 뇌세포도 없는 정한이 입을 떡 벌린다. 미쳤어? 진심이야? 외부인은 평온한 미소로 끄덕인다. 응. 나 모레 출국이야. 무슨 출국? 왜? 그러니 외부인이 지갑을 찾아 명함을 내민다. 잘은 몰라도 번듯한 직장 번듯한 직함. 정갈한 영어 폰트로 적힌 조슈아 홍.

 

   "그러니까 네 이름이 조슈아 홍이고, 팀장님이고, 오늘 사귀기로 했는데 모레 출국하느라 헤어져야 하고, 몇백 년 동안 나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말이지."

   "이해 다 안 됐으면서 된 척하지 말아 줘."

   "하하하. 이걸 반쯤 믿고 있는 내가 미친 것 같다. 이거 꿈 아니냐?"

   "한 대 쳐 줄까?"

 

   외부인, 아니, 조슈아의 손이 솥뚜껑만큼의 위력을 가졌을 거라 짐작한 정한이 고개 젓는다. 이게 진짜냐고.......

 

   "나도 안 믿겨."

   "뭐가."

   "이번 생의 네가 이런 사람으로 태어난 거."

   "이런 사람이라니."

   "쓰레기장에 사는 감정기복 심한 콩가루 집안 막내 아들로 태어났을 줄 몰랐다고."

   "원래 이러진 않았는데......."

   "너 안 물어봤는데 주절대는 것부터 좀 고쳐."

   "그래 미안."

   "그럼 이제 정해."

   "뭘?"

   "헤어지기 전까지 나랑 하고 싶은 일. 이틀 치."

 

   우리 모레에 진짜 헤어지는 거야? 응. 마지막 날은 일찍 비행기 타야 해서 아무것도 못 할걸. 조슈아는 단호하구나. 응. 좀 더 살갑게 대해 줘. 몇백년 동안 찾아 헤매고 있는 전생의 연인이라며 내가. 그렇지. 근데 넌 내가 어떻게 나와도 곧잘 적응하니까 괜찮아.

 

   그리하여 정한은 미친 로판 서사를 받아들이고 데이트 코스를 짜느라 조슈아와의 삼일천하 중 하루를 날려먹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연인이라도 첫 연인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생의 첫 연인이다.) 고작 삼 일뿐이라도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연인답게. 속아 주는 셈 쳐도 고작 삼 일이니괜찮다. 이런 점에서 그가 정한에게 자신이 불가항력의 운명적 존재라는 주장을 펼치는 걸지도 모른다. 만난 지 열두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수상한 남자를 위해 끙끙거리며 데이트 코스를 짜는 윤정한이라는 거. 확실히 이상했다. 정한 본인도 낯설어 펜을 돌리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몇백 년 역사를 가진 연인과 함께 맞는 두 번째 아침은 우중충했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질 않았다. 오전의 공원 산책을 오후로 미루고 오후로계획했던 넷플릭스 감상 홈데이트를 오전으로 땡겼다. 일어나자마자 클래식한 로맨스 영화 시청하려니 집중도 안 되고 졸렸는데 조슈아는 잘 집중했다. 사실 졸려서 집중 못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정한이 입을 달싹거린다. 슈아야. 응. 왜. 결국 정한은 어젯밤부터 제 머릿속을 지배해 버린 것에 대해 입을 열기로 한다.

 

   "어제 한 얘기 있잖아. 나 전생에 고라니였다는 거 진짜야? 장난 아니고?"

   "그렇다니까."

   "그으래. 근데 나 고라니였어도 좀 귀여웠겠다. 잘생겼었을 거 아냐. 그치?"

 

   조슈아는 쥐고 있던 정한의 머리를 빗던 방향으로 확 당긴다. 엄살 섞인 아아아아 소리가 딸려온다. 현세를 아무리 개새끼로 살고 있어도 그렇지 전생에 사람도 아니고 고라니였다니. 강아지도 아니고 토끼도 아니고 고라니? 너무해. 한국 고라니였어? 조슈아는 듣지도 않고 귀찮다는 티를 내며 대충대충 대답한다. 정한도 개의치 않고 조슈아의 작품을 감상한다. 슈아 머리 잘 묶네.

 

   "너는 이상하게 인간으로 태어날 때마다 머리를 기르거든. 밴드 같은 건 한 번도 한 적 없으면서."

   "이젠 농담 같지도 않다. 그렇구나. 나는 전생에 한 번도 밴드를 한 적이 없구나. 근데 나 머리 기른 지 얼마 안 됐어. 엄마 죽고 나서부터 길렀으니까 이제 이 년 됐나."

   "잘 주절거리네. 가족사는 비밀이라며."

   "너한테는 말해도 되잖아."

 

   그래도 집안 얘긴 길게 하기 싫어. 어떻게든 호적에 이름 끼워 넣고 싶어서 배다른 형 식물인간 만들고 여기저기 설치고 사기 치고 별 짓 다 했는데....... 세상에 딱 하나 있는 피붙이 없어지니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 나 원래 이렇게 안 산다는 거 진짜야. 나도 똑바로 살 줄 알아. 밥도 알아서 해 먹고 청소도 알아서 잘해.

 

   "너 주절거리는 버릇은 진짜 고쳐야겠다."

   "야이씨......."

   "안 궁금해. 몇 번째의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다 기억하지도 못 해."

   "그래도 들어."

 

   이제껏 이런 거 말할 데가 없었단 말이야. 너는 나 사랑하잖아. 날 사랑해서 몇백 년의 시간을 바치고 있는 거잖아. 그럼 그냥 들어 주라. 나 이런 거 말하는 것도 연애하는 것도 누가 날 사랑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 알아. 어디 가서 연애 안 해 봤다고 하면 기만자 소리 듣고 그래. 주절거림을 끝맺을 때쯤의 정한은 습관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착각하지 마."

 

   조슈아가 제가 만든 꽁지머리를 확 잡아당긴다. 타의로 고개 들린 정한이 아프다고 짧게 신음했다.

 

   "네가 나 없으면 못 사니까 매 생마다 널 만나러 오는 거야."

   "......."

   "지금도, 봐. 네 사연이 어쨌든 쓰레기같이 살고 있는 건 맞잖아, 정한아. 집은 거지 꼴이지, 제대로 된 일도 안 해, 틈만 나면 안 물어본 얘기 주절거리고, 애정결핍도 조금 있는 것 같아. 아, 또. 넌 네가 잘생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별로 멀쩡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야."

   "......."

   "나 너 찾으려고 세 달을 한국에 있었어. 출국 사 일 전에야 만난 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해? 종일 집에만 박혀 있는 히키코모리 정한이 때문이라고생각되지 않아?"

   "......."

   "이번만큼 촉박한 건 처음이야. 네가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든 성격이 워낙 별나서 늘 짧게 만나고 헤어지긴 하는데, 삼 일은 나도 처음이라고."

   "미안."

   "뭘 사과하는 거야?"

   "이렇게 사는 거......."

 

   조슈아는 따발총 쏘던 입을 다물고 팔짱 낀 채 정한을 바라본다. 발음마저 간지러운 영어 대사를 배경음으로 조슈아는 고백한다.

 

   "나도 불안해. 이번엔 네가 날 사랑하게 될 시간도 없는 것 같아."

 

   정한이 눈을 감은 조슈아의 어깨에 기댄다. 손을 움직였다가 양손 가득 담요를 쥔다. 초조하다고 손도 가만히 못 두는 주제에 작게 웅얼거린다. 내가노력할게. 내가 너를 사랑해 볼게. 남은 하루 동안.

 

 

 

   그래서....... 오후에도 계속 비가 왔는데 산책을 했다. 우산 두 개 쓰고 나와서 애처럼 뛰어다니느라 다 젖었다. 조슈아는 정한을 놀아 주려는 것 같았고 정한은 진심전력으로 놀았다. 슈아야 가위바위보 해서 진 미국인이 우산 두 개 들기 하자. 그래 놓고 말장난 걸리니까 냅다 우산을 뺏고 튀었다. 잡힐 때쯤에는 쫄딱 젖은 조슈아의 전화가 울렸다. 음량이 커서 조금 들렸다. 영어인데 대충 조슈아 어쩌고. 업무 관련인 듯했다.

 

   "조슈아 팀장님? 통화 끝나셨어요?"

   "어. 왜 이래."

   "조슈아는 뭔가 어색해. 입에 안 붙어. 슈아가 더 편해."

   "정한아. 너도 윤정한인 거 안 어울려."

   "그 전엔 뭐였는데? 내 이름."

   "고라니가 이름이 어디있어?"

   "아 또 고라니 얘기야."

 

   정한이 삐친 소리를 하든 어쩌든 조슈아 팀장님은 정한이 뺏어간 우산을 되찾아온다. 다 젖었잖아 정한아. 너 몇 살이야. 대충 일곱 살. 응 그래. 몇백 년 봤다더니 먹금 장난 아니네.

 

   결국 둘 다 젖은 채로 들어와서는 찝찝하다고 먼저 씻겠다고 난리를 쳤다. 결국은 같이 씻었다. 우리 사귄 지 이틀만에 같이 씻는 거야. 너무 빠른 것같지? 저기 정한아 우리 처음 만난 날에도 벗고 시작했어. 아 맞다. 실없는 소리나 하느라 야시시한 분위기 같은 건 안 잡혔다. 그런대로 좋았다.

 

   씻고 나와서는 나란히 머리 말렸다. 어깨에 수건 걸치고 라면 끓였다.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가 되는데도 특별할 건 없었다. 정한은 조슈아를 사랑하는 일에 전념했다. 사랑에 빠지려 부러 방방거리며 깝쳤다. 별 반응은 없었고 밥 먹는데 정신 사납다는 핀잔이 돌아왔다.

 

   먹은 걸 치우고 조슈아가 혼자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고 있길래 정한은 먼저 양치했다. 몇 시 비행기야? 아까 어깨 너머로 훔쳐봤으면서 괜히 한 번더 물었다. 정말 지금 자고 일어나면 끝인 거구나. 타임어택 사랑이네. 실감이 잘 안 났다. 정한은 조슈아가 양치하고 있을 동안 알바 채용 어플을 뒤졌다. 조슈아가 들어오고 이른 취침을 위해 일찍 암전된 방에서 정한은 쉽게 눈을 감지 못했다. 정한은 옆에 누운 조슈아의 손을 찾아 어두운 침대를더듬는다. 손에 잡히는 환상을 꼬옥 쥐었다.

 

   "슈아야."

   "......."

   "나 똑바로 살게."

   "......."

   "네가 좀 좋아졌거든."

 

   짧은 정적 후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몇 세기를 함께한 연인과의 마지막 아침은 더할 나위 없이 화사했다. 완벽한 햇살을 받으며 알람이 울리기 전 일어난 정한이 혼자 머리를 묶고 아침을 준비했다. 조슈아는 정한 표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짐을 챙겼다. 중간중간 시간을 확인하는 조슈아를 보고 있자니 입을 비죽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똑바로 살겠다 다짐했으니까 참았다. 깔끔한 조슈아의 조수석에 과자 부스러기 마구 흘려가며 먹고 싶었는데 그것도 참았다. 똑바로 살아야지. 모레엔 알바 면접이 있고 오늘은 머리를 자른다. 다음 주엔 첫째 형을 만나러 간다. 칼 맞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죽는 건 무섭지 않다. 더 빨리 다시태어나서 조슈아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조슈아가 안다면 기겁할 발상이겠지만.

 

   "마지막으로 할 말. 빨리 해. 좀 늦었어."

 

   공항 주차장에서 정한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분명 비행기 뜨기 직전까지 구질구질하게 질질 짠다고 비행기 놓치고 피차 민망해질 거라는 조슈아 팀장님의 현명한 이별 장소 초이스였다.

 

   "시간이 너무 없었어."

 

   시간이 부족했어. 나는 드디어 너를 사랑하게 된 것 같은데. 그렇게 되자마자 떠나는 건 너무 아쉽잖아. 너만 몇백 년 사랑해 놓고 나는 꼴랑 삼 일사랑하게 하는 건 불공평해. 다음에는 내가 기억하고 싶어. 나도 몇백 년 동안 널 찾아다니고 싶어.

 

   똑바로 살겠다고 한 게 며칠이나 갈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나 주절거리는 버릇 고칠 거야. 가족들한테도 사과하러 갈 거야. 일도 할 거고 집도 치우고 살 거야. 너 출국하면 머리도 자를 거야. 그러니까 언제든 어디서든 내 걱정은 하지 마. 이 다음 생에도 내가 똑바로 살고 있지 않다면 그냥 한대 쳐도 괜찮아. 그러니까 다음엔 대신 청소해 준다거나 하는 거 말고 그냥 일 분만 더 대화하고 일 초만 더 쳐다볼 수 있게 해 주라.

 

   장황하게 말을 끝마친 정한은 울지 않았다. 발표라도 끝낸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쉴 뿐이었다. 조슈아는 잠시 고민했다. 새빨개진 정한의 얼굴을 가려 줄지. 눈 시리게 맑은 하늘 아래 익은 뺨이 잘 어울려서 그냥 두기로 한다.

 

   "다음에 또 보자."

 

   정한은 몇백 년을 한 사람을 위해 바치는 초인이 아니라 마주 손 흔드는 짓은 차마 하지 못했다. 뒤돌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멀어지는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는 짓도 하지 않았다. 들고 나온 지갑만 꾸우욱 쥐었다. 울지 말자. 머리 자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