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째 비가 온다는 것은 여러모로 빌어먹을 일이다. 빨래가 마르지 않고, 기분은 꿉꿉하며, 늘 우산을 챙겨다녀야 하는 데다가 눈앞의 시야도 불분명하다. 하물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거리에 젖은 제 바짓단이나 볼 줄 알지 누군가가 길가 구석에 주저앉아있는 걸 볼 정신은 없을 거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그리고 그 누군가에는 윤정한도 포함된 사실이었다.
"저기요."
윤정한은 우산으로 얼굴을 아예 가리다시피 한 채 걷고 있었다. 탈색한 금발이 부스러져 머리 감기도 힘든 판에 빗물까지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윤정한은 불쑥 들린 목소리에 소리 없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사실 그냥 목소리였다면 덜 놀랐을 텐데,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숨소리 가득한 목소리여서 더 놀랐다. 윤정한은 곧 제 옆쪽의 아래, 길바닥에서 검은 무언가가 꾸물거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 깜빡할 새 판타지 세계로 떨어진 게 아닌 이상 멀쩡한 사람이었다. 멀쩡한가? 윤정한은 대답 없이 내려다봤다.
"……미안한데, 담배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어둑한 길에서 나긋한 목소리는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집이나 가출한 일진의 담배 심부름이라면 윤정한은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갔겠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말을 건 얼굴이 남들보다 무척이나 예뻤던 것도 있고, 목소리가 남들보다 더 좋았던 것도 있고.
"아."
무엇보다 윤정한이 이전에 해봤던 질문이라는 것이 남들이 겪는 보편적인 상황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윤정한의 손에 팔뚝이 쥐여져 일어난 남자는 비틀거리며 윤정한의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눅눅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흠뻑 젖은 몰골을 하고 윤정한을 마주본 채 사르르 웃었다. 안녕, 정한아. 꽤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반대로 윤정한은 미간을 좁히고 입술을 벙긋거리다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홍지수. 그 홍지수에게서는 비릿한 냄새가 났다. 묵직한 향수 냄새만 풍겼던 홍지수에게서는 빗물의 비린내와, 그보다 더 짙은 쇠 냄새가 났다. 왜 이런 몰골로.
"너 언제 왔어."
Better than XXX
W. SSHU
비가 오는 날에 치르는 장례는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것도 생전 처음 해보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장례에,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뻔히 보이는 야외라면 그 효과는 몇 배나 더 짙어졌다. 우산 아래에 들어가지 못한 검은 정장이 눅눅해져 흠뻑 젖은 몸에 달라붙었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물기, 우울, 그로인한 무게. 윤정한은 빗물이 타고 흐르는 젖은 눈꺼풀로 Camila Yoon 이라 적힌 영어 이름을 이질적으로 바라봤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었댔나. 이제는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 됐다. 윤정한은 유일한 핏줄이었던 모친의 이름이 문득 원망스러워졌다.
생전 처음 밟아보는 이국의 땅을 이런 식으로 맞이하게 될 줄 알았다면 윤정한은 좀 더 일찍 이곳에 와봤을 거다. 홀로 어린 윤정한을 키워내고 대학까지 보낸 여자는 아들이 군대에 간 사이에 미국으로 홀연히 떠나버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따라 미국까지 갔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윤정한은 놀라지 않았다. 면회 한 번을 안 오더니, 남친 만나러 간 거였냐며 중얼거리기나 했다. 윤정한은 그래도 나름 엄마의 인생을 존중했고, 엄마를 사랑할 줄 알았다.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와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저멀리서 비행기 타고 날아온 아들을 묘의 모습으로 맞이하는 것은 정말로 됐다고 넘어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엄마의 행복을 저지했어야만 하는 걸까? 윤정한은 어쩌면 제 형제가 됐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 고민했다. 답이 나올 수 없는 고민투성이였다.
[정한, 당신의 슬픔을 이해해요.]
[그래요. 너무나 공감되고, 안타까운 일이에요. 브라운은 우리의 좋은 친구였는데.]
[카밀라를 만나 브라운은 행복해했어요. 우리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정한, 당신도 그렇겠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영어를 들으며 눈을 껌뻑이다 뒤늦게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대충 자기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었는데 그건 별로 좋은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공감해서 뭐 어쩔 건데. 윤정한은 미국인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가득하던 고민에 피로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윤정한은 물기에 잔뜩 젖었음에도 버석한 눈동자를 한 번 쓸어내고 잠시 실례한다는 말을 어색하게 영어로 내뱉었다. 그들은 기꺼이 윤정한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내어주는 배려를 보였지만, 윤정한이 여태 우산조차 쓰지 않고 흠뻑 젖어있다는 것에 우산을 건네주는 배려는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개인주의. 엄마는 이걸 적응하며 지냈던 걸까.
윤정한은 비척대며 묘 사이를 걷다가 커다란 나무 근처 아래로 목적지를 정했다. 그곳엔 이미 검은 우산을 쓴 남자가 있었다. 그래도 윤정한에게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릴 것 같진 않았다. 윤정한이 옆에 서는 동안 꼼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직감은 정확했다. 하. 윤정한은 나무 아래에 선 뒤에야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커다란 나뭇잎에 빗방울이 그나마 조금 줄어들었다. 그제야 눈가가 뻑뻑해 윤정한은 자신이 여태 울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빗물에 묻혀 느끼지도 못했던 눈물을 젖은 손등으로 벅벅 문질러 닦는 사이에 흐릿한 담배 냄새가 났다. 붉어진 눈가로 돌아보면 검은 우산 아래에서 새빨간 입술에 꽂힌 담배가 빨간 끄트머리에 타들어 갔다. 윤정한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영어를 할 정신도 없었는데 동양인처럼 생긴 남자는 용케 알아듣고 윤정한을 돌아봤다. 윤정한은 남자의 입을 보는 채 힘없이 물었다.
미안한데, 담배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선명한 모국어였다. 윤정한에게는 담배라는 단어조차 영어로 말할 기력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남자는 가만히 윤정한을 보는 듯 하더니 손을 뻗어 윤정한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윤정한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분명 손이 젖었을 터다. 그럼에도 남자는 윤정한의 팔을 잡았던 손을 주머니에 넣어 담뱃갑을 꺼냈다. 한 손으로 능숙히 뚜껑을 젖힌 후 하나를 삐죽 꺼낸 뒤엔 윤정한의 입가에 대줬다. 과한 친절이라기엔 윤정한이 우산을 들어주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라, 윤정한은 얌전히 고개를 움직여 담배 하나를 앞니로 물어 꺼냈다.
남자의 엄지가 입술을 스쳤다. 희미하게 향수가 섞인 담배냄새도 코끝을 스친다. 담뱃갑을 집어넣은 남자가 새하얀 담배를 문 윤정한의 앞으로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담배의 끄트머리가 맞닿고, 윤정한이 입술 새를 메운 채 담배를 빨아당기면 새빨간 불이 옮겨붙었다. 마찬가지로 담배를 빨아당겼을 남자는 건조한 눈가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내리깐 채 깜빡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속눈썹의 위로 윤정한의 시선이 지나갔다. 그쯤에 맞닿았던 담배를 떼어내며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젖으면 불이 안 붙으니까. 나긋한 한국어로 말했다.
"꼭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같다."
홍지수는 윤정한이 생각하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현관에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있던 홍지수를 가만히 보던 윤정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부러 담배 있냐고 물어본 거잖아. 젖은 담배가 타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던 주제에 홍지수는 쫄딱 젖은 모습으로 윤정한에게 담배를 달라고 했다. 홍지수가 긍정의 의미로 웃는 것을 끌어당겼다. 젖은 구두에서 새하얀 발을 빼내고 집에 들어선 홍지수를 욕실의 앞에 데려다 놨다.
"씻고 나와."
"이다음은 섹스하는 거고?"
"네가 혼자 자기 싫다고 울면서 오면."
"너처럼 코까지 훌쩍이면서?"
"귀엽겠네."
코 훌쩍이는 홍지수. 윤정한이 입매를 끌어올려 웃는다면 홍지수는 눈가를 휘어 웃었다. 너도 귀여웠어. 그 말과 함께 홍지수는 젖은 수건을 들고 욕실의 문을 닫았다. 윤정한의 올라갔던 입매는 다시 일직선으로 돌아간다. 머리를 쓸어넘기고 소파로 걸어가 무거운 몸을 뉘었다. 고개를 넘겨 기댄 채 새하얀 천장만 뚫어져라 봤다.
빗속에서 울던 윤정한에게 담배를 내어준 홍지수는 같은 날 친한 친구의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빗물에 섞여 눈물을 쏟아냈던 윤정한과 달리 홍지수는 내내 그린듯한 미소를 지었다. 건조한 눈가 아래 도톰한 애굣살에는 슬픔이 묻어있지 않았다. 그때의 윤정한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담배 한 개비가 타들어 가는 동안 윤정한은 유일한 가족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 중얼거렸고 홍지수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줬다. 홍지수가 친구의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는 것, 윤정한과는 달리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라는 것은 전부 자신의 슬픔을 토로한 뒤에야, 아니 그보다 좀 더 뒤에야 알게 됐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 이름이 조슈아 지수 홍인 것, 윤정한과 나이가 같다는 것도 전부.
윤정한은 브라운 씨의 친족들이 사는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장례를 마친 윤정한은 그 이상한 미국인들의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거기까지 들은 홍지수는 더 이상 담배를 물고 있지 않은 입술로 물었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보다 생판 초면인 내 집이 더 편할 것 같단 뜻이에요? 윤정한은 듬성듬성 피어난 풀잎들을 보는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빗물에 푹 젖은 풀잎은 빗방울 때문에 아래로 축 늘어졌다가 통 튀어 올랐다. 홍지수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머지않아 작게 웃었다. 뭐, 이해 안 되는 건 아니니까. 긍정의 의미였다.
"정한아, 나 수건 하나만 더 줘."
문득 들려온 같은 목소리에 윤정한은 고개를 든다. 세면대 거울 옆으로 밀어봐. 조금 크게 목소리를 내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건의 위치를 알려주면 곧 욕실에서 드르륵, 소리가 났다. 윤정한은 다시 아까의 자세로 돌아가 힘없이 고개를 젖혔다. 그날 윤정한은 홍지수가 사는 2층 주택에 들어갔고, 그날 저녁에는 엄마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훌쩍이다 홍지수를 찾아갔다. 아, 코는 안 훌쩍였던 거 같은데?
"……정한아 나 옷은?"
"아."
윤정한은 욕실 쪽에서 작게 들려온 질문에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늘어져 있느라 홍지수의 옷을 깜빡했다. 잠깐만. 외친 뒤에는 급히 옷장에서 커다란 반팔티와 통이 큰 반바지를 꺼내어 욕실 앞에 대령했다. 네 옷은 줘. 윤정한의 말에 옷을 교환한 홍지수는 뽀송뽀송해진 상태로 문틈에 빼꼼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여름인데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는지 발그스름하게 혈색 도는 얼굴에 모락모락 김도 났다. 고마워. 부드러이 웃는 얼굴에 고개만 까딱이고 홍지수의 옷을 세탁기에 가져다 넣었다.
여름용 정장을 빨아본 적이 없는데. 그냥 세탁기에 돌려도 되나?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찢어지기야 하겠어, 안일한 생각으로 세제를 때려넣었다. 홍지수가 얼마나 잘 사는데. 망가진다고 해도 별 탈은 없을거라 믿었다. 세탁 시간을 맞춘 윤정한은 다시 거실로 돌아와 벽면을 기웃거리고 있는 홍지수를 봤다. 이거 정한이 너야? 하고 물어보는 기다란 손가락은 젊은 시절의 엄마가 안고 있는 아기 윤정한을 향해 있었다.
"응, 귀엽지."
"응, 귀엽다."
홍지수는 으이, 귀여워. 소리를 내며 사진 속 아기 윤정한의 볼을 꼬집듯이 집게손가락을 사진에 대고 흔들었다. 그리고 마저 고개를 움직여 벽면에 있던 몇 없는 사진들을 차근차근 훑어갔다. 윤정한은 방향을 틀어 주방으로 걸어가 머그잔에 따뜻한 물을 정수기에서 뽑아냈다. 홍지수는 단 거 좋아하니까. 찬장을 뒤적여 꿀을 찾아내서는 뜨거운 물에 한가득 짜냈다. 제 기준에서는 너무 달 것 같았지만 홍지수에겐 아닐 것 같아 숟가락을 넣고 휘적거리다 한 숟가락을 더 넣었다.
브라운 씨의 가족이 있는 집보다 아예 남인 홍지수의 집이 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홍지수의 집엔 홍지수 외에 아무도 없었고, 그 누구도 윤정한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거나 참견하지도 않았다. 홍지수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윤정한에게 저녁식사로 파스타를 해준 홍지수는 굿나잇, 인사 한마디와 함께 자기 방으로 쏙 사라졌다. 윤정한은 홍지수가 내준 손님방에서 밤새도록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홍지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홍지수는 자지 않았고, 윤정한을 받아들여줬다. 침대에서 저를 안아줬던 홍지수가 입술을 댈 때까지만 해도 제정신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홍지수를 끌어안고 아래를 흔들고 있었다. 장례 때도 울지 않았던 홍지수의 눈물을 봤다.
결국 둘은 사이좋게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끌어안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른하게 얘기를 나눴다. 누구의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냐는 질문을 먼저 꺼낸 것은 윤정한이었다. 윤정한은 그쯤 피곤함과 나른함 사이에 이상한 용기까지 솟아올라서, 자신이 받은 위로를 홍지수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물론 홍지수의 비밀은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것이었다는 게 윤정한의 판단 미스다.
홍지수는, 그리고 홍지수의 집안은 한 명도 빠짐없이 미국 마피아의 일원이었다. 홍지수의 친한 친구 역시 마피아였고, 그는 FBI와 내통했다. 돈세탁을 하고 무기 거래를 하는 마피아에 속해있으면서 FBI와 연락한다는 것은 명백한 배신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홍지수는 그 사실을 알고 묵인했지만 비밀에 있어 영원한 건 절대로 없었다. 홍지수는 결국 친한 친구를 시체로 만나야만 했다고 했다. 윤정한은 졸리고 지쳐있는 와중에도 이 얘기를 덥석 믿진 않았다. 마피아라는 존재가 현실로 와 닿지 않아서였다. 마피아도 전문직인가, 그딴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이걸 내가 들어도 돼? 라고 겁 비스무리 한 것을 먹었다.
침대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에 비친 윤정한의 어두워진 안색을 본 홍지수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냥 영화 줄거리라고 생각해. 남의 일처럼 말한 그 영화의 당사자는 눈을 감고 윤정한의 품에 코를 묻었다. 홍지수를 끌어안은 윤정한은 습관적으로 홍지수를 다독여 안았다. 홍지수가 농담을 한 건지 아닌 건지 분간하는 사이에 홍지수는 잠들기 직전의 목소리로 물었었다. 정한아.
"뭐해?"
내가 너 주운 걸로 하면 안 돼?
기억 속의 목소리와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홍지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윤정한이 정신을 놓게 만들었다. 어? 아. 윤정한은 숟가락을 빼고 한참이나 저어놓은 따끈한 꿀물을 홍지수에게 내밀었다. 비 맞아서 추울 테니까, 먹어. 홍지수는 군말없이 꿀물을 받아들고 입술을 댔다. 김이 펄펄 솟아나서 바로 마실 수는 없었는지 목울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후르릅, 개미 눈물 만큼 먹어놓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얼굴인 것 같은데 입매가 아래로 휘어져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라는 의미를 담은 특유의 얼굴. 홍지수는 맛있다, 라고 덧붙였다.
"안 달아?"
"달아. 그래서 좋아."
귀여운 거 좋아하고 단 거 좋아하고. 윤정한은 마피아 홍지수의 취향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그러다 근처 식탁에서 의자를 빼주면 홍지수는 눈치 있게 그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윤정한은 자연스레 물었다. 밥은. 두 글자에 홍지수가 웃으며 꿀물을 한 모금 또 머금었다.
"기내식 먹었어."
"그 꼴을 하고?"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쳐다보진 않든? 윤정한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어봐도 어, 딱히? 라는 대답을 한 홍지수는 머그잔을 내려놨다. 너한테서 피 냄새났단 말이야. 윤정한은 뱉을 뻔한 말을 다시 고쳐서 내뱉었다.
"다친 곳은 없어?"
"응, 지금은 없어."
"뭐가 지금은 없어."
"코피 났었는데 그거 때문에 피 냄새난 거야."
홍지수는 윤정한이 하는 말을 철석같이 알아들었다. 한국 온 지 며칠 된 거고, 비행기는 그런 몰골로 탔던 거 아니고. 홍지수가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종알종알 떠들었다. 떠든다는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조곤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윤정한은 가만히 들어줬다. 사실 한국 온 지 며칠 됐다는 것에서 그럼 마지막으로 먹은 밥이 기내식인 거냐고 물을 뻔했는데 잘 참아냈다. 굶은 애한테 대뜸 밥부터 먹이면 위가 놀라려나. 재보는 사이 조금 식은 물을 꼴깍 삼킨 홍지수의 입술이 움직였다. 너 생각나서 왔어. 윤정한은 잠깐 멈칫했다.
"지수야, 그건……."
"아냐. 조르려고 온 거 아냐."
윤정한이 우물쭈물하는 것을 먼저 막은 홍지수는 팔 자처럼 늘어진 눈썹으로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갈 곳이 없어서. 그래서. 말한 뒤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게 엉망이 된 꼴로 말하러 왔을 리가 없잖아.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음성까지 윤정한에겐 전부 다 들렸다. 윤정한은 대답할 말을 고르느라 제 손가락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그 사이 홍지수는 미지근해진 꿀물을 마저 다 비워냈다. 속이 따뜻하니까 좀 낫다. 비가 내려 서늘한 여름소리 사이로 홍지수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윤정한은 드르륵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어디 가?"
"먹을 것 좀 사올게.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아무거나 먹어도 돼."
"빈속에 라면 먹었다가 속 쓰릴까 봐 그래."
매운 것도 못 먹는 애가. 윤정한은 지갑을 챙겨들고 현관으로 가 슬리퍼를 신었다. 현관까지 따라나온 홍지수에게 젖은 우산을 집어든 윤정한은 제 침실 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쉬고 있어. 윤정한의 말에 홍지수는 얌전히 끄덕였다. 원래 누가 내 침대 눕는 거 싫어하는데. 윤정한은 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그리고 홍지수도 윤정한과 같다는 것을, 윤정한은 알았다. 그런 애가 새벽녘에 울면서 찾아온 자신과 침대가 젖도록 그런 짓을 했다는 것도.
옛날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직이 해체되거나 배신자로 낙인 찍힌 마피아를 귀족이나 부잣집에서 경호원으로 데려다 썼다는 사실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입이 무겁고 갈 곳이 없는데다, 실력이 좋아서다. 얘기를 해준 건 며칠 동안 몸을 섞었던 홍지수였다. 윤정한은 그때 홍지수가 자기를 주웠다고 표현하는 것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비록 홍지수도 마피아라는 점이 주워들은 사실과는 조금 달랐지만 홍지수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에 윤정한을 줍는 것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윤정한은 마침 혼자였고, 일이야 가르침 받으면 알아서 잘할 것이었으며 엄마가 없는 앞길도 막막했다. 그래서 홍지수의 제안에 흔들린 것은 사실이지만 윤정한은 생각할 게 많았다. 당장 엄마의 생명 보험처리는 어떻게 할 건데. 윤정한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홍지수는 강요하지 않았다.
"13800원입니다."
"아, 잠시만요. 이것도 계산해 주세요. 이거, 트윅스. 두 개요."
윤정한은 결국 홍지수의 제의를 거절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브라운 씨의 가족과도 적당히 연결고리가 끊어졌을 때, 홍지수는 공항까지 윤정한을 마중 나왔다. 나중에 한국 오면 놀러 와. 윤정한은 제 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홍지수에게 쥐여줬다. 제의를 거절한 이상 홍지수가 상냥히 웃는 얼굴로 거절할 줄 알았는데 홍지수는 그러겠다며 쪽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윤정한을 보고 고개를 떨어뜨려 자신이 쥐고 있는 쪽지를 만지작댔다.
보고 싶을 거야.
홍지수는 친한 친구를 잃었고, 윤정한은 엄마를 잃었다. 둘 다 하나가 결핍된 상황에서 홍지수는 윤정한을 위로하는 대신 친한 친구의 대체품으로 윤정한을 두고 싶었다. 윤정한이 한국행을 정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윤정한을 사적인 감정으로 제 일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사실에 초조해했다. 윤정한이라고 죽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데. 배신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는 건데. 마음을 고쳐먹은 홍지수는 윤정한이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마음 먹을 정도로 기운을 차렸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줬다. 그럼에도 아쉬움과 미련을 쉽게 떨칠 수는 없었다. 윤정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빈 자리는 그만큼 큰 존재였으니까. 여러모로 뒤숭숭한 배웅이었다. 미련 가득한 이별이었다.
"나 왔어."
윤정한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펴지도 않은 우산을 벽에 기대 세웠다. 막상 가지고 나갔더니 그새 비가 그쳐서는 회색 하늘만 진득히 깔려있었다. 덕분에 어두운 밤길에도 여름이라고 활짝 핀 해바라기들을 보며 걸어왔다. 홍지수 해바라기 냄새 좋아하는데. 윤정한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그 홍지수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마주한 침묵에 의아해졌다. 지수야? 비닐봉투를 놓고 닫힌 침실문을 열면 침대 위로 쓰러지듯이 누운 홍지수가 새근새근 소리까지 내며 잠들어있었다. 열 나는 건 아니겠지. 비까지 맞아가며 골목에 쪼그려앉아 있었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홍지수의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없네. 마르다 만 머리를 쓸어넘겨주고 홍지수가 깔고 누운 이불을 어설프게 접어서 덮어줬다. 지친 얼굴로 잠들어있는 홍지수를 내려다봤다.
홍지수의 깨달음과 달리 윤정한이 한국행을 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윤정한은 눈치가 비상할 정도로 빨랐다. 홍지수가 친구의 대체품으로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묘하게 서운했고, 묘하게 기대했다. 그러다 윤정한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홍지수의 빈자리에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 마피아가 된다는 것은 윤정한에게 있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차라리 겁이 났다고 하면 스스로도 납득했을 텐데, 두려움은 별로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이별에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엄마의 흔적을 정리하며 내내 홍지수를 떠올렸다. 홍지수의 옆에 있을 걸 그랬나, 그 생각은 머지않아 홍지수가 나 모르는 새에 다치거나 하면 어떡해? 로 바뀌었다.
"으음……."
계속 쓰다듬는 손길에 홍지수는 결국 부스스 눈을 뜨고 뒤척였다. 그러다 윤정한이 지척에 앉아있단 사실을 알고선 꾸물꾸물 기어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윤정한이 얼굴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거리는 것을 하게 놔뒀다. 홍지수는 같이 사는 짧은 기간동안 내내 이랬다. 윤정한이 어깨에 기대면 놔두고, 몸을 더듬거려도 놔두고, 손가락으로 거미처럼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면 제지하는 듯 하다가도 결국 놔뒀다. 윤정한은 홍지수의 귓가로 손을 옮겨 피어싱 구멍이 가득한 귓바퀴를 만지작댔다. 피어싱 몇 개 어디갔어. 윤정한이 묻는 말에 홍지수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몇 개는 뺐어."
"왜."
"안경 쓰거나 마스크 쓸 때 불편해가지구……."
가라앉은 홍지수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듣기 좋아 윤정한은 계속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시켰다. 홍지수 시력 좋을 텐데. 생각에 잠깐 손이 멈췄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네가 코피 난 거랑 관련있는 거야? 물어보면 홍지수는 잠시간 대답이 없다가 모르겠어, 라고 말했다.
"이제 홍지수 비밀도 만드네, 나한테."
"비밀이 안 생긴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떨어져있던 시간만 자그마치 일 년 반인데. 그렇다고 연락을 한 것도 아니었다. 윤정한은 홍지수의 번호와 주소를 몰랐고, 홍지수는 윤정한의 주소만 갖고 있었다. 쪽지로 찾아온 것도 도박이었다고 홍지수가 덧붙였다. 왜 도박을 했는데. 윤정한의 필터 없는 질문에 홍지수는 다시 조용해졌다.
"말하기 싫어?"
"밥 먹고 말할래."
홍지수의 목소리에서 완전히 졸음이 가셨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지만 끌어안았던 팔이 느슨해졌다. 윤정한은 조물딱거리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밥 먹자. 윤정한은 방을 나서 내려두었던 봉투를 뒤적였다. 편의점에서 사온 간편 죽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는 사이 홍지수가 느릿느릿 와서 식탁에 앉았다. 제 뒤로 시선이 꽂힌다는 걸 알아서 윤정한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넌 궁금한 거 없어?"
"응."
"아닐 텐데."
"맞아."
흐흥. 홍지수가 웃는 소리에 윤정한도 짧게 웃었다. 숟가락을 꺼내 홍지수의 앞에 놓아줄 때 홍지수는 눈을 반짝였다. 아직도 학교 다니고 있어? 물음에 윤정한은 어. 하고 대답했다. 코스모스 졸업까지 이제 곧이었다. 여태 다닌 것이 아까워서 엄마 일을 정리한 뒤에 바로 복학해선 적성에도 안 맞는 광고홍보학과를 꾸역꾸역 인내하며 다니고 있었다. 적성에 맞질 않으니 회사 면접도 보는 족족 다 떨어졌다. 페이스 하나만으로 나름의 호평을 받았는데, 입을 여는 순간 광고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발언들에 전부 다 나가떨어졌다. 라면 면발을 머리에 얹었다는 말에 홍지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데?"
"그치."
제 몫과 홍지수의 것을 각각 앞에 놓아주며 윤정한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치, 나쁘지 않지 않아? 기발한 거잖아. 윤정한의 말에 홍지수는 호응했다. 완전 웃긴데. 후후 죽을 불면서도 생각할 수록 웃긴지 홍지수의 입에서 실실 웃음이 샜다. 그러다 기어이 웃음으로 덜덜 떨던 손이 죽을 잘못 떨어뜨려 앗 뜨거, 따위의 소리를 내질렀다. 홍지수 뭐해. 윤정한이 어이없다는 듯이 행주를 가져와 급하게 무릎 위를 닦아줬다. 반바지를 입은 데다 다리를 꼬느라 말려올라간 탓에 드러난 살결은 빠르게 닦았어도 금세 빨갛게 변했다.
"그게 그렇게 웃겨?"
"누가 면을 머리에 올려, 그것도 면접 보면서."
"지도 내가 시키면 했을 거면서."
윤정한의 궁시렁거림에 홍지수는 부정 않고 웃었다. 안 아파? 묻는 것에 괜찮아.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윤정한은 그걸 빤히 내려다보다가 검지에 침을 묻혀 홍지수의 무릎 위로 문질렀다. 아, 윤정한 뭐해! 이번엔 홍지수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소리쳤다.
"원래 이러면 나아. 한국에선 다 이래."
"이게 어디서 사기를 쳐. 내가 바보야?"
"진짜야. 입술이 미지근해서 효과 좋은데."
윤정한이 입술을 내미는 것에 홍지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비죽 웃었다. 거기에 윤정한은 순순히 항복했다. 알-겠어. 예의 능글거리는 대답을 내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여간 쩨일 나빠. 홍지수의 중얼거림에 윤정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그냥 다."
홍지수가 숟가락을 고쳐잡고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윤정한은 홍지수의 정수리만 쳐다봤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음의 자취가 공기 중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무슨 사이야?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건 홍지수가 윤정한이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 먹기 전, 교회에 갔다와서 한 말이었다. 홍지수의 집에 적응해 소파에 누워있던 윤정한은 눈을 껌뻑였다. 이때쯤 둘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매일 밤마다 한 침대에서 수다를 떨며 잠들다 보니 있는 비밀 없는 비밀까지 죄 까발려서 서로에게 알려줬다. 그 중에 사귀자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어차피 윤정한은 떠날 거였기 때문에. 어차피 홍지수는 윤정한을 잡지 못할 거였기 때문에. 둘은 연인보다 가까우면서 친구보다 먼 사이를 지켰다. 그 선의 존재에 대해 명확히 물은 것은 홍지수였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데? 라는 윤정한의 물음과 아니야, 잘못 말했어. 라고 무르는 홍지수의 목소리는 동시에 맞아떨어졌다. 곧장 자리를 떠나는 홍지수를 붙잡지 않았다. 윤정한은 이 순간에 딱 한 번, 홍지수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자신인지 친구의 대체품인지에 대한 것이 헷갈렸다. 하지만 홍지수에게 윤정한보다 중요한 것은 너무도 많아 보여서, 윤정한은 그것에 대해 굳이 물어 상처를 후벼파는 짓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제 품에 있는 홍지수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작은 십자가 모양이 윤정한의 손가락에 이리저리 문질러졌다. 홍지수는 윤정한의 방해에도 자기 전의 기도를 꿋꿋하게 해냈다. 이거 봐, 나보다 중요한 거 많잖아. 홍지수의 갖은 비밀을 알아서 윤정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랑 섹스하고, 사람도 죽이고, 무기를 거래하질 않나 나쁜 짓은 다 하면서도 식전 기도와 자기 전에 하는 기도는 꼬박꼬박 챙겼다. 윤정한이 귀를 덥석 물어버리자 홍지수가 옆구리를 꼬집었다. 하지 마. 홍지수의 단호한 목소리가 윤정한의 비명에 파묻혔다. 불평을 터뜨리려던 윤정한을 한숨 쉬며 끌어안아줬다. 애도 아니고. 홍지수의 중얼거리는 것을 못들은 체 했다. 그날은 홍지수가 선의 존재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선 그날의 비밀을 말할 거리가 없었다. 뭘 꺼내도 이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지수는 먼저 분위기를, 윤정한의 기분을 풀려고 했다. 말할 비밀은 없었어도 조곤조곤 윤정한이 선잠에 빠져들 때까지 어릴 적 교회에서 읽었던 동화책 이야기를 들려줬다. 윤정한은 눈을 감고 꼬박 다 귀에 담았다.
요약하자면 신과 인간은 사랑을 했고,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지키려다 죽었다는 내용인 것 같았다. 신전에는 인간이 입었던 옷의 색인 보라색 꽃이 피었고……. 윤정한은 잠결에 들린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웅얼거렸다. 그건 다 핑계야. 윤정한의 중얼거림에 홍지수의 목소리가 멈췄다. 인간은 신에게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게 윤정한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서. 윤정한은 홍지수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적대며 제 의견을 고집했다. 전부 다 핑계야. 사랑한다고 했었어야지. 지켜줬어야지. 윤정한은 주어를 모두 뺀 채로 중얼거렸다. 홍지수가 잠들지 않고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밤새도록 그랬다.
"뭐야, 자기 싫다고 울면서 오면 이랬잖아."
"우리 집엔 손님방이 따로 없는 걸 어떡해."
홍지수는 윤정한과 한 침대에 누우며 어이없어했다. 윤정한은 홍지수를 자기 침대에 눕힐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 사는 원룸에 누가 손님방을 만들어놔. 윤정한이 이불을 끌어올려주는 것을 얌전히 덮으며 홍지수가 작게 웃었다. 코 훌쩍이면서 와도 섹스 안 해줄 거였거든? 윤정한이 뾰로통하게 말하는 것에 웃음 소리가 조금 더 짙어졌다. 진짜? 홍지수의 떠보는 질문에 침묵으로 답했다.
"너 원래 하려고 한 얘기나 해. 밥 먹었고 양치도 했잖아."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누워 끌어안은 홍지수에게서는 제 향기가 났다. 윤정한은 눈을 꼭 감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눈을 감은 채였지만 홍지수의 웃음이 사그라들었을 거란 직감이 스쳤다. 아마 맞을 거다. 윤정한은 홍지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니까. 홍지수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아예 표정을 마주하지 않았다. 홍지수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느낌이 났다. 엄마아빠가. 홍지수는 어두컴컴한 허공을 보며 고저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엄마아빠가 FBI에게 쫓기고 있어."
"……."
"계속…… 도망자 신세로 지내게 될 거라고 하셨고. 나는 거기에서 빼주셨어."
"……그런데?"
"근데, 내내 그 일만 했더니 갑자기 자유가 되어버리니까 순식간에 갈 곳이 없어져서."
네 생각이 났어. 홍지수는 조금의 거짓을 섞어 비밀을 말했다. 도망자가 되면서 윤정한 생각이 났던 건 아니다. 윤정한을 공항에서 배웅했을 때부터, 집안이 텅 비어버린 것을 마주했을 때부터, 윤정한이 지냈던 흔적을 제 손으로 치우면서부터 모든 순간에 윤정한 생각이 났다. 너도 나랑 같을까, 정한아. 미국에서 수도 없이 삼켰던 물음이다. 홍지수는 윤정한의 머리 위로 턱을 대고 한숨을 쉬었다. 홍지수의 숨결에 가슴이 오르내리는 사이에서 윤정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코피는 뭔데. 왜 비 맞고 있었어. 희미하게 우울이 묻어났다.
"삼촌이. 나를 데리고, 조직을 재정립하고 싶다고 하셔서."
"재정립?"
"엄마아빠가 부재하시니까, 내가 보스가 되는 거야. 그리고 다시 조직을 키우는 거고……."
난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게 되겠지. 말끝에서 홍지수 역시도 우울이 묻어났다. 윤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홍지수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지수는 이 일이 하기 싫은 거다. 매일 교회에 갔던 이유도 비밀 중에 하나였으니 윤정한은 알았다. 홍지수는 끊임없이 회개했다. 홍지수는 사랑해줄 신도 없는데, 실체도 없는 그 신에게 끊임없이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엄마아빠도 이제 내가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대. 홍지수가 억지로 옅은 웃음을 담아 말했다. 윤정한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래서 한국 도착하자마자 삼촌한테서 도망 다녔어. 너한테 따라붙을까봐 빙빙 돌아서 오느라 좀. 음, 그랬지. 지금은 괜찮아."
"너희 부모님은, 괜찮으셔?"
"응, 부모님은 걱정 안 해. 잘 도망다니실 거야. 미국은 땅도 넓고, 한국처럼 여기저기 CCTV가 있다거나 모든 주의 주민등록본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절대 못 찾을 걸. 윤정한은 어둠 속에서 홍지수가 그나마 부드러이 웃고 있는 표정을 봤다.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윤정한이 습관처럼 얼굴가를 쓰다듬는 것에 홍지수는 눈을 감고 얼굴을 내맡겼다. 그래서, 정한아. 홍지수가 목소리에 옅은 긴장을 담고 윤정한을 불렀다. 윤정한은 목을 울려 응, 대답해줬다.
"보고 싶었어."
보고 싶을 거야. 홍지수의 마지막 인사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윤정한은 가만히 홍지수를 보고 있다가 다시금 눈을 감고 팔을 굽혔다. 홍지수를 가득 끌어안은 채 아까처럼 코를 묻었다. 제 향으로 파묻힌 와중에도 홍지수의 살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오랜만에 들은 홍지수의 비밀에 가슴께가 묵직해졌다. 윤정한은 침묵을 지키다가 문득 정적을 깬다. 나도.
"난 항상 넌 보고 싶더라."
*
며칠 폭우가 쏟아지던 것이 무색하게 이후로는 날이 쨍쨍했다. 무더위에 녹아버릴 것 같은 날씨를 뚫고 윤정한은 얼마 남지 않은 수업을 위해 열심히 학교를 오갔다. 여전히 면접은 떨어졌고, 이제는 기력마저 빼앗겨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홍지수 부럽다. 걔는 지금 내 방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비즈나 꿰고 있을 텐데. 윤정한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마저 까마득하게 느껴져 비즈 팔찌가 주렁주렁 달린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홍지수가 윤정한의 집에서 지낸지 꼬박 2주가 넘었다. 홍지수는 제법 살만한지 그 좁은 집을 열심히 쏘다니며 청소하고 요리까지 해냈다. 식재료는 어디서 샀냐고 물었더니 근처 마트까지 섭렵했단다. 거기다 돈은 또 차고 넘치게 많아서 윤정한이 오히려 얹혀사는 기분이었다. 있으니까 좋아. 홍지수 있으니까 훨씬 좋긴한데, 너무 과해. 체력이 왜 이렇게 뛰어나. 마피아는 원래 다 그런가? 윤정한은 창백하게 질려서 땀에 쩔은 얼굴로 도어락을 열었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났다.
"조슈지야아."
집에서 꿈틀거리는 홍지수를 보고 붙였던 별명을 입에 달고 살았더니 문 열자마자 튀어나왔다. 원래 같으면 왔어? 하고 홍지수가 고개를 내밀어야 할 텐데 집안이 조용해서 윤정한은 의아해졌다. 에어컨도 안켰네. 찌는 열기가 집안에 가득 차 있어 윤정한은 집 내부를 서성였다. 마트 갔나? 홍지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꺼져있다는 기계음만 흘러나왔다. 뭐야. 윤정한은 얼굴을 찡그리고 앉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저녁 시간인데 전화기도 꺼놓고 집에도 없다. 없는 참을성을 끌어모아 홍지수를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홍지수 왜 전화를 안 받아?"
기나긴 여름의 해가 저물 때까지 홍지수는 집에 안 왔다. 윤정한은 이쯤되니 내면에서 온갖 걱정과 한숨이 턱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홍지수가 이 집에 온 날 밤에 했던 얘기가 자꾸 생각났다. 삼촌이 홍지수를 찾으러 다닌다고 했고, 홍지수는 삼촌에게서 도망다니고 있다고 했다. 윤정한은 급하게 창문으로 가서 커튼을 치고 집안의 불을 죄다 꺼버렸다. 홍지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내 근처에 홍지수의 삼촌이 있나? 온갖 생각을 하다가 문득 들린 도어락 소리에 빛처럼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윤정한?"
바깥 복도의 주황 불빛에 내부가 살짝 비쳤다. 뿌리가 조금 자란 윤정한의 금발도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눈이 마주친 홍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정한을 보다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선 집안의 불을 켰다. 윤정한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고 가까이 다가와 볼을 감싸쥐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야, 그건 내가 물을 말이지!"
윤정한은 얼어있다가 홍지수의 물음에 버럭 짜증을 냈다. 사람 간 떨어지게 전화도 안 받고 뭐하는 거야? 윤정한이 드물게 성질을 내자 홍지수는 뒤늦게 제 핸드폰을 꺼내보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배터리가 나간 핸드폰은 완전히 꺼져 전원버튼 조차도 작동하지 않았다. 워낙에 핸드폰을 잘 안 보고 사는 홍지수라 헛웃음도 안 났다.
"미안해. 배터리 나간 줄 몰랐어."
"나 진짜 너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
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기는 윤정한을 보고 홍지수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미안해. 근처에 교회가 있어서 갔다왔어. 홍지수의 입에서 교회가 나오는 순간 윤정한은 툭 손을 떨궜다. 또 교회 가? 윤정한의 말에 홍지수는 멋쩍게 웃었다. 매일 집에 있는데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구경 겸. 거기까지 말한 뒤에는 아 근데, 라는 사족을 붙였다.
"내가 옛날에 말해준 동화책 있잖아. 어릴 때 교회에서 읽었다는 거."
"그게 뭐."
"그거 여기에도 있더라. 한국어로 되어 있어서 신기했어."
홍지수는 별 거 아닌 일로 눈을 빛내며 행복을 표했다. 윤정한에겐 안중에도 없는 얘기라 반응이 무덤덤했다. 아, 그래? 윤정한의 기분이 다운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홍지수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진짜. 대신 윤정한의 목을 끌어안고 가볍게 입술을 맞대었다가 떨어졌다. 거기서 윤정한의 어깨가 조금 누그러졌다. 난 미국에 있을 때 너 걱정 안 시켰어, 알지. 윤정한의 으름장에 홍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정한은 홍지수의 끄덕임을 믿었다.
그리고 윤정한은 생전 누구에게 속아본 적도 없으면서 홍지수에게 속았다. 그것도 자주.
"하……."
홍지수가 또 전화가 꺼진 채로 저녁 늦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교회에 갔다온다는 것을 아니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까지 교회에서 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꼭 바람난 애인 의심하는 사람처럼 있어야 돼? 윤정한의 예민함이 극에 치달았다. 아까는 홍지수를 찾으러 나가려다 신발끈이 제대로 안 묶여서 바닥에다가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지금도 거실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손톱 끝을 잘근거리다 문득 자리에 멈춰섰다. 윤정한은 모든 행동을 정지했다. 홍지수가 왜 자꾸 교회에 갈까.
"꼭 마피아로 활동하고 있을 때처럼."
중얼거린 순간 제 목소리에 놀랐다. 윤정한은 호흡을 삼켰다가 급하게 아무 신발이나 구겨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급하게 여느라 문 앞에 있던 누군가를 칠 뻔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타이밍이 맞아든 홍지수였고, 윤정한은 문을 연 채로 지친 기색의 홍지수와 마주했다. 어디 가? 홍지수의 물음에 멍하니 있다가 손목을 잡아당겨 집안으로 들였다.
"너 어디 갔다 와?"
"나, 교회……."
"교회를 왜 그렇게 자주 가는데."
"나 원래 교회 자주 갔었어. 고등학교 때는 파티도 못 가고 금토일 교회 갔었던 거 말해줬잖아."
"가서 용서해 달라고 빌고?"
윤정한의 물음에 잘 대답하던 홍지수의 입술이 멈췄다.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해. 홍지수가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물었지만 윤정한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홍지수의 눈만 봤다. 홍지수. 윤정한이 부르자 바닥으로 떨어지려던 홍지수의 눈동자가 겨우 다시 시선을 맞췄다.
"왜 내가 널 불신하게 해?"
"아니야. 나 거짓말은 안 했어."
"거짓말은 안 했겠지, 말을 안 한 게 있을 뿐이지."
세상 사람은 다 속여도 윤정한은 못 속였다. 아마 홍지수도 잘 아는 사실일 거고. 홍지수는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축 늘어지는 어깨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싸쥐었다. 삼촌이 날 찾은 것 같아. 불안이 성큼 다가왔음을 직감했던 윤정한은 생각만큼 놀라지 않았다. 그 상태로 홍지수는 마지못해 사실을 털어놨다. 일부러 윤정한에게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가 없었다. 윤정한은 이번에도 자신을 거절할 테니까.
"나는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었고, 그러지 않을 거였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여행을 다니게 될 거고."
"……."
"하고, 너를 지킬 자신도 있는데."
"……."
"……근데 너에게 같이, 가자고 물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말 못 했어.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홍지수의 고개가 잔뜩 우울해져 바닥을 향했다. 넌 나를 거절해야 해.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날 사랑해도 괜찮지만 나는 널 사랑하면 널 위험하게 만들어. 네가 굳이 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홍지수는 두서없이 말을 뱉어냈다.
"홍지수."
"알아, 다 핑계야.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 못 하고 있는 핑계야. 근데 너 위험해지는 것도 사실이고 너는……."
"나는 뭐."
"너도 또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진 않을 거잖아."
"너 지금 네가 내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야?"
윤정한의 물음에 홍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시울과 달리 윤정한의 눈동자가 건조해서 홍지수는 가슴께가 억눌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저며졌다. 윤정한이 제의를 거절했을 때보다도 아팠다. 이게 더 직접적이어서 그랬다. 그럼에도 윤정한은 흔들림이 없다가 길게 눈을 감았다 뜨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알고 있었으면 기회 좀 주면 안 돼? 윤정한이 짜증난다는 듯이 하는 말에 홍지수가 대답을 못했다.
"내가 너 지킬 기회는 좀 주면 안 되냐고. 가능성 있으니까 나 줍겠다는 거 아니었어?"
"……."
"왜 다 너 혼자 생각하고 결정해? 내가 네 친구 대신이라서 그래? 걔는 너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 그냥 놔두든?"
그랬겠지. 걔는 너를 사랑한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혼자 땅을 파게 놔두고 자기는 배신이나 때렸겠지. 윤정한은 거기까지 쏘아붙이려다 홍지수가 앙다문 입술로 울기 직전의 얼굴을 했다는 것을 알고 겨우 말을 멈췄다. 홍지수의 안에서 윤정한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됐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사실은 홍지수가 저를 찾아온 그 순간부터 헷갈릴 수가 없었다. 주소 쪽지 하나만 가지고 도박을 하면서까지 윤정한에게로 도망쳐올 정도로 윤정한 생각만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행동하는 게 화가 나서. 윤정한은 억지로 화를 잠재우려 애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대신, 아니야. 홍지수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져 들렸다.
"대신 같은 거 아냐. 난 그냥……."
"핑계 대지 마, 홍지수. 너 나 사랑해, 안 사랑해?"
겨우 이으려던 말마저 끊어버렸다. 윤정한은 일그러지는 홍지수의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엄마, 나 진짜 엄마 아들 맞네. 엄마랑 똑같은 사랑 하고 있는 것 같아. 어쩌면 그보다 더. 윤정한은 홍지수의 코앞까지 가까워져 홍지수의 손목을 쥐었다. 같은 팔에 매달려있던 같은 팔찌가 형광등에 반짝였다.
"우리 무슨 사이야?"
"……사랑하는, 사이."
"사랑해."
"응……. 사랑해."
"이제 조슈지 네가 나 지켜야 돼."
나도 너 지킬 거야. 윤정한의 말에 홍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은 양방향이다. 그리고 표현해야 하는 거고. 홍지수의 붉은 입술에 쪽 소리나게 입 맞췄다. 우리 서로를 주운 걸로 할까. 윤정한의 제안에 홍지수가 또 끄덕였다. 그제야 윤정한이 입매에 힘을 풀고 부스스 웃었다.
같이 여행 가자. 홍지수는 아래를 향해 있던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려 응, 대답했다. 윤정한 같은 웃음을 지었다. 해바라기가 활짝 핀 지금.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윤정한도 발그스름한 눈가를 휘어 웃었다. 꼭 홍지수 같은 웃음을 지었다.
"신보단 내가 낫지, 지수야."
나는 널 가졌으니까. 홍지수가 쩨일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가 됐으니까. 우리는 서로를 지켜줄 수 있으니까. 그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