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존경하는 사랑에게.
지수씨와의 만남은 내게만 특별했다.
드디어 열린 조슈아 홍의 마지막 개인전. 꽃을 주제로 잡아 그린 그림들은 그를 닮았다. 30점에 가까운 수많은 아름다운 꽃들은 입구에서부터 심어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보이는 해바라기 밭의 그림은 실제론 본 적 없는 곳에 와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왜 조슈아가 내게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슈아가 언젠가 사진으로 보여줬던 자신의 고향 풍경.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고 싶다던 해바라기 밭. 작품명 ‘우리의 미래’
‘우리의 미래’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었다. 나와 내 동생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 조슈아의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이 그림이 왜 마지막을 장식하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오빠, 이 그림 보니까 꽃다발 살 때 해바라기 넣어 달라고 하길 잘한 것 같아. 안 그래?”
“그러게. 우리 아영이가 잘 선택했네.”
“근데 오빠도 잘 골랐어. 제일 예쁜 장미 한 송이. 오빠답다고 생각해.”
*
“나는 그림을 그릴 거야. 내 스승님을 찾았어.”
여느 날과 같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평소보다 약간 늦게 집에 왔지만,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날. 아영이는 그날, 학원이 끝나고 집에 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엄마도 잠깐의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그림을 그리라고 쉽게 말해준 것이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빈손으로 나가 빈손으로 들어오며 항상 툴툴거렸다. 뭐 때문에 그렇게 툴툴거리냐 물어보면, ‘스승님이 너무 안 먹어. 쓰러질 것 같아.’라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그 다음 주에는 이면지만 잔뜩 들고 갔다가 얼굴과 소매에 물감을 묻힌 채 색연필을 들고 왔다. 다양한 미술 도구들로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데 절대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실력이 늘어난 게 보이면 보여준다고 했던 것 같다.
한참 뒤에 그림 한 점을 보여주긴 했는데, 정말 잘 그렸었다. 그때 동생이 그렸던 그림 속에는 나와 지수가 있었다.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지수가 있었고, 그 뒤에 나는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무척이나 행복한 미소를 짓고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아영이는 그림을 배웠고, 나는 점점 다가오는 개강에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공부해야 하는데 등의 생각을 하다 아영이의 학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한 달 동안 미술 공부를 하는데 왜 아영이가 어디에서 배우는지, 스승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지? 왜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에 관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지?
“뭐지? 왜 없지? 이거 괜찮은 건가?”
“없는 게 당연하지. 오빠 푸딩 내가 먹었다.”
“아, 내 푸딩! 너 자꾸 내 푸딩 먹으면 용돈 안 준다?!”
“그걸 믿냐? 이거 내 푸딩이다. 오빠 푸딩은 안전하게 냉장고에 있어. 그리고 오늘 나 데리러 와.”
“어디 가?”
“스승님한테 그림 배우러.”
*
엄마의 차 키를 빌려 동생이 알려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어보니 차로 20분은 가야 하는 곳이 나왔다. 카페를 먼저 들렀다 가기엔 음료가 다 녹을 것 같아 그 근처의 카페로 먼저 향했다. 작업실에 동생과 스승님 두 명만 있다고 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자몽에이드 한 잔을 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작업실 문을 두드리자 낯선 남자가 벌컥 문을 열며 들어오라고 말을 했다.
깨끗하게 염색된 부드러운 갈색의 머리카락. 세팅을 했던 것 같지만, 약간은 부스스해진 머리와 피곤한 듯한 얼굴에 조금 진한 다크서클. 키는 나랑 비슷한 것 같고 나보다 더 말랐나? 너무 안 먹는다는 게 진짜였나 보네.
남자를 빠르게 훑어보는 와중에 조금 멀리서 동생이 머리만 내밀고 나를 확인하더니 우당탕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 오빠 왔구나! 되게 일찍 왔네? 아니, 근데 스승님은 왜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벌컥 문을 열어주고 그래요? 위험하게.”
“너랑 똑같이 생겨서. 그냥 열어줬어.”
“하하하. 안녕하세요. 아영이 오빠 윤정한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온 동생에게 자몽에이드를 건넸다. 작업실은 미술을 한다기에는 깨끗했고, 미술을 하는 만큼 물건들이 어지러이 늘여져 있었다. 캠퍼스 아래 깔린 신문지를 벗어난 곳에는 물감이 전혀 튀지 않아 벽지가 꽤 하얀색을 유지하고 있었고, 한 쪽에 쌓인 미술도구들과 그림들은 전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래도 꽤 넓고 환기도 잘 되는 것 같고 걱정은 안 해도 되나?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자몽에이드를 건네받은 아영이는 음료를 한 모금 빨면서 남는 손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를 챙겼다. 남자에게 다가가 커피를 주면서 나에게 소개해 줬다.
“내 스승님, 조슈아 홍. 한국 이름은 홍지수라고 해. 잘생겼지? 얼굴은 그림 같고 그림은 사진 같은데, 사진을 되게 못 찍는 스승님이야.”
“야, 너는 무슨 설명을, 아니, 됐다.”
보통 사람을 소개할 때 저렇게 소개하나? 잘생기긴 했네. 그래도 내가 더 잘생긴 것 같은데. 오히려 예쁘다? 목소리는 좋다. 그림은 그린 걸 아직 못 봐서 모르겠고, 사진도 못 봤으니 모르지. 홍지수라는 남자는 캔버스 앞 의자에 앉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빨았다. 커피를 삼키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작게 ‘커피…’라고 읊조린 것도 같다. 아영이는 그 모습의 어디가 웃겼는지 소리를 참으며 웃었다.
“윤아영, 웃어?”
“아, 근데 웃긴 걸 어떡해요. 그거 아아죠? 저는 자몽에이드인데!”
“바꿔.”
뭐지? 홍지수는 아영이가 1/3 정도 마신 자몽에이드를 가져가고, 자신이 한 모금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아영이의 손에 쥐여 줬다. 혹시 커피를 싫어하냐고 물어보니 아영이는 아까와는 달리 크게 웃으며 그냥 스승님이 쓴 걸 잘 못 마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영이가 입 댄 빨대로, 그리고 반 정도 마신 건데… 아니 오기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왜 여긴 두 명밖에 없어요? 그리고 나는 학원 다니는 줄 알았는데 개인 스튜디오로 보이고, 괜찮은 곳 맞나요? 여기?”
잠깐의 정적. 내가 실수를 했나? 싶을 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홍지수였다. 문을 열어줬을 때는 피곤해 보이고 무기력해 보였던 사람이 지금은 누구보다 싸늘하고 선명한 눈빛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아영아.”
“네, 네?”
“봤지? 이제 가. 아는 사람 통해서 학원 알아볼 테니까 더는 오지 말고.”
*
오빠 너무해. 작업실에서 쫓겨나듯 나오고 아영이한테 들은 말.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 아영이는 뭔가 몇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뭘 한 건데? 뭘 잘못한 거지? 홍지수와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말해주지도 않고, 그림을 제대로 배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직 학생인 동생이 낯선 남자와 단둘이서 있다는 게! 그리고 왜 남의 동생이 마시던 음료를 함부로 뺏어 가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그러면 다른 행동도 함부로 했을 수도 있으니까 걱정돼서 한 말인데. 아니, 근데 왜 이제 오지 말라고 한 거야? 내 동생한테 화풀이 한 거야? 아영이는 잘못한 거 없는데! 나도 잘못한 거 없고.
“뭐가 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혹시 둘이 사귀나? 그래서 그런 반응이 나온 건가? 생각이 여기까지 도달하자 바로 아영이의 방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영이는 누구와 연락을 하는지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상단에 적힌 이름은 ‘스승님’, 홍지수씨구나.
“아영아, 너 혹시 그놈이랑 사귀어?”
“뭐?”
그게 무슨 개뼈다귀 뜯어먹는 소리야? 아영이의 눈빛만으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떤 게 문제였는지 알아야 하니까 말리지 않고 아영이를 봤다. 몇 초간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던 중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아영이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는데, 아까 작업실에서 한숨을 내쉬던 홍지수와 겹쳐 보였다. 어? 겹쳐 보였다고? 눈을 슬며시 감으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살짝 벌리고 숨을 들이쉬고 입술을 삐쭉 내밀며 숨을 내쉬는 모습이 닮았다. 아영이도 원래 한숨을 저렇게 내쉬었나?
아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꽤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오빠. 난 오빠한테 실망했어. 스승님은 스승님이고, 우리는 그런 관계 아니야. 그리고 빨대는 뭐, 오빠 친구들끼리 돌려먹은 적 없어? 아니다, 그래. 빨대가 좀 심해 보였을 수도 있지, 근데 그렇게 보였다고 해도 바로 앞에서 불쾌하다는 걸 숨기지도 않고 표출하면 어떡해. 아니면 나와서 나한테 물어볼 수도 있던 거였고. 맞지? 근데 왜 그랬어? 오빠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어..? 미안해.”
“나한테만?”
“너도, 지수…씨한테도.”
“내일 스승님한테 사과하러 나랑 같이 가자. 이제 더 오지 말라고 한 거 진심 아닐 거야.”
아영이의 말에, 어쩌면 내가 과하게 반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이어도 충분히 유대감이 생겼을 수도 있고, 첫 만남에 면전에다 그런 말들을 뱉은 건 확실히 내 잘못이 맞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유연하게 넘어갔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아영이는 저녁은 치킨이나 시켜 먹자며, 돈은 센스있게 나보고 내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지금 중간에 끼어서 제일 심란할 아영이인데, 내 기분을 풀어주려 괜히 치킨 얘기를 꺼낸 것 같다. 물론 원인 제공은 내가 맞지만.
“대신 내가 먹고 싶은 거로 시킨다.”
내 방으로 돌아와 대충 평소에 아영이가 자주 먹던 치킨을 결제하고 침대에 누워 있으니 약간 섭섭함이 느껴졌다. 아영이가 언제 저렇게 어른이 됐지? 나는 너무 어린애처럼 행동했는데. 둘이 어떻게 친해졌는지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나? 치킨 먹을 때 물어보면 답을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일단 무얼 어떻게 물어보면 좋을지 생각을 했다.
배달 온 치킨을 먹기 좋게 준비를 해 놓고 아영이를 불렀고, 행복이 가득 찬 목소리로 고맙다고 하며 방에서 나왔다.
“우리 아영이 많이 먹어~. 자, 여기 네가 제일 좋아하는 날개.”
“오, 내 접시에 먼저 올려 주는 거야?”
“응. 그거 먹고 너랑 지수씨 어떻게 만났는지 말해 달라고 하게. 뇌물이야, 이거.”
치킨을 씹고 있어서인지, 내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아영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옆에서 조용히 치킨 한 조각을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아, 퍽퍽살이네. 목이 막혀와 콜라의 뚜껑을 따는 순간. ‘푸슈슉’하는 소리와 함께 콜라가 쏟아졌다. 아! 이거 왜 이래?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순간에도 아영이는 멍하니 치킨을 뜯고 있었다.
먼저 급하게 부엌으로 달려가 콜라와 손을 대충 닦았다. 오늘 되는 일이 없네. 바닥을 닦을 걸레를 찾고 있을 때, 아영이가 휴지로 대충 콜라를 치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치워진 후 아영이가 작게 말을 했다.
“말해 줄게. 일단 기다려봐. 머릿속으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바닥을 대충 정리하고 아영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대체 어떻게, 어디서 만났던 걸까? 왜 이 말을 하는 걸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이고, 낮에 내 말에 왜 그런 반응을 하게 된 걸까? 약간의 긴장을 하고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아영이한테 들은 지수씨와의 첫 만남은 생각보단 충격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중간 뜸을 들이는 부분도 있어서 대부분의 깊은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그래도 놀랐다. 만남이란 게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지수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 숙제는 없으니까 잘 쉬고 와라.”
오늘 무슨 일이지? 하루 종일 너무 운이 좋은 일만 일어나는데? 늦게 일어났지만, 학교 갈 채비가 완벽하게 일찍 끝나 지각하지 않았다. 적당히 준비한 수행평가도 만점을 받았다. 급식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들만 나왔고, 매점에는 나와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사면 그제야 다른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학원가는 승합차에 한두 명 먼저 앉아있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안쪽 자리가 남아있었고 방금 숙제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짐 정리를 끝내고 건물에서 나오는데 어떤 남자와 부딪칠 뻔했다. 남자는 A3 사이즈 정도의 액자처럼 보이는 물건을 하얀 천으로 감싸 테이프로 돌돌 말아 들고 있었다. 남자의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게 떨어지는 듯했지만, 눈을 찌를 듯한 앞머리는 답답해 보였다. 다크서클이 조금 짙었고, 미안하다 사과할 때 얼핏 달콤한 과일 향이 느껴졌다. 어디서 맡아 본 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갖고 있던 향수 중에 비슷한 게 있었는데?
남자는 사과를 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나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와 비슷하게 맞은편에선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출발했다. 어? 오늘 하루 운이 좋았는데 버스를 지나쳐? 그렇다면 이건 저 남자가 나의 다음 운이라는 뜻인가? 위험하진 않겠지?
“저기, 아저씨. 그거 뭐예요?”
한 블록 정도 앞서간 남자는 내 말을 듣고도 그냥 갈 길을 갔다. 왠지 붙잡아야 할 것 같았다. 남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아저씨, 어디 가시는 거예요? 그거 보여주면 안 돼요? 그림? 사진? 궁금하다. 선물 받은 건가? 그래서 이렇게 들고 가는 거예요? 혹시 이름 알려 줄 수 있어요? 아, 저 사탕 남는 거 있는데 하나 드실래요? 이거 과일 종류별로 있는데 좋아하는 향 있어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 향수 뭐 뿌려요? 잠깐 맡았는데 좋아요.”
따라가면서 계속 말을 걷고 있는데 남자가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니 상가에서 일반 쓰레기들을 한데 모아 버려놓는 곳이다. 설마?
“아저씨 진짜 이거 버려요?”
“학생. 계속 따라오면 이거 진짜 버릴 거야. 그리고 이런 아저씨 계속 따라오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 거야. 얼른 돌아가.”
“아저씨, 그 액자 봐도 돼요?”
“하. 그래 보여줄게. 보고 빨리 가. 이거 버리게.”
깔끔하게 포장된 액자의 포장지를 한 겹씩 벗겨내자 그림 한 점이 나왔다. 채 움트지 못한 작은 새싹, 새싹이 심어져있는 작은 화분. 화분이 놓여 있는 창문에는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아 있다. 건물 복도로 보이는 배경엔 사람 한 명 서 있지 않았고, 대신 바닥에 몇 개의 꽃잎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쩌면 새싹은 움트지 못한 게 아니라 꽃잎이 떨어져 나간 꽃일 수도 있다.
미술관에 가면 나는 냄새보다 약간 더 짙은 향이 났다. 유화인가? 2주 전에 친구 따라서 간 미술관에서 비슷한 느낌의 작품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조… 조 뭐였는데?”
아저씨를 힐끗 쳐다보니 휴대폰으로 무얼 하고 있는지 스크롤을 내리다 타자를 치다, 한숨도 내쉬고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눈이 되게 예쁘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 기억났다.
“조슈아 홍. 맞아요?”
*
둘은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그림을 버리려던 지수씨를 붙잡고 그림 좋다고 버리지 말라고 했다. 그림을 배우겠다고, 자기한테 가르치라고 하다가 명함을 받고 작업실에 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아영이가 대충 정리해서 알려준 내용이다.
“중간에 꽤 많은 걸 빼먹은 것 같은데?”
“다 말할 수는 없는걸! 스승님이 싫어하실 수도 있고.”
“그래, 알겠어. 어쩔 수 없지. 아영이 네가 그렇다고 말하는데.”
다 먹은 치킨을 치우고, 아영이가 준 지수씨의 명함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수씨는 아영이가 그림을 버리지 말라고, 자기한테 가르치라고 했다고 바로 승낙했다. 아영이가 그림에 관심은 있어도 배우고 싶다고 말 한 적은 없었는데, 실은 그림을 업으로 삼고 싶었던 건가? 그렇다면 지수씨가 아니어도 됐지 않나? 그림에 대해 뭐라고 말을 했길래 바로 배우기 시작한 걸까. 그것보다 지수씨의 그림은 어떻지?
명함에 적힌 정보를 토대로 인터넷에 조슈아 홍에 대해 검색했다. 처음에 홍지수라고 검색했다가 이상한 정보들만 봐서 당황했지만, 제대로 검색을 해보니 대단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젊지만 늦은 스물 중반의 나이에 나타난 미술 신예. 주로 유화를 사용하고 그리는 피사체들은 꽤 다양하다. 전시회에 출품하는 그림 중에 사람은 단 한 점도 없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지수씨의 그림은 꽤 독특하고 매력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아영이가 액자 속 그림을 보고 조슈아 홍임을 바로 알아본 이유를.
“아영아, 내일 언제 나갈까.”
*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꿈이었다. 엄마가 이젠 일어나라며 나를 깨웠고, 시간은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부시시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으며 씻으러 들어갔다가 나오니 엄마와 아영이는 이미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정한아, 오늘 아영이랑 선생님 보러 같이 간다며? 용돈 줄 테니까 밥 한 끼 사드리고 와.”
엄마한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했나? 싶어서 아영이를 봤지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갈 준비를 끝내니 대충 11시가 됐다. 아영이도 준비를 다 끝냈는지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엄마 옆에서 휴대폰을 하고 있다. 방에서 나온 나를 슬쩍 보더니 ‘이제 가자!’라며 다가온다.
차에 탄 아영이는 꽤 신나 보였고, 나는 약간 긴장을 했다.
“오빠, 사과하고 밥을 같이 먹으면 스승님 밥 얹혀서 죽을 거야. 그냥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거 사서 가자. 음료수랑! 어때?”
“좋네. 그렇게 하자.”
어제와 비슷하게 작업실 근처의 빵가게에 들러 간단한 샌드위치 두 개와 오렌지 주스를 샀다. 괜찮으려나 싶어 아영이를 보면 괜찮다는 표정으로 이 빵 저 빵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해 멀쩡하구나 싶었다.
건물 입구에 도착해 아영이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내심 비밀번호가 바뀌었을 줄 알았는데 안 바뀌어 있네. 안쪽의 문 하나를 더 열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시체…? 인가 싶었지만, 부스럭거리며 일어나는 지수씨였다.
“뭐야…”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로 눈을 비비며 일어난 지수씨는, 우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왔냐는 질문에 사과하러 왔다고 했다.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가 담긴 봉투를 건네고 입을 열었다.
“아영이가 지수씨 밥을 잘 안 드신대서, 샌드위치랑 주스 사 왔어요. 그리고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첫 만남에 함부로 말한 것 같네요.”
“아영이 오빠분 이름이 윤정한 맞죠? 이건… 받을게요.”
“그동안 전시회에 올라갔던 사진들 몇 점 봤어요. 아영이가 스승님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헐. 오빠, 언제 찾아봤어?”
“그래요? 별로 좋지도 않은 그림을 보게 해서 죄송하네요.”
어제 내가 찾아본 지수씨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지수씨도 예뻤는데. 꽤 의외인 점은, 대부분의 배경이 어두운 톤을 하고 있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피사체들은 제대로 밝게 그려 넣은 걸 보면 피사체를 돋보이게 하려고 그랬나? 싶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힘들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가끔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의 그림도 있었다. 뭐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뭐라고… 하진 못 하겠지만, 특유의 느낌들이 좋았다. 그리고 홍지수라는 사람에 대해도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