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is work captures the dramatic moment when Daphne turns into a laurel…”
이 작품은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하는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작품으로…
"..."
"The laurel crown Apollo always uses is made of daphne branches."
아폴론이 항상 쓰고 있는 월계수 관은 다프네의 가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도슨트가 영어로 베르니니의 조각상에 대해 소개했다. 외국인 가족 여섯 명과 커플 두 명 사이에서 설명을 듣던 정한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기껏 돈 주고 예약한 도슨트 투어였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한은 몇 분 동안 혼자서 더 둘러보다가 금세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기분. 속이 텅 빈 공허함에 지겨워진 정한은 머리에 지식이라도 채워 넣고자 미술관을 찾아왔는데도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조각상은 아름답긴 했다. 대리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정교함과 세심함에 아주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더이상 흥미도, 호기심도 없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에 노잼 시기가 찾아온다고 하는데, 정한은 본인에게 너무 일찍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다. 가족들과 밥을 먹으면 체할 것 같았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각자의 고민만 털어놓으니 당연히 재미가 없었고, 혼자 방에서 창밖의 달을 보고 있을 때면 우울감이 맥시멈으로 차올랐다.
그래서 정한은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원래 착실하게 다니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얽매는 모든 것을 끊어내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몇 달 동안은 쳐다도 안 볼 학교에서 나온 정한은 그날 밤, 그동안 알바와 과외를 병행하며 모아둔 돈을 싹싹 긁어모아 이탈리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왕복으로 더 싸게 나온 표가 있었지만 편도로 끊었다. 언제 돌아올지 정해두지 말자.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할 때, 그때 돌아오자. 정한은 다짐했다. 부모님께는 예의상 몇 달간 여행을 다녀오겠다, 정도로만 설명했다. 어차피 별로 신경도 안 쓸 것이 틀림없었다. 부모님은 정한의 예상대로 반응했다. 덕분에 정한은 혼자 인천 공항에서 이탈리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 번의 경유를 포함한 17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깜깜한 창밖으로 마침내 반짝거리는 도시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정한은 무심히 빌었다. 이 곳에서 꼭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비행기가 서서히 땅으로 내려앉을 때까지도 정한은 알지 못했다. 도망치듯 떠난 그곳에서 무엇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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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게세 미술관 밖으로 나와 걸은 지 몇 분이 됐을까, 정한은 어느새 한적한 공원을 걷고 있었다. 로마에 온 지도 벌써 3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유럽은 처음인 만큼 새로운 것들도 많았지만 왜인지 정한에게는 다 그저 그랬다. 그래도 사람 많은 미술관보다는 공원이 더 낫네. 정한은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와 가끔 지저귀는 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산책로를 쭉 따라 걸었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질 때 쯤, 눈에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손목에 찬 메탈 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저녁 때가 되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허기진 것 같기도. 주변에 간단하게 식사 할 만한 곳이 있을까, 정한은 핸드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했다.
"햄버거는 지금 먹으면 부대낄 거 같고... 지중해식?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주변에 있는 맛집을 검색하며 중얼거리던 정한은 제 발을 건드린 공에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에서 네살 배기 정도의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정한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의 뒤로는 정한의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가 따라 뛰어왔다. 둘 뒤로 조금씩 분홍색으로 노을 지는 하늘이 정한이 보기에도 예쁜 그림이었다. 아이는 정한의 발 옆에 떨어진 공을 줍고서는 뒤를 돌아 다시 달려갔다. 아이를 뒤따라오던 남자가 정한에게 와 영어로 사과를 해왔다. 얼굴을 보아하니 한국인 같은데.
"혹시 한국인이세요?"
"아, 한국분이시구나... 아뇨,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아..."
정한은 냅다 남자에게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영어 대신 한국어로 답변해오는 정한에 살짝 당황했던 남자는 금세 언어를 바꾸어 답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 신기하네. 남자는 애가 신나서 놀다 보니 실례를 끼치게 됐다며 연신 사과했다. 정한은 별일 아니니 사과할 필요 없다고 한 후 남자를 돌려보냈다. 남자가 돌아가자, 정한은 다시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밥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뭐가 잘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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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은 오늘도 밥 대신 알코올을 택했다. 발갛게 노을 지던 하늘이 어느새 어둑어둑하게 짙은 남색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쯤, 정한은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 있는 바로 향했다. 이 곳에 온 후로 3주 동안 벌써 여섯 번째 방문이니 이 정도면 거의 단골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은은하게 불이 들어오는 네온사인 간판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눈길조차 둔 적 없는 칵테일 바였지만 해외에 온 만큼 평소에 안 해봤던 짓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한 번 갔었는데 바의 분위기도 괜찮고 무엇보다 술이 맛있어서 발길을 끊을 수 없었다. 네온사인 간판을 지나 계단을 내려온 정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번역기를 켜 바텐더에게 주문을 했다. 예전에 후배가 맛있다고 했던 피치크러쉬. 도수가 낮아 정한이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아까 공원에서 봤던 분홍빛의 노을이 떠올라 한 번쯤 경험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몇 분이 지나자 정한이 주문한 칵테일이 나왔다. 정한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노을과 닮은 빛깔이었다. 한 모금 들이키니 새큼하고도 달달한 향이 입을 화악 감돌았다. 그리고 아까 봤던 그 남자의 햇살 같던 미소가 떠올랐다.
"미쳤지 내가. 그 사람을 갑자기 왜..."
모르겠다. 왜 그 남자가 생각 났는지는. 정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남은 칵테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칵테일은 양이 적은 게 아쉽다니까... 정한은 직원에게 서툰 이탈리아어로 메뉴판을 달라고 부탁했다. 영어랑 비슷한 발음이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메뉴판을 받은 정한은 핸드폰으로 번역기를 켜 사진을 찍고 한 글자 한 글자 번역하기 시작했다. 간혹 영어로 된 이름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이탈리아어로 된 메뉴 이름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몇 번이나 이 바에 왔지만 늘 처음 오는 기분이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미국으로 갈 걸. 그나마 영어는 좀 할 줄 아는데.
정한이 오늘도 힘겹게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뭐 골랐어요?"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모국어에 고개를 돌린 정한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아까 그 남자다. 그러면 안되는 거지만 잠시 생각했었던 얼굴이 제 눈앞에 있으니 정한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물음표들로 가득 찼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나 지금 취해서 헛것 보나? 고작 한 잔에? 아님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의아해하는 정한을 옆에 두고 남자는 단아하게 포장된 꽃다발을 테이블에 놓고 앉았다. 정한은 제 머릿속을 더 물음표로 채우지 않기 위해 남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그보다... 이런 데 오시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
"왜요?"
"애도 있으신데..."
"아."
남자는 정한의 질문에 아차,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웃으며 답했다. 아까 그 애, 제 사촌 형의 아이예요. 조카. 아... 그제야 정한은 왠지 모르게 한시름 놓였다. 정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시구나...
"근데 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당연히 모르고 왔죠. 자리 찾는 데 아까 본 얼굴이 있어서 그냥 아는 척 해봤어요."
"아, 그쵸. 당연... 하지."
멋쩍어진 정한은 뒷머리를 헝클었다. 애초에 자기가 하고도 웃긴 질문이었다.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니. 혹시 질문에 기분이 나빴을까 봐 남자의 표정을 슬쩍 봤지만 별로 크게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남자는 정한에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정한이요. 윤정한. 그 쪽은요?"
"조슈아 지수 홍입니다."
남자는 제 이름을 알려주며 젠틀하게 악수를 청해왔다. 정한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조슈아. 지수. 홍. 참 예쁜 글자만 모아서 만든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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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계속해서 번역기를 켜고 있던 정한에게 본인이 추천해주겠다며 코스모폴리탄을 두 잔 시켰다. 칵테일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오고 나서도 둘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정한은 지수와 동갑임을 알고 쿨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정한은 어쩌다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는지 지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수는 가만히 들으며 정한의 말에 이따금 반응했다. 정한의 얘기가 끝나고 들어보니, 지수는 몇 달 동안 공부하면서 친척 집에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아까 언급됐던 그 사촌 형의 집에 머물면서 꽃집 일을 돕기도 한다고 했다. 사촌 형이 동네에서 꽤 큰 꽃집을 운영하신다고. 정한은 시간 날 때 꽃집에 들르기로 약속했다. 먼 타지에서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한국 친구들이랑은 항상 학점이다, 취업 준비다, 공무원 시험이다, 서로 힘든 얘기만 하느라 만나고 나면 진이 다 빠졌었는데 지수와는 부정적인 쪽으로는 대화가 넘어가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한참을 지수와 얘기하던 정한은 시계를 슬쩍 봤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된 걸까. 벌써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정한은 지수에게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마셔야 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정한의 말을 들은 지수는 자기도 가봐야 한다며 같이 일어났다. 가게 밖으로 나온 정한은 술을 깨기 위해 밤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그러다 지수가 가져왔던 꽃다발이 눈에 띄었다.
"근데 저 꽃은 뭐야? 누구 주려고?"
"아, 이거? 나한테 주는 꽃."
"본인한테?"
"응. 매주 수요일마다 꽃집에서 퇴근할 때 데이지 포장해서 나오거든. 내가 데이지를 좋아해서."
평소 꽃에 관심이라곤 없던 정한이라 매주 꽃을 포장해간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도 남한테 선물하기 위함이 아니라 본인한테 주는 거라니. 정한과는 거리가 먼 낭만이었다.
"꽃 좋아해? 좋아하면 몇 송이 줄까?"
"어? 어... 그럼 한 송이만..."
해맑게 꽃다발을 들이미는 지수에, 정한은 얼떨결에 데이지 한 송이를 받아들었다. 데이지를 한 송이만 가져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지수는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꽃 머리는 큰데 줄기가 얇아 잘못했다가는 꺾일 것만 같았다. 지수는 한 송이만 가져가면 꽃이 외로울 거라며 한 송이를 더 챙겨주었다. 정한은 바에서 게스트 하우스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곧이어 카톡 아이디를 주고받은 둘은 각자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한 정한은 먼저 잠자리에 든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2층에 위치한 제 방으로 가기 위해 정한은 까치발을 들고 조심히 계단을 올랐다. 방에 들어온 정한은 씻는 것도 뒤로 하고 방에 있던 투명한 유리병을 들고 조용히 화장실로 향했다. 곧이어 수도꼭지에서 물이 소리 없이 흘러나왔고, 유리병의 3분의 2 정도를 채웠다. 방에 다시 온 정한은 지수가 준 데이지 두 송이를 유리병에 꽂았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대충 병에 물 넣고 꽃을 꽂는 제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에 정한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정한은 데이지가 담긴 유리병을 책상 위 창문틀에 고이 올려두었다. 달빛이 꽃잎에 그대로 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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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정한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간다. 지수의 추천이었다. 덕분에 이탈리아에 와서 9시부터 12시 사이에 무작위로 일어나 오전을 대충 보내던 버릇을 고쳤다. 정한은 게스트 하우스를 중심으로 동네를 크게 20분 정도 걸었다. 때로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이어폰 한 쪽을 꼽고 걷기도 했고, 때로는 아무런 짐 없이 자유롭게 걷기도 했다. 중간에 작은 마트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가기도 했고, 부슬부슬 비가 내릴 땐 길거리에 파는 신문을 사서 비를 가리기도 했다. 우연히 지수가 산책하는 시간과 겹치는 날에는 지수와 보이스톡을 하며 걸었다. 지수의 산책 코스는 정한의 것보다 조금 더 길어서 지수와 통화하는 날에는 정한도 그만큼 더 걸었다.
좋았다. 친구가 생겨서. 어쩌면 정한에게는 그보다 더한 의미일지라도. 자신과는 다르게 따스히 웃는 지수가 보기 좋았고, 늘 긍정적인 지수가 신기했고, 제 말에 항상 진심으로 답해주는 지수가 고마웠다. 정한은 그런 지수가 보고 싶었다. 지수를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길로 정한은 지수에게 전에 받아뒀던 꽃집의 주소를 지도 어플에 검색했다. 그리 멀진 않았지만 걸어가기엔 오래 걸릴 것 같아 정한은 큰길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를 타고 가니 10분 정도 걸렸다. 걸어왔었으면 이보다 훨씬 더 걸렸겠지? 정한은 돈 쓴 걸 후회하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던 정한은 지수가 일하는 꽃집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3층짜리 상가의 1층 전체를 쓰고 있는 큰 꽃집이었다. 가게로 가까이 가니 통창 너머로 앞치마를 메고 꽃을 포장하고 있는 지수가 보였다. 손님이 포장 끝난 꽃다발을 받고 가게를 나오자, 나가는 손님을 보던 지수도 정한을 발견했다. 지수는 정한을 보자마자 놀라더니 금세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똑같이 손을 흔든 정한은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떻게 말도 없이 왔어?"
"그냥, 서프라이즈로?"
"서프라이즈 성공했네."
지수는 막 웃었다. 지수는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니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라며 등받이 없는 의자를 정한에게 밀어주었다. 그간 카톡이나 보이스톡으로만 연락해서 정한은 얼른 지수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 사이에 또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정한은 잠자코 의자에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Che tipo di fiori vuoi?"
정한은 이탈리아어로 능숙하게 손님을 응대하는 지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할 정도로 뚫어져라 본 탓에, 지수는 손님이 꽃을 고르는 동안 뒤를 돌아 정한을 못 말린다는 눈빛으로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한은 아무렴 좋았다.
그 후로 4명의 손님이 더 왔다 갔고, 점심시간 전 마지막 손님이 고른 튤립을 예쁘게 포장한 지수는 손님이 가게를 나가자마자 가게 문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팻말을 달았다. 정한은 앉아만 있는 게 지쳐 뒷짐을 지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가게 안의 꽃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정한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어? 끝났어?"
"응, 이제 점심시간. 우리 집 가서 먹을래? 오늘 사촌 형네 가족 놀러 가서 집 비는데."
정한은 당연하게도 흔쾌히 지수를 따라 가게를 나왔다.
지수가 지내는 곳은 꽃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내던 그간의 안부를 채 다 묻기도 전에 지수의 사촌 형네 집에 도착했다. 딱 네다섯명이 지내기에 적당하고 현지 느낌이 물씬 나는 따뜻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정한은 아무도 없을 빈 집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살짝 긴장한 채로 집에 들어섰다. 지수의 두 번째 공간에 발을 들였다.
지수는 정한에게 프로슈토와 루꼴라를 얹은 피자를 해주었다. 정한은 지수의 피자가 이탈리아에 온 지 며칠 안 됐을 때 식당에 가서 먹은 것보다 맛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피자에는 맥준데. 정한이 중얼거리자 지수는 집에 맥주가 다 떨어졌다며 대신 전에 마셨던 칵테일은 어떠냐고 물었다.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고, 능숙한 솜씨로 코스모폴리탄 한 잔과 피치크러쉬 한 잔을 제조하는 지수를 그저 바라봤다. 정한과 지수는 유리잔을 소리 나게 부딪히며 살루떼라고 말했다. 이탈리아어로 '건배'라는 뜻이랜다. 정한은 분홍빛 칵테일을 마시며 지수에게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우리 계속 연락했잖아."
"그래도."
"음... 난 똑같이 꽃집에서 일하면서 지냈어. 지난 주말에는 바닷가에도 갔다 왔고. 넌?"
"난..."
정한은 망설이지 않았다.
"너 보고 싶어 하면서 지냈어."
두 개의 눈동자가 꼿꼿한 정한을 쳐다본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피자를 씹던 턱은 멈춰 움직일 줄을 몰랐고 지수는 숨을 쉬는 것 또한 까먹은 듯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피자를 씹기 시작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않은 탓이었는지, 아님 뭐였는지. 지수의 얼굴은 정확히 몇 분 전보단 붉어져 있었다. 정한은 그런 지수를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지수가 입을 열 때까지.
"ㄴㅏㄷ..."
"어?"
"나도... 보고 싶었다고."
지수의 입술이 떨어지며 작은 소리의 단어들이 튀어나와 문장을 만들어냈다. 지수의 문장이 정한의 가슴에 날아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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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정한은 자주 지수네 동네에 놀러 갔다. 지수가 꽃집에서 일하니 꽃을 사다 주긴 좀 그래서 정한은 데이지가 그려진 컵을 사 간다던가, 포장지에 데이지가 있는 빵을 사 갔다. 지수는 그럴 때마다 정한에게 누가 보면 자기가 데이지에 환장한 사람인 줄 알겠다며 웃었지만 지수는 정한이 그런 선물을 해올 때마다 기뻐서 웃는 걸 잊지 않았다. 정한은 꽃집에 손님이 많을 땐 일손을 거들기도 했고, 지수의 사촌 형네 가족들이랑 가끔 식사도 같이 했다. 밝은 기운은 집안 유전인 걸까. 지수의 사촌 형네 가족들도 늘 해맑고 긍정적이며, 따듯했다. 나도 이런 집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정한은 가끔 생각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우울하지도 않았을 거고 인생의 슬럼프를 겪게 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그랬다면 정한이 이탈리아에 올 일은 없었다. 정한은 이탈리아에서 지수를 만난 것에 충분히 감사했다. 그래서 이미 지나버린 일들에 대해선 일절 생각 않기로 했다. 지수와 함께 하는 지금이 소중하고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됐으니까.
정한은 지수로 인해 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온 지 한 달 반이 훌쩍 넘었고 거의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수를 만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지수의 해맑음, 밝음, 따스함, 다정함이 정한을 늘 감싸 안았다. 정한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지수를 만날 때면 저기 구석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정한은 그것들에 대해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오늘같이 지수가 꽃집에 일을 나가지 않는 날에는 정한은 지수의 공간에서 둘만의 시간을 피웠다. 소파에 꼭 붙어 앉아 같이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곤 했다. 정한은 지수에게 칵테일을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한 번은 정한이 제대로 안 닫힌 채로 셰이커를 흔들다가 칵테일이 온데 간데 다 뿌려지는 바람에 둘 다 꼴딱 젖은 적도 있었다. 그 날은 정한이 지수에게 처음으로 맞은 날이었다. 제 등짝을 때리는 커다란 손이 얼마나 맵던지.
지수는 가끔 거실 통창 옆에 있는 흰색 테이블에서 비즈로 팔찌를 만들었다. 정한은 지수를 마주 보고 앉아 지수의 조카가 만들다 만 레고를 조립했다. 오늘도 둘은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레고에 흥미가 들린 정한은 아예 마트에서 레고를 직접 사 와서 조립했다. 중간 사이즈의 스포츠카 모양이었다. 지수는 정한의 반대 편에서 작은 코끼리를 중앙에 넣은 팔찌를 만들었다. 큼지막한 손으로 꼬물대더니 금세 완성한 듯했다.
"짠~ 어때 정한아?"
"뭐야, 나 주는 거야?"
"응. 내꺼랑 똑같은 거야. 예쁘지."
"어. 예쁘다."
정한의 대답을 들은 지수는 웃으며 레고를 집고 있던 정한의 왼쪽 손을 당겨 제 앞으로 가져가더니 손목에 팔찌를 끼워주었다. 그제야 지수의 왼쪽 손목에 있던 같은 모양에 색깔만 다른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지수는 제 손목과 정한의 손목을 맞대고 팔찌를 구경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통창으로 햇살이 들어와 지수와 팔찌를 예쁘게 비춘다.
"키스해도 돼?"
정한은 용기 낼 것도 없었다.
지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곧이어 고개를 끄덕인다.
정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허리를 숙여 지수에게 다가간다. 슬며시 맞닿는 입술 틈을 비집고 또다시 정한이 지수의 공간을 파고든다.
정한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검은 세상 위로 지수의 새하얀 꽃잎이 자리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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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바람에 헐겁게 닫혀있던 창문이 쉽게 열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쌀쌀한 바람에 정한은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가을인가보다. 정한은 중얼거렸다. 학교 다닐 땐 시간이 그렇게 안 가더니, 이곳에선 시간의 유속이 체감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간다.
정한이 이탈리아에 온 지도 벌써 석 달이 되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아닐까. 애초에 날짜를 정해두고 온 게 아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었다. 사실 마음에 여유는 진작에 생겼고 세상이 아름답고 보인 지도 한참 되었다. 그냥 떠나기 싫었던 거지. 언제는 그냥 여기에서 지수랑 같이 꽃집 일을 하면서 평생 눌러 앉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정한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졸업해야 할 학교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휴학이 아니라 자퇴를 했어야 하는 건데.
어쨌거나 이 곳에서 평생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모아둔 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졸업도 해야 하니까. 정한은 어쩔 수 없이 노트북을 열어 항공사를 검색했다. 마음 같아선 학교고 가족이고 다 때려치우고 이 곳에 머물거나 몰래 지수를 데리고 한국으로 같이 가고 싶었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지수도 이곳에서 공부할 게 남아있었다. 공부가 다 끝나면 한국으로 갈 지 미국으로 갈 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지수는 미국인이니 미국으로 돌아갈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런데 땡깡을 피워 한국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정한은 내내 한숨만 쉬며 제일 저렴한 항공편을 잡았다. 그래도, 일단은 돌아가야지.
이탈리아발 한국행 비행기 표에 찍힌 날짜는 사흘 뒤였다.
정한은 조금씩 짐을 정리했다. 가져왔던 옷들을 차례대로 개어서 캐리어에 넣었고 이 곳에서 산 영문 책과 잡동사니들을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싹 다 정리하니 책꽂이 가장 안쪽에 세워져 있는 두꺼운 사전이 보였다. 정한의 것이 아닌 예전부터 있던 사전이었다. 정한은 사전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쳤다. 종이를 넘기는 정한의 손가락이 책의 중앙 쯤에 다다르자, 바싹 마른 데이지 두 송이가 스르륵 책상 위로 떨어졌다. 지수에게 처음 받아 왔을 때보다 생기도 없었고 크기도 훨씬 줄었지만 그마저도 아름다웠다. 이래서 지수가 데이지를 좋아하나. 정한은 두 송이 중 한 송이만 정한의 책 사이에 넣었다. 나머지 하나는 다시 두꺼운 사전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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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벌써 1년하고도 6개월 전의 얘기다. 정한은 복학 후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가족들과의 관계는 조금씩 좋아졌고, 이제는 친구들과 만나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하는 걸 잊지 않았고, 길을 가다가 꽃집을 보거나 데이지를 발견하면 잠시 추억에 빠지곤 했다. 정한은 서울의 한 칵테일 바에 취직해 어느덧 4개월 차 바텐더로 일하는 중이다. 한국에 와서도 이탈리아에서 지수가 만들어줬던 피치크러쉬의 잔향이 입안에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정한은 관심도 없었던 칵테일을 이젠 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시간들이 정한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탈리아에서 지수와 보냈던 시간들이.
지수와의 이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뇌가 마음대로 기억을 지운걸까, 고작 일 년 반 전의 일인데 떠올리려 해도 잘 그려지질 않았다. 그냥 대충 기억나는 거라곤 딱 하나다. 공항에 가기 전 꽃집에 들러 본 지수의 마지막 미소. 혹시라도 지수가 울면 어쩌나, 그럼 당장에라도 비행기 표를 찢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했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지수는 그저 웃으며 정한을 보냈다. 그래서 정한도 울지 않았다.
정한은 한국에 와서도 지수와 연락이 잘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정한은 바빴고, 지수도 바빴다. 정한은 졸업하고 취직하느라 바빴고, 지수는 여전히 공부하고 일을 하느라 바빴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오갔던 카톡 답장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몇 개월이 되었다. 정한은 1이 사라지지 않는 대화창을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가끔 메일도 보냈지만 답이 느린 건 매한가지였다. 솔직히, 지수가 그립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아침 산책을 나갈 때마다. 손을 씻을 때 제 왼쪽 손목에 있는 작은 코끼리가 보일 때마다. 꽃집이 보일 때마다. 피자를 먹을 때마다. 칵테일을 만들 때마다. 정한은 은연중에 지수를 떠올렸다.
"형, 그러다 도마까지 썰겠어요."
"..어?"
정말 가끔은 하루 온종일 머릿속으로 지수만 그린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칵테일에 장식으로 올라갈 레몬을 썰다가 도마까지 아작을 낼 뻔했다.
정한은 지수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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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프라서 출근하지 않는 날이다. 벌써 봄이라고 창밖에는 꽃들이 하나둘씩 피어나고 있었다. 정한은 선선한 바람과 꽃내음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고 식탁에 앉아 턱을 괴고 노트북을 켰다.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오늘 뉴스를 확인하고, 날씨도 확인했다. 그때 띠링- 하고 울리는 알림에 화면 하단을 보니 메일 하나가 도착해있었다. 정한은 무심히 메일창을 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띠리리링- 하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정한은 곡소리를 내며 일어나 침대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을 집고서는 전화를 받으며 그대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여보세요..."
"형, 저 진~짜 미안한데 오늘 한 번만 대타 서주면 안 돼요?"
"민규야, 나 오늘 한 달 만에 오프야."
"아는데... 진짜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한 번만, 형..."
정한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앙탈 부리는 민규의 말을 뒤로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뭔 일인데 그래?"
"뭔지는 말 못하는데..."
"그래? 그럼 대타 얘긴 없던 걸로 해야겠다~"
"아, 형!"
정한은 웃으며 마우스를 흔들어 꺼진 화면을 다시 깨웠다. 그 사이에 민규는 제 사정을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정한은 메일함에 들어가 방금 전에 온 메일을 확인했다.
[dall'Italia]
흔한 광고 메일도 아니었고, 정한의 주변엔 이런 제목의 메일을 보낼만한 사람이 없었다. 분명 알파벳으로 쓰여 있지만 이탈리아 앞에 붙은 건 대체 뭔 뜻이며... 정한은 흠칫했다. 이탈리아? 정한은 왼손으로 핸드폰을 계속 귀에 갖다 댄 채로 눈으로는 재빨리 화면을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에 들어온 메일 주소.
joshuajisoohong1230@xxxxx.com
정한은 눈이 땡그래져선 메일을 쭈욱 읽어나갔다. 핸드폰에서 누가 떠들든 말든 정한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메일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은 정한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민규야, 나... 오늘 니 대타 못 서줄 거 같다."
"예? 아니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그 애가 와서... 내가 지금 가봐야 돼."
"그 애요? 누구?"
"있어."
나의 데이지. 나의 이탈리아. 나의 피치크러쉬.
메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 정한의 눈빛이 사뭇 반짝거렸다. 정한의 방 창문 아래에서는 작은 데이지가 온화한 햇살을 잔뜩 머금고 개화하고 있었다.
초반에 썼던 글을 한번 엎느라 기한 내에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었는데 무사히 참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제에 따른 제 의도가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잘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합작에 참여하신 다른 분들도 한 달 동안 너무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니해, 홍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