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어먹을 사랑해
w.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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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고생한다. 문장을 읽고 한국에선 별걸 다 산다고 생각했다. 고생을 왜 사지? 팔고 싶지도 않고 살 생각은 더 없는데. 그 말에 넌 고생깨나 하겠다. 라는 승철의 말을 들으면서도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넘겼다. 정확히 한 달 후, 개총에서 복학한 윤정한을 마주한 순간. 그 말이 이런 뜻이었나. 그날 지수는 백문이 불여일견과 사서 고생한다는 뜻을 정확히 이해하게 됐다. 그렇게 됐다.
윤정한. 학교 좀 재밌게 다닌다 싶은 사람들은 다 아는 이름. 심리학과 금발 머리. 홍지수 옆에 걔. 어디에도 전 남자친구 타이틀은 없다. 만났다 헤어지고를 열 번쯤 반복했을 때 가까운 동기들조차 둘을 이해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소식 느린 후배가 둘 사이를 조심스레 물어보면 냅둬. 저러다 또 붙을 거야. 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 같았다. 여느 때처럼 싸우고 헤어졌는데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혹시 무슨 일 생겼나 싶어 승철에게 소식을 물었더니 어제 수료식 끝냈단다. 지수 빼고 다 알았다. 어디 강원도 철원쯤 생각했는데 경남 거제도란다. 혹시 몰랐던 거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그렇다는 말 대신 웃음으로 답했다. 덕분에 소문 쫙 돌았다. 윤정한 홍지수한테 차이고 군대로 내뺐다고. 홍지수 충격받아서 미국으로 뜰지도 모른다고.
미국까지 갈 생각은 없었는데, 이참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떴다. 1년 만에 돌아왔지만. 두고 온 것도 없는데 마음이 불편해서 1년도 겨우 있다가 왔다.
원래의 홍지수라면 과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겠지만, 올해는 동기들이 단체로 복학하는 해니까. 개강 총회는 예상한 대로 개총의 이름을 빌린 전역 겸 복학 신고식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 지수도 덩달아 흥이 올랐다. 좋은 날 분위기 깨기 싫어 한잔 두잔 마시다 보니 점점 취기가 올랐다. 그때 윤정한이 끼어들었다. 너 취한 거 같다. 그때 홍지수의 솔직한 심정을 짧게 축약하면, 뭔 상관? 이었다. 헤어지고 찌질하게 군대런한 주제에 인제 와서 왜 챙겨주는 척이지. 거기서 내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았나 보지. 그게 자만인지도 모른 채 어쩐지 들떠서, 목소리 깔고 말했다. 얘기 좀 해.
“먼저 말도 없이 잠수탄건 너야.”
“뭐?”
“군대 말이야. 내가 동기들한테 전해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아니?”
“지수야, 헤어진 사이에 그 말이 꼭 필요해?”
헤어진 사이, 라는 말이 정한의 입에서 나오자 지수는 들지도 않은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지수는 당연히 우리가 다시 만났으니 다시 시작할 줄 알았다. 암묵적 룰이었으니까.
자주 싸워도 금방 화해했고, 때로는 화해하기 위해 싸웠다. 착각이었고 꿈이었다. 아직 수요일이니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말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술집 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정한을 보면서 깨달았다. 확인시켜주려고 나온 거의였구나.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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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는 건 없었다. 헤어지고 정한을 대하는 건 처음이 아니므로. 오히려 너무 익숙한 상황이었다. 과장 보태서 헤어진 전남친과 마주하는 101가지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낼 자신도 있다. 그건 동기들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여전히 둘이 저러다 말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홍! 여기 자리.”
바로 지금처럼. 정한 옆에 앉은 채 제 옆자리를 툭툭 치는 동기를 보며, 지수는 동기 시간표가 곧 정한의 시간표와 같을 걸 알고 있었음에도, 짐작이 무색할 만큼 정적이 흘렀다. 뭐야? 전혀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지수가 앉기를 재촉하는 동기에게 맨 앞자리에 앉겠다고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동기도 정한도 굳이 지수를 따라 자리를 옮기지는 않았다.
자리만 맨 앞이었지 수업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이런 건 이별 매뉴얼에 없던 일이라 개정판이 시급했다.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 수업은 수업이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나만 이 상황이 어색하고 불편하고, 힘든 것 같아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인데 정한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서. 볼펜이나 교양 책에 푹푹 찌르고 있는데 머리 위로 소리가 울렸다.
“지수야 점심은 어쩔래.”
고개를 들자 같은 기종의 스마트폰에 시선을 둔 채 묻는 정한의 얼굴이 보였다. 옆의 동기는 연강이라 둘이 먹으라며 문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너랑 얼굴 보고 점심 먹을 생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업 내내 신경을 써서 그런지 속이 헛헛했다. 밥까지 굶을 순 없다.
학식으로 때우려던 계획은 어쩌다 보니 닭갈비로 변경되었고, 그길로 카페에서 밀크티까지 테이크아웃해서 나오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싶어 황급히 보폭을 넓혔다. 발을 헛디뎌 살짝 휘청이니 정한이 황급히 팔을 잡았다.
“고마운데, 안 도와줘도 돼.”
“그래.”
“그래?”
“왜?”
혼자 열 내기 싫어 최대한 감정을 꾹꾹 담고 있었지만, 저 태연한 태도를 보니 본인도 모르게 폭발해버릴 뻔했다. 정말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을 보니 윤정한에게 나는 금방 털어낼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었나 싶어 서러워졌다. 돌아서면 싸우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정한아, 이제 네가 나 안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우리 헤어진 사이잖아.”
“그게 왜?”
“뭐?”
“원래 우리 헤어져도 밥 같이 먹고 같이 잘 다녔잖아. 새삼스럽게.”
살짝 피곤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었다. 사람 피 말리려고 작정을 했구나 네가. 대답 잘못했다가 고혈압으로 실려 갈 것 같아 정한을 지나쳐 강의실로 걸었다. 당연히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
“다시 사귀지? 어제 후배가 닭갈비집에서 너네 봤대.”
“미국 갔다가 돌아왔을 때부터 예상했다 나는~”
하이파이브 쳐대며 지들끼리 신난 동기들을 보며 지수는 오랜만에 환멸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도 이미 믿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화려한 전적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다. 지수 미국 다녀왔어? 왜? 물으며 끼어드는 정한만 없었어도, 알아서 잘 정리했을 거였다.
“너 그때 새끼야. 잠수 이별 타가지고. 지수 미국 일 년 다녀왔잖아. 몰랐냐?”
“아 그래? 몰랐지. 우리 다시 안 사귀니까.”
“아 그르냐? 미안하다 괜히..”
지수가 할 말을 대신해준 건 맞는데, 묘하게 속이 뒤틀렸다. 이쯤 되니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했다. 윤정한은 홍지수를 아직 좋아한다. 아닌 척, 다 털어낸 척 연기하는 꼴이 이제 눈에 보인다. 우연인 척 주위 맴돌면서 사람 속 긁는 건 덤이고. 정말 정한이 지수와 헤어질 거였으면 다시 안 돌아왔어야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 때문에 선을 긋는 걸까. (자주) 열 받게는 해도 헷갈리게는 안 하던 정한이 뭐 때문에.
“정한아, 나랑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어? 친구도 싫고 다시 사귀는 것도 싫으면, 뭐 어쩌자고.”
“음.. 맞춰봐 ㅎㅎ”
“너 진짜 나랑,”
“너도 내가 듣고 싶은 말 안 해줬잖아.”
*
시간표상 금 공강은 아니지만, 자체 공강하기로 결정 내렸다. 정한을 또 마주쳐서 다시 어제 같은 대화를 나누기라도 했다가는 주먹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지수 본인을 위한 결정이었다. 가만히 누워 자다가 정한과 대화를 곱씹다가 베개만 괜히 퍽퍽 치기를 반복했다. 신경 쓰는 것도 에너지 소모의 일종이 맞는지 급격히 배가 고파졌다. 요리할 기분은 아니라 배달 어플을 뒤적이는데 상단 바에 동기의 카톡이 떴다. 삼쏘 고? ㅇㅋ
카톡으로 보내준 링크는 지도 볼 필요도 없는 지수가 아는 곳이었다. 자취방에서 세 블록만 걸어가면 있는 곳. 냄새 배도 되는 아끼지 않는 티셔츠에 후드집업 하나 걸친 채로 골목 입구에 다르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정한이었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연초 태우고 있는 윤정한. 눈 마주치니 바닥에 담배 던져버리려다 멈칫하는 윤정한. 결국, 바닥에 장초 버리는 윤정한.
“어, 지수다.”
“너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을걸.”
“말 또 서운하게 하네. 너 아직 나 좋아하면서.”
“알면서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지수야, 나한테 한 번도 말 안 해줬잖아.”
마주쳐오는 눈이 제법 경직되어 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대답을 종용하는 눈이다. 이 눈빛을 또 언제 봤더라. 드디어 정한이 원하는 답을 알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싸운 날 때문이었다. 나 오늘 꿈꿨어. 네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백번 말해주는 꿈.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지수 쪽으로 돌아눕는 정한에게 오늘 학교가는 길에 꼭 복권 사. 하고 장난처럼 말했더니, 지수야 네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길래 꿈인 줄 알고 일어났어. 하며 그대로 문 닫고 나갔던 날. 그거였다. 온갖 표현은 다 하는 지수에게 한국어로 사랑한다는 말은 어쩐지 무거웠는데, 정한이 자꾸 요구하고 고집부리니 그날따라 더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했다. 정한도 나름대로 돌려서 표현한 거의였겠지만, 잠이 덜 깬 아침에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도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헤어졌다.
“나도 알아. 네가 나 좋아하는 거. 그런데 만약 내가 틀린 거면 어떡해? 사랑 안 해서 사랑한다는 말 안 하는 거랑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말 안 하는 거 다른 거야. 나는 불안해 지수야. 무서워.”
“나 한번 헤어진 사람 다신 안 봐. 전남친이랑 밥 같이 먹고 그런 짓 못 해. 지금처럼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가. 근데 너한테 안 그러잖아 나.”
지수는 말을 멈추고 입술을 말았다. 정한의 눈을 다시 쳐다봤다. 평소엔 안 그러면서 이럴 때만 눈꼬리를 늘어뜨린다. 유독 사랑한다는 말이 정한에게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별의 주기가 짧아지면서 헤어지는 것에 충격이 덜해졌듯이 사랑한다는 말도 익숙해지면 습관 같은 게 될까 봐.
솔직히 지금도, 서로 사랑한다는 건 당연한데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오늘은, 말해야 한다. 이 빌어먹을 사랑해라는 말.
“나 너 사랑해 정한아. 제발 좀 넘겨짚지 말고.”
“응, 안 그럴게.”
안기라는 듯 팔을 벌리는 정한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좋아 죽네, 윤정한. 우리 헤어졌는데 또 사랑하면 어떡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대신에 정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헤어지잔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다시 연애할 수밖에. 이제는 정한이 지수의 사랑해라는 말속에 다 담기지 않은 사랑을 찾아내 주길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