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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피우는 세 가지 방법

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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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씨, 여기요."

 

   홍지수는 어느 주말에 아는 지인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아직 개화하지 않은 꽃의 씨앗이 심겨 있는 화분이었다. 분홍색 리본으로 야무지게 장식된 화분을 받아들고 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왜 나한테 주지? 홍지수는 생명을 키워본 적이 없었다. 다들 어렸을 적 한번은 키워봤다는 병아리나 햄스터조차 맡아본 적이 없었다. 친구네 집에 가면 항상 작고 소중한 생명이 있었고, 사실 홍지수는 그 생명을 키우는 것이 조금 무서웠다. 내가 잘못하면 죽는 거잖아. 나는 그런 부담과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생각은 십 년이 지나고 십오 년이 지나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곤란한 표정으로 쩔쩔매는 지수를 본 지인이 가볍게 덧붙였다.

 

 

   "물만 잘 주면 알아서 쑥쑥 자랄 거예요. 어디 집 현관문 앞이나, 회사나, 지수 씨네 어머니가 하신다는 가게 안에 놔두면서 꼬박꼬박 관심이랑 사랑이랑 같이 주세요.“

 

   "네, 잘 키워볼게요."

 

 

   결국 홍지수는 그날 화분 하나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석에서 내리기 전 조수석에 놓아두었던 화분을 소중하게 안고 집으로 올라갔다. 화분은 홍지수의 두 주먹을 합친 것보다 살짝 작았다. 지금이라도 조금만 힘을 주면 새하얀 도자기에 금이 가서 흙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화분의 첫 보금자리는 홍지수의 작은 자취방의 좁은 탁자 위였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거실 작은 탁자 위에 화분을 놓아둔 지수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깜짝 선물이라도 기획한 건지 홍지수의 지인은 이 식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주지를 않았다. 관심과 사랑을 주고 키워보라 했으니 이름이라도 지어줄까? 홍지수는 좁은 집 안을 뒤져 네임펜과 네임텍을 찾아냈다. 네임펜의 뚜껑을 열고 무슨 이름을 지어줄까 고민하던 중 갑작스럽게 휴대전화가 울렸다. 

 

   띠리리링. 익숙한 벨 소리였다. 으쌰. 몸을 일으킨 지수가 휴대전화를 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니 저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야!"

 

   "정한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전화를 건 사람은 홍지수의 유일한 친구 윤정한이었다. 지수의 표정이 저절로 밝아졌다. 휴대폰 너머에서 까르륵 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심 먹자고 전화했는데, 지금 시간 돼? 정한이 점심 약속을 제안했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수의 습관을 알고 있는 정한이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오늘 근처 가게에 초대받았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지, 뭐야~. 지수가 방긋 웃었다. 저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 마당발 윤정한이 고작 점심을 같이 먹을 친구가 없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홍지수는 이럴 때마다 정한이 자신을 찾아주는 게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홍지수와는 달리 정한은 교우관계가 굉장히 좋았다. 옆 반을 가도, 복도에 나가도, 급식실에 가도 전부 윤정한의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살짝 부끄럽지만, 홍지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지난 이후에도 자신이 윤정한의 가장 친한 친구란 것이 좋았다. 

 

 

   "몇 시까지 나가면 돼?"

 

   "지금!"

 

   "지금?"

 

 

   놀란 지수의 눈이 커졌다. 가끔 막무가내가 되는 윤정한 병이 오늘 도진 모양이었다. 지수는 시계와 자신의 앞에 있는 화분을 번갈아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수가 긍정의 대답을 했다.

 

 

   "그래, 어디로 가는데?"

 

   "집 앞으로 나와."

 

 

   형아가 기다리고 있는다. 정한의 일방적인 말과 함께 통화가 뚝 끊겼다. 입술을 삐죽 내민 지수가 벗어뒀던 옷을 집어 들었다. 애초에 외출복 차림이었기에 준비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빠릿하게 옷을 입고 머리를 정돈한 홍지수는 원룸 주차장으로 뛰어나갔다. 

 

 

   "정한아!"

 

   "지수야, 여기!"

 

 

   공동현관을 벗어나니 익숙한 차에 기대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맑게 웃은 지수가 정한을 향해 뛰어갔다. 정한이 웃으면서 지수를 반겼다. 곧 정한과 지수가 각자 운전석과 조수석에 탑승했다. 안전띠를 한 지수가 정한에게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 흠…. 손으로 턱을 짚으면서 조금 뜸을 들이던 정한이 지수의 질문에 답을 했다. 

 

 

   "너희 어머니 가게."

 

   "뭐?"

 

 

   정한의 차가 매끄럽게 가게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안전띠를 풀고 차에서 내리기 전 정한은 힐끔 옆자리를 쳐다봤다. 입이 부리만큼 튀어나온 홍지수가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홍지수를 만난 지 13년 정도 됐지만, 여전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후다닥 차에서 내린 정한이 지수의 옆에 착 붙어서 쫑알거렸다. 지수야, 실망했어? 지수야~ 홍지수야. 내 말 안 들려? 옆에서 정한이 뭐라고 말하든 고개를 획 돌린 지수가 그대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엄마, 저 왔어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아들보다 더 귀엽고 애교도 많은 정한이도 왔어요!"

 

 

   오랜만에 부모님의 얼굴을 본 지수보다 정한이 더 밝은 텐션으로 지수의 부모님께 인사를 건넸다. 곧 주방에서 지수의 부모님이 나왔다. 쪼르르 달려간 정한이 자신의 부모님과 열심히 안부 인사를 나눌 동안 지수는 오랜만에 온 가게의 메뉴판을 살폈다. 

 

 

   "메뉴 새로운게 생겼네?"

 

   "아, 그거? 엄마가 힘 좀 썼지. 우리 정한 아들 저거 먹어볼래?"

 

   "저는 어머니가 해주신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싹싹하게 대답한 정한이 지수를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돌려 부모님이 주방으로 돌아가신 걸 확인한 지수가 정한에게 속삭였다.

 

 

   "갑자기 우리 가게는 왜?"

 

   "너랑 같이 와보고 싶어서. 근데 지수야, 너 요즘 재밌는 일 없어?"

 

 

   태평하게 대답한 윤정한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러면 항상 홍지수는 모른 척 윤정한에게 장단을 맞춰줬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더라. 곰곰이 최근 있었던 일들을 생각한 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월급을 받아먹으며 사는 직장인에게 무슨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있겠는가. 최근 가장 재미있었던 일이라면, 일주일 내내 이어진 야근을 참지 못한 사원 하나가 지수와 친한 사원들이 모여있는 저녁 자리에서 조용히 부장님께서 탈모에 걸리셨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 일이었다. 지수가 고개를 젓자 정한이 아쉬움에 콧소리를 냈다. 

 

 

   "지수야아~. 진짜 뭐 없어? 정한이는 지수가 뭘 했는지 궁금해요. 자, 말해보자여."

 

   "진짜 없다니까. 그러는 너는 무슨 일 없었어?“

 

 

   정한의 말을 끊은 지수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실 윤정한의 집은 돈이 많았다. 그리고 이 세상은 돈이 많으면 별일이 다 생기는 세상이었다. 

 

   고등학생 때, 윤정한의 집에서 정한을 데리러 온 적이 있었다. 잘 빠진 검은색 세단이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어서 모든 아이들이 그 차를 구경했던 적이 있다. 그때 정한과 같이 하교하던 지수도 그 차를 봤었다. 그 앞에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저런 차를 타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랑은 상종도 안 하려고 하겠지? 머릿속에서 한 생각을 입 밖으로 뱉으려는 찰나,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윤정한을 바라보니 그가 질린다는 눈빛으로 검은색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한아 무슨 일 있어?"

 

 

   지수의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정한이 성큼성큼 차를 향해서 걸어갔다. 조금 전부터 시계만 확인하던 정장을 입은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련님. 남자의 한마디에 학교가 조용해졌다. 새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지수는 멍하니 윤정한을 바라봤다. 정한은 익숙한 듯 가방을 벗어 남자에게 넘기고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차에 탔다. 그리고는 자기 가방을 받아든 남자를 불러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것 같았다. 

 

   오오. 윤정한~. 곧 수백 명의 남자애들의 목소리가 교문을 울렸다. 평소에 정한과 친하지 않았던 애들도 모두 기웃거리며 차에 타 있는 정한을 바라봤다. 그리고 홍지수는 아까 서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발바닥이 땅에 고정이라도 된 듯 떨어지지 않았다. 윤정한이 도련님이라고? 충격적인 정보가 입력됐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정한과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왔던 것이었다. 곧 지수는 그 남자의 손에 이끌려 정한의 옆자리에 탑승하게 됐다. 고등학생이 된 지 대략 1년 만에 하는 편안한 하교였다. 처음에 안절부절못하던 홍지수는 곧 옆에 있는 윤정한이 던진 짧은 농담에 긴장이 풀렸었다. 그때를 회상한 지수가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홍지수 뭐냐, 무슨 재미있는 상상을 하길래 그렇게 웃냐?"

 

   "안알려줄건데. 빨리 이야기나 해 봐."

 

 

   흔히 말하는 재벌 2세 윤정한은 얼마 전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했다. 빠릿하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니 회사 사람들도 딱히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고 들었다. 물론 홍지수의 회사도 윤정한네 아빠의 회사였다. 

 

 

   "알겠어, 지난번에 우리 부서에서 소개팅을 주선하던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띠리리링. 정한이 막 이야기를 시작하자 지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수가 뒤집어뒀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자 얼굴이 밝아진다. 그런 지수와 대비되게 정한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지수가 손짓하고 정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홍지수가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벗어날 타이밍이었다. 지수가 일어나서 가게 밖으로 나가자,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어머, 지수는?"

 

   "아, 지수는 잠시 전화 받는다고 밖으로 나갔어여."

 

 

   우아, 이거 진짜 맛있을 것 같아여! 역시 어머니는 너무 대단하세여! 씁쓸하게 대답한 정한은 곧 밝게 웃으면서 음식을 칭찬했다. 아들의 친구에게 받는 칭찬이 어찌나 행복한지 지수의 어머니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우리 정한 아들 맛있게 먹어. 예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정한이 숟가락을 들었다. 음식을 조금 먹었을 때, 지수가 자리로 돌아왔다. 급하게 짐을 챙기는 모습에 정한이 모르는 척 하며 지수에게 물었다.

 

 

   "슈지야, 어디가?"

 

   "슈지라고 부르는 거 오랜만이네. 나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늘 즐거웠어."

 

 

   곧 짐을 챙긴 홍지수가 가게를 후다닥 나갔다. 정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매정한 홍지수. 한 번도 뒤를 돌아본 적이 없는 나쁜 홍지수. 둘이 같이 먹을 줄 알고 음식을 시켰기에, 남은 양이 많았다. 정한은 그 음식들을 꾸역꾸역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렇게 먹는다면 밤에 분명 탈이 날 걸 알지만, 계속 욱여넣었다. 홍지수 때문에 아픈 거라면, 그것 또한 기꺼웠다. 결국 윤정한은 그날 급체를 해 응급실로 실려 갔다. 

 

 

   [정한아, 갑자기 나가서 미안해. ㅠㅠ. 다음에는 내가 살게!]

 

   [정한아? 혹시 삐진 거야?]

 

   [정한아, 내가 미안해. 카톡 답장 좀 해주라.]

 

   [윤정한, 괜찮아?]

 

   [정한아, 내가 미안하니까 제발 답 좀 해줄래? 나 조금 걱정돼.]

 

   [승철이한테 들었어. 응급실이라며, 괜찮은 거야?]

 

   [아침에 일어나면 연락해. 아프지 말고.]

 

 

   아침에 링거를 맞으며 눈을 뜬 정한은 휴대폰에 쌓여있는 연락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홍지수. 다정한 홍지수.

 

 

   [나 이제 괜찮아.]

 

   [이거 캡처해둘 거다. 조슈지 약속 지켜!]

 

 

   오늘이 일요일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한은 병원비를 결제하고 회사로 향했다. 일요일이지만, 일을 좋아하는 정한의 아버지는 출근해있을 시간이었다. 지갑 안에 있는 사원증으로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사장실은 가장 위층인 8층. 조금 기다리자 띠 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한은 성큼성큼 걸어서 사장실이라고 적힌 문 앞에 섰다. 똑똑 똑. 노크를 세 번 한 다음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들어오세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정한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빠, 저 할 말 있어요."

 

 

 

   그냥 잠시라도 홍지수와 떨어져 있을 방법을 찾아야겠다. 

 

 

 

   ***

 

 

 

   "네? 윤 팀장님이 출장을 가셨어요?"

 

 

   월요일에 출근한 홍지수는 습관처럼 윤정한을 찾았다. 정한의 팀에 가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지수는 예상하지 못한 출장 소식을 접했다. 토요일에 선물 받았던 화분을 회사에 들고 왔는데,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해 정한의 의견을 들어볼까 했던 게 무산이 됐다. 아쉽다고 생각한 홍지수의 머릿속에 이질감이 하나 피어올랐다. 

   윤정한은 항상 출장을 가기 전 홍지수에게 짧게라도 언질을 줬다.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기도 하고, 출장을 가는 지역에는 무엇이 맛있는지 떠들기도 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윤정한의 연락이 있을까 지수는 황급히 휴대폰을 켜서 카카오톡에 들어갔다. 알림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한과의 문자는 딱 정한이 응급실에서 퇴원하고 보낸 문자가 마지막이었다. 

 

 

   "아, 출장이 어제 갑자기 결정된 거예요. 윤 팀장님이 급하셔서 홍 대리님께 말씀 못 드렸나보다."

 

 

   옆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사원 하나가 가볍게 흘리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지수의 눈이 커졌다. 분명 윤정한은 토요일 밤에 급체했고, 일요일 아침에 퇴원했다. 그런데도 출장을 갔다고? 급한 일이었나? 홍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원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넸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지수는 얌전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은 오전부터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자신의 부서로 돌아온 지수는 자료를 다시 검토하고 회의실에 생수와 프린트를 자리마다 배치했다. 

   회의는 오전 내내 이어졌다. 저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손목시계를 힐끔 본 지수는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헛기침에 다시 피피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하는 건 언제나 재미없지만, 오늘은 특히나 무료했다. 이제 시계는 11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 점심시간이니까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팀장의 한마디에 팀원 대부분이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팀장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살펴보며 눈치를 보던 지수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벗어났다. 휴대폰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윤정한의 연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수는 황급히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휴대폰의 화면을 켜니 `남자친구♡`라고 저장된 저장 명이 보였다. 알림창에는 여러 번 지수에게 전화를 건 흔적이 부재중 전화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홍지수는 황급히 발신 버튼을 눌렀다. 두 번의 신호음이 나온 뒤,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홍지수 맞지?"

 

 

   화면 너머에서 홍지수가 사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대답하려고 입을 뗀 순간.

 

 

   "그냥 빠르게 말하고 싶었는데 얼굴은 보고 해야 할 것 같아서. 우리 헤어지자."

 

   "..."

 

   "헤어지자 지수야."

 

   "뭐라고?"

 

 

   홍지수가 되물었다. 그런데도 애인이 건네는 목소리는 확고했다. 휴대폰을 꽉 쥔 손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별은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숨을 한 번 고른 홍지수가 대답했다. 

 

 

   "그래."

 

 

   홍지수의 연애가 끝났다. 1년 7개월이라는 연애 기간 치고는 생각보다 싱거운 결말이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12시가 되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은 1시까지. 홍지수는 담담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팀원들은 전부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지 사무실에는 홍지수밖에 없었다. 괜히 책상 위에 있는 화분의 흙을 톡톡 건들인 지수가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이런 날에는 윤정한이랑 같이 술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하필 출장을 가서 자리를 비웠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고팠는데 지금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홍지수는 멍하니 책상을 두드렸다. 친한 옆자리 동료한테 샌드위치라도 부탁할까. 

 

   카톡을 남기려 휴대폰을 꺼내자 때맞춰 윤정한에게 연락이 왔다. 

 

 

   [조슈지야 조슈지야]

 

   [점심 먹었어???]

 

   [굶지 말고 정하니 보고 싶어도 조금만 기다려ㅎㅎ]

 

   윤정한 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뭐야 윤정한ㅎㅎ 잘 먹을게]

 

 

   정한이 보낸 건 회사 바로 앞에 있는 베이커리의 샌드위치 쿠폰이었다.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홍지수는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이별에 무기력하게 있기에는 인생이 너무 바빴다. 12시 30분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가자, 이제 막 식사를 마친 팀원들과 마주쳤다. 

 

 

   "어, 홍 대리님."

 

   "식사는 잘하셨어요?"

 

   "네, 대리님은 지금 나가시나요?"

 

   "네, 밥시간을 놓쳐서요. 먼저 올라가세요."

 

 

   짧은 인사를 건넨 지수가 회사 밖으로 나왔다.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베이커리가 나온다.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알바생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숙여 화답한 지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겨서 정한이 선물해준 샌드위치를 집었다. 휴대폰을 보여주며 계산을 마치고 난 뒤, 가게 밖으로 나가 황급히 포장을 벗겨냈다.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먹자,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지수는 볼을 우물거리며 신호를 기다렸다. 붉은색 신호등이 곧 파랗게 점등됐다. 

 

   성큼성큼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또다시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홍지수의 폰이 제대로 혹사당하는 날인 듯 했다. 한 손으로 주머니 안을 뒤적거린 지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승철?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전화를 건 사람은 홍지수와 윤정한의 대학교 동기인 최승철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전화를 건 승철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불안하게 왜 그래?"

 

   "야, 지수야. 내가 이걸 엄청나게 고민했는데, 그래도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인데?"

 

 

   바람피웠어. 네 남친.

 

 

   머릿속이 뎅- 하고 울렸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홍지수는 회사의 출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벌어진 입을 다무는 법을 까먹은 것 같았다. 구두의 밑창이 땅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말해봐."

 

 

   홍지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꽉꽉 눌러 담은 분노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던 1시간 전의 애인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 개새끼. 

   승철의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흔히 말하는 CC. 캠퍼스 커플을 하고 연애의 쓴맛을 알아버린 뒤 연애를 잘 하지 않던 최승철이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집을 간 날이었다. 술에 잘 취하지 않는 최승철은 그날 술을 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신 뒤 꼴아버린 친구들을 택시에 태워 귀가시키는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술주정을 부리는 친구를 택시에 밀어 넣은 뒤, 담배나 하나 하려고 골목으로 향했을 때 커플의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목격했다. 

 

 

   "처음에는 그냥 피해주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얼굴이 너무 익숙한 거야. 자세히 살펴보니까 네 남자친구더라. 그래서 골목 앞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물어봤지. 바람피우는 거 맞냐고."

 

   "그랬구나. 그래서 오늘 헤어지자고 했구나."

 

 

   인제야 퍼즐이 전부 맞춰졌다. 지수는 한숨을 내쉰 다음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점심시간의 막바지인데 술이 생각났다. 

 

 

   "승철아, 오늘 저녁에 나랑 술이나 마시자."

 

   "...그러자. 힘내고."

 

 

   승철의 위로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12시 54분. 이제는 정말 사무실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홍지수는 엘리베이터에서 SNS 계정 정리를 시작했다. 인스타에 올렸던 커플 사진을 전부 내리고, 카톡 프사도 다른 거로 바꾸었다. 갤러리를 내리다 보니 윤정한과 눈싸움을 한 사진이 보여서 그 사진을 선택했다. 바람을 피운 개새끼는 신경 쓸 가치가 없었다. 홍지수는 가슴 속에 조금 남아있던 미련이 씻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저녁에 승철과 함께 술 한잔을 하고 털어내리라. 

다행히 그날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감정에 발목을 붙잡혀 일을 질질 끌지도 않았고, 실수해 상사에게 깨지는 일도 없었다. 위로 결재를 올렸던 보고서는 다행히 반환되지 않았으며, 워커홀릭으로 유명한 부장님이 오늘은 일찍 퇴근하자며 6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하는 칼퇴였다. 홍지수는 자신의 상사가 일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최승철에게 문자를 날렸다.

 

 

   [지금 당장 우리 회사 앞으로 와.]

 

   [넵!]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승철의 차가 회사 앞으로 도착했다는 답장이 왔다. 가방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간 지수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았다. 승철과 정한, 지수가 자주 가는 이자카야에 가는 길이 오늘따라 더 적막하고 어색했다. 결국 적막함을 참지 못한 승철이 큼큼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어디, 괜찮아?"

 

   "안 괜찮을 이유는 없지. 안 그래도 요즘 관계가 조금 시원찮다고 했는데."

 

 

   지수가 말끝을 살짝 늘렸다. 그 사람에 관한 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를 하고 입을 다문 지수를 보며 승철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난 듯 지수를 바라봤다. 

 

 

 

   "이따가 윤정한도 온대."

 

   "걔 출장 갔잖아?"

 

   "빨리 끝났다는데? 내일 반차내고 아침에 오려고 했는데, 너 헤어졌다는 이야기 듣고 그냥 지금 기차 타고 오고 있데."

 

   "정한이가?"

 

 

   응, 윤정한이. 씩 웃은 승철이 차를 꺾어 주차했다. 예약을 잡아둔 것인지, 이름을 말하자 종업원이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를 해줬다. 편하게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이 안주와 사케를 주문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재미있는 일은 없었는지 한마디씩 주고받다 보니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승철이 대답하자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고개를 들고 문을 바라보자 윤정한이 서 있었다. 술을 몇 잔 마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지수가 정한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아.

 

   "응."

 

 

   담백하게 대답한 정한이 지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케병을 지수와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승철에게 몇 잔을 마셨는지 확인했다.

 

 

   "얘, 얼마나 마셨어?"

 

   "한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요즘 힘들었나 보다. 그러니까 일 좀 적당히 시켜."

 

   "다른 부서라서 어쩔 수가 없네."

 

 

   정한이 도착하고 난 직후 마음이 편해졌는지 지수의 볼은 그 전보다 조금 더 상기되어 있었다. 눈꼬리를 휘는 웃음을 지으며 시시껄렁한 농담에 반응해주던 지수는 곧 꾸벅꾸벅 눈을 감았다. 수마가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윤정한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는 지수의 몸을 붙잡았다. 말은 안 하지만 이별의 후유증이 있을 게 분명했다. 분명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 술도 마시지 않고 지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앞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정한아. 그럴 거면 고백을 하던가."

 

   "했어. 이미."

 

   "뭐?"

 

 

   윤정한의 말에 최승철이 젓가락을 내려놨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나는 몰랐지? 허둥지둥하는 승철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정한이 지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대학생 때. 과 동기들끼리 엠티 갔었잖아. 새벽이었나, 홍지수랑 아이스크림 사러 나갔었거든. 그때 고백했어. 그냥, 그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묻어두기에는 내가 홍지수를 너무 좋아했어."

 

 

   승철은 입을 벌리고 덤덤히 진심을 토해내는 정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10년 동안 만나오면서 윤정한이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해진다더니. 이미 윤정한의 눈은 어딘가 맛이 갔다. 적어도 최승철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홍지수는 뭐라고 했는데."

 

   "무시했어."

 

   "무시했다고?"

 

 

   응, 걔는 그걸 무시했어. 내가 좋아한다고 했더니 들은 척도 안 하더라. 

 

   윤정한은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종강하고 나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과 동기들끼리 모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딱히 서로 악감정도 없고, 대학교의 로망을 한 번 실현해 보고 싶어서 빠지는 사람 없이 30명 정도가 모두 모여서 여행을 갔던 날이었다. 술을 궤짝으로 사고, 안주를 차 트렁크에 밀어 넣었던 대학생들은 뭐가 그렇게 행복하다고 깔깔 웃어댔다. 강원도에 도착하고 나서는 술판이었다. 술을 마시면서 친해지는 게 최고라는 누군가의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트렁크에 보관해뒀던 술을 꺼내왔다. 

   소주부터 맥주, 막걸리, 보드카, 럼주, 위스키, 고량주. 별의별 술이 다 나왔다. 패기 넘치는 대학생들은 내일이 없을 듯이 술을 마셔댔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술에 강한 정한과 승철 빼고는 전부 쓰러졌다. 발로 동기들을 툭툭 차며 생사를 확인한 정한이 노곤한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수를 깨웠다. 

 

 

   "지수야, 우리 아이스크림 사러 갔다 오자."

 

   "어…. 아이스크림?"

 

 

   졸린 눈을 비빈 홍지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펜션 밖으로 나가자 살이 베일듯한 겨울 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팔아? 나도 잘 모르겠어. 지수의 물음에 정한이 하하 웃었다. 펜션 앞에 있는 마트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트로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몇 개 고른 뒤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어 다시 펜션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죽은 듯 조용했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 걸었을까. 윤정한은 조용히 지수를 불렀다. 홍지수는 윤정한의 부름에 대답했다. 

 

 

   "야, 조슈지."

 

   "왜, 정한아?"

 

   "좋아해."

 

   "지금 바람이 차다."

 

   "좋아한다니까?"

 

   "빨리 펜션 들어가자. 여기에 더 있다가 얼어서 죽겠다."

 

 

   윤정한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홍지수는 멈추지 않았다. 정한은 멍하니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매정한 홍지수. 사랑스러운 홍지수. 내 고백에 대답조차 해주지 않는 홍지수. 차라리 역겹다거나, 너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거나. 무슨 대답이라도 나왔으면 윤정한은 만족했을 거였다. 홍지수의 대답이면 그게 무엇이든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니까. 그러나 홍지수는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펜션 건물에 도착한 지수가 문을 열고 뒤를 돌아봤다. 정한아! 거기 추운데. 지수의 목소리에 윤정한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게. 춥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윤정한은 자신의 옆에서 잠들어있는 홍지수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윤정한은 홍지수가 원하는 모든 걸 해줬다. 든든하고 기댈 수 있는 형 역할을 해줬으며, 함께 앞으로 걸어갈 친구 역할도 해줬고, 아주 가끔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홍지수를 도와주는 슈퍼맨 역할도 해봤다. 인간에게 감정을 담아두는 그릇이 있다면, 윤정한은 지금 한계치에 다다랐다. 여기서 한 방울만 더 떨어지면 넘쳐 버릴 것 같았다. 감정의 홍수는 아무리 튼튼한 배를 만들어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윤정한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홍지수가 잠꼬대로 한마디를 뱉었다. 

 

 

   "정한아."

 

 

   그래. 지수야. 너는 나한테 단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는구나. 정한은 멍하니 지수를 바라봤다. 옆에서 승철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윤정한. 너 울어?"

 

 

   승철의 말에 정한이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만졌다. 촉촉한 눈물이 손에 묻어나왔다. 아, 내가 지금 울고 있구나. 윤정한이 홍지수 때문에 울고 있구나. 한번 자각을 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눈물방울은 점점 굵어져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윤정한은 지금 흘리고 있는 눈물이 자기의 처지같다고 생각했다. 윤정한이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자 최승철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 

 

 

   "지수야. 지수야."

 

 

   윤정한이 흐느끼듯이 홍지수의 이름을 부른다. 그에 화답하듯 홍지수가 졸음에 잠겨 감겨있던 두 눈을 조금 떴다. 작은 틈으로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야? 너 왜 울어?"

 

 

   윤정한이 우는 얼굴을 봤다. 졸음이 확 달아났다. 홍지수는 벌떡 일어나서 윤정한에게 갔다. 급하게 밥상 옆에 있는 휴지를 꺼내 윤정한의 눈가를 닦아줬다. 그런 홍지수의 행동이 너무 다정해서 윤정한은 조금 더 서러워졌다. 나에게는 기대도 안 해줄 거면서. 결국 윤정한은 7년 만에 속에 담아뒀던 모든 말들을 뱉어냈다. 

 

 

   "사랑해. 제발 나를 사랑해줘. 네가 나를 사랑해준다면 나는 뭐든 해줄 수 있는데.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너를 사랑할 자신이 있는데. 너를 아프게 하지도 않고 속상하게 하지도 않을 텐데."

 

 

   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는 곧 절절한 고백이 됐다. 멍하니 윤정한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홍지수는 무심결에 윤정한의 눈을 바라봤다. 눈물이 가득 고여있는 얼굴. 홍지수가 좋아하는 윤정한의 얼굴. 홍지수가 입을 열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겨우겨우 입을 떼서 한마디를 한다.

 

 

   "대답은…."

 

   "대답은?"

 

   "조금 고민해보고 알려줄게. 미안, 정한아."

 

 

   홍지수는 결국 매정한 대답을 한다. 눈물을 쏟아내던 윤정한은 말을 잘 듣는 강아지가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네가 원하는 건 모든 해줄 거야.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닦아낸다. 충격적인 윤정한의 고백에 잠에서 깨고 정신을 차린 홍지수는 일단 최승철의 카드로 음식 결제를 하고, 택시를 불렀다. 얼빠져있는 최승철을 택시에 태운 뒤, 윤정한을 부축했다. 일단 술과 감정에 절어있는 인간을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또 다른 택시를 잡고 있었는데 윤정한이 백허그를 하며 안겨왔다. 

 

 

   "지수야."

 

   "왜?"

 

   "너, 기억하고 있었지?"

 

 

   그 말에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던 홍지수가 표정을 굳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기 등에 고개를 묻고 있는 정한을 바라봤다. 정한은 생긋 웃었다. 홍지수가 불안해할 때면 항상 보여주던 웃음이었다. 홍지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맞다. 홍지수는 윤정한의 고백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윤정한은 홍지수에게 친구였으며, 가족이었기 때문에. 

   처음 고백을 받았을 때, 차라리 거짓말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유튜브가 유행한다던데 그곳에 올리기 위한 깜짝 카메라였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정한의 말을 못 들은 척 하고 걸음을 옮기자 자신을 따라오던 발소리 하나가 뚝 끊긴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 윤정한이 진짜 나를 좋아하는구나. 펜션의 문을 열고 멍하니 서 있던 정한을 부르면서 홍지수는 다짐했다. 윤정한과의 관계를 망치면 안 된다고. 

 

 

   "나쁘다. 너무 나빠. 홍지수."

 

   "응…. 미안해."

 

 

   정한이 웃었다. 특유의 웃음소리가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 홍지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윤정한은 항상 이랬다. 조금 더 들이대 볼 생각 자체를 안 했다. 홍지수가 윤정한의 고백을 무시한 이후부터 7년 동안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정한아. 내가 화분을 하나 선물 받았거든."

 

   "응? 너 화분 키워본 적 없잖아."

 

   "그렇긴 한데 어쩌다 보니 받았어."

 

   "그래서?"

 

 

   내가 걔를 데리고 집에 들어갔는데. 이름을 지어주려고 보니까 너한테 전화가 온 거야. 그래서 이름을 못 정했거든. 그리고 집에다 두면 계속 까먹을 것 같아서 회사에 데려왔어. 오늘 아침에 이름을 지어주려고 윤정한이랑 상의해볼까 했는데, 윤정한이 출장을 갔대. 그래서 그냥 내 마음대로 이름을 붙였어.

 

   뭐로?

 

   윤정한으로.

 

   뭐?

 

   매일매일 물을 주고 사랑을 주고 애정을 주면 잘 자란대. 그렇게 정성을 쏟으면 언젠간 꽃이 필 거래. 정한아, 윤정한.

 

   응, 지수야.

 

   너도 그래? 너도 매일매일 사랑해주고 애정을 주면 무럭무럭 자랄까? 

 

   모르지. 슈지야, 네가 한 번 해봐.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애정을 주고 관심을 줘. 

 

 

   택시를 잡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홍지수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윤정한의 눈을 바라봤다. 순간 머릿속에서 생각이 하나 스쳤다.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윤정한을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자 윤정한이 한걸음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의 위치가 순식간에 한 뼘으로 좁혀진다. 아. 홍지수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윤정한이 목덜미를 감싸 안는다. 곧 조금은 차가운 윤정한의 체온이 느껴진다. 홍지수는 담담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윤정한과 처음 만난 17살의 여름날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자산 1.png 부족한 실력인데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모두 해피윤홍라이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