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계의 꽃”에서 꽃을 담당하는 윤정한.
“사랑이란 감정 안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번 작품을 찍을 때마다 관객분들이 제 연기를 보시고 전 작품들과는 다른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시고요. 가을에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가을을 보실 때 제 감정이 전달되었기를 바라요. 앞으로도 더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해주신 제 팬분들과, 제 연기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 그리고 k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사계절-가을> 마지막 인터뷰 中
<여름 끝자락>
“정한이 형~ 작품 제의 들어왔어.”
오늘도 윤 배우 전담 매니저인 부승관은 정신이 없다. 모든 로맨스 작가들이 윤정한을 원하고 있으니까, 로맨스 작품이란 작품은 모두 정한에게 콜이 날아온다. 정한에게 직접 대본이 날라오기 전, 대본 정리하고 설명하는 일은 모두 부매니저 담당이다. 이 일도 벌써 3년째 하고 있으니 적응할 만도 한데, 날이 가면 갈수록 물오른 얼굴과 연기 실력을 가진 윤 배우 때문에 적응할만하면 업무가 늘어난다.
“승관아, 이번에 어떤 작가님들 대본 들어왔어?”
“어? 아, 기억이 잘 안 나네. 이번엔 정리 안 하고 받자마자 가져온 거라서.”
“그럼 지금 확인해보면 되겠다. 같이 대본 보자. 옆에서 네가 설명도 해줄 겸.”
우리 윤 배우는 작품을 하는 도중에도, 그 후에도, 그 전에도, 매 순간마다 자신을 원하는 작품의 대본을 받는다. 다음 작품 뭐 하지~라는 마음고생 없이 편히 지낼 수 있단 소리다. 하지만 정한은 항상 다른 상황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다.
“오늘은 ‘그 작가님’ 작품이 나한테 왔을까?”
정한이 처음 로맨스 영화를 찍고 ‘영화계의 신예’로 불리기 시작한 17살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한은 k라는 필명을 쓰는 ‘그 작가’의 대본을 받은 적이 없다.
모두가 자신을 원할 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항상 홍지수만 자신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는 k를 정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많고 많은 꽃들 중에 왜 홍지수를 선택하는 것인지, 그것도 장르물만 찍는 배우를.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장르물만 찍는 홍지수가 k작가의 작품, 즉 로맨스 장르만 한다 하면 작품에서 사랑 연기로 정한의 마음 한구석을 매번 찌른다는 것이다. 항상 정한에게 ‘사랑에 빠졌다’라는 표현을 넘어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지수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 정한은 꼭 k의 작품을 하고 싶었다.
홍지수를 만나기 위해서.
홍지수와의 연기를 원한다면 윤정한이 로맨스 말고 장르물을 찍어도 될 텐데 왜 장르물을 찍지 않냐? 정한은 지수와 오로지 ‘로맨스’를 찍고 싶었기 때문에 많고 많은 장르물 러브콜을 거절하고 항상 k작가의 작품을 기다렸다. 또, k작가의 작품 말고는 로맨스 영화를 찍지 않는 홍 배우 때문에 정한은 더 오기가 생겼다. 특히 이번이 홍지수와의 로맨스 연기를 영화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애가 탔다.
k작가가 10년에 걸쳐서 완성한 <사계절>의 마지막 시리즈가 올해 제작된다는 소문이 이미 배우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고, 이 작품을 끝으로 홍지수는 은퇴한다고 미리 SNS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 작품이 아니면 정한은 영원히 홍지수와 연기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정한은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지수와의 호흡을 통해 지수에게 받았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 감정을 전달받아 연기하고 싶었다.
정한은 지수가 자신에게 주는 이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내고 싶었다.
지수가 연기하는 사랑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랑 중, 사랑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정한은 생각했다. 단순히 그 이유였다. 남들이 오해할만한, 지수를 좋아해서, 사심이 담긴, 그런 기삿거리인 다른 이유는 일절 없었다. 오로지 연기를 위해서 지수와의 연기를 원하는 거라고 정한은 굳게 자기 자신을 믿고 있었다.
‘내가 이 감정을 느끼고 홍지수와 연기를 하고 싶은 이유는 홍지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로맨스 배우로서 연기하기 위해 그런 거야.’
승관이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즌인데 왜 정한이 형은 벌써부터 대본을 기다릴까?’
사계절의 끝은 겨울이니까, 심지어 이 시리즈는 30분 만에 모든 서사가 다 펼쳐지는 짧은 사랑 영화이기 때문에 촬영도 한 달 안에 끝난다. 11월 즈음에 대본을 받으면 리딩하고, 미팅하고, 찍는 데에도 겨울인 12월, 1월이 충분히 남아있다.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는데 왜 지난주부터 정한이 계속 오매불망 k작가의 작품을 기다리는지 승관은 궁금했다.
“형, 근데 왜 벌써부터 작가님 대본을 기다리는 거야? 겨울에 찍는 거면 11월 즈음에 나올 거 같은데? 그 작가님 원래 촬영하기 한 달 전에 대본 주잖아. 아닌가?”
승관의 말을 들은 정한은 슬픈 짝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했다.
“<사계절>의 첫사랑은 겨울이야.”
“응?”
“첫 시리즈에 나타난, 첫사랑의 배경이 겨울이라고. 거기서 겨울의 사랑을 홍지수 혼자서 연기했어. 상대방 없이. 그 후에 봄, 여름도 계속해서 홍지수가 상대 배우 없이 혼자서 사랑을 연기했고. 근데 이번에 작가님이 마지막 시리즈인, 끝 사랑을 연기해야 하는 가을에서 홍지수 상대 배우를 뽑는다고 하셨어.”
“가을? 지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중인데?”
“그래 가을. 그래서 내가 계속 요즘에 대본 기다렸던 거야.”
“형!!! 내가 가져온 대본 중에서 빨리 찾자!!!!”
그 많고 많던 대본 중에서 정한은 단번에 사계절 대본을 찾아냈다. 마치 작가가 주인공을 정하고 대본을 쓴 듯, 대본이 저절로 정한의 손에 빨려간 듯했다.
“우와 형!!!!!!!!!!!!”
“승관아 당장 작품 하겠다고 작가님한테 연락해!!!!!!!!”
8월 중순 즈음에,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지만, 여름 냄새가 더 솔솔 풍기는 이 맘 때에 드디어 정한은 k와 작품을 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k작품에 항상 출연하는 홍지수와 연기를 하게 되었다.
-
사계절의 끝 사랑인 가을에서 지수 상대역으로 출연하겠다는 확인 전화를 작가님 쪽에 보낸 후, 정한과 승관을 서로 껴안고 울고 난리가 났다. 정한은 인생 목표 하나가 완벽하게 채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승관은 정한이 10년 동안 얼마나 k작가의 작품을 하고 싶었는지 알고, 완벽한 연기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드디어 정한이 그토록 원하던 작품을 하게 되니 항상 옆에서 지켜본 승관이 입장에선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형 정말 정말 축하해. 이제 드디어 홍지수 배우님한테 고백하는 건가?!”
“어???? 너 그게 뭔 소리야.”
엥.
정한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정한에게 저 말을 한 건 승관인데, 뒤통수를 승관이한테 얻어맞은 게 아니라 10년 동안 사계절을 봐 온,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에이 형~ 모른 척 안 해도 괜찮아. 내가 형을 10년 동안 봤는데, 이제 좀 솔직해져 봐. 10년 동안 한 사람만 좋아하는 거, 그거 엄청 힘들다~. 이번엔 말도 걸고 촬영하면서 좀 친해져봐.”
마치 정한의 마음 깊숙이 있던 오래된 자아가 정한에 말을 건 듯, 말 한마디 한마디가 뼈를 쿡쿡 찔렀다.
“부승관,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홍지수를 좋아한다고? 사계절에 나오는 그 배우 홍지수를?”
“응!”
왜 놀라냐는 듯, 승관은 너무 나도 태연했다.
“나 홍지수 안 좋아해.”
그와 달리 동공 지진 일어나면서 말하는 윤정한.
그리고 오랜만에 나왔다. 승관이 어이없을 때 나오는 시그니처 표정.
“형이? 형이? 형이 안 좋아한다고? 홍지수 배우님을? 형, 홍지수 배우님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아주 순수하게 그 사람의 감정을 배우고 싶은 거야. 난 홍지수가 좋은 게 아니라 사계절 겨울부터 쌓아온, 홍지수가 연기하는 그 감정의 연대기가 좋은 거야. 그래서 오랫동안 같이 작품 하고 싶어 한 거고.”
분명 정한은 승관이한테 말(이라 하고 변명이라 읽는다)을 하고 있는데, 정한은 오래된 자아한테 변명을 하는 듯 당황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거짓말. 그런 사람이 10년 동안 사계절 촬영장 가고 싶다고 매일 편지 쓰고 디엠 보내고 그러냐?! 형 이건 사랑이야. 좋아하는 거라고.”
승관의 계속되는 ‘윤정한 홍지수 짝사랑 설’에 정한은 부정하고 변명하던 오래된 자아를 온전하게 꺼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정한을 머리부터 삼키면서 정한의 얼굴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아 그래서 형은 백퍼 홍 배우님 좋아하..”
“...”
“...? 형?”
“어, 승관아.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갈게.”
“어어 알겠어. 얼른 쉬어.”
승관은 대화를 끊고 들어가는 정한의 표정에 놀랐다. 저 표정은 연기가 잘 안될 때 나오던 표정인데, 윤정한이 갑자기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승관은 정한이 지금 감정 제어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정한을 쉬게 냅뒀다. 감정 제어 안 되는 윤정한은 데뷔 이후로 거의 처음이라 승관도 걱정됐다.
“근데 승관아, 너 작가님 전화번호 받았어?”
“아니. 작가님한테 연락 못 하고 담당하시는 분한테 연락했지. 작가님 원래 모든 게 비공개 시잖아.”
“하긴.. 알겠어. 너도 얼른 자.”
정한은 평소보다 빨리 잠을 청했다. 빨리 이 감정을 지우고 싶어서, 또 귀에 맴도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꿈속에서도 승관이의 말이 계속 정한의 머릿속을 파헤쳐 다녔다.
‘형 홍지수 배우님 좋아하잖아.’
‘형 홍지수 배우님 좋아하잖아.’
‘형 홍지수 배우님 좋아하잖아.’
‘형 홍지수 배우님 좋아하잖아.’
‘형 홍지수 배우님 좋아하잖아.’
.
.
.
.
…
그리고 일어나서 정신 차리기 직전까지도 정한의 표정은 어제 승관이 본 표정과 같았다.
윤정한은 지금 자기감정을 인지하지 못한 풋풋한 청소년, 즉, 지수를 처음 보고, 사계절을 처음 봤던 17살로 돌아간 듯했다. 자기감정 하나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하루의 반을 홍지수 생각으로 날렸으니, 계속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도 그럴만한 게, 정한은 지금까지 홍지수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했다. 정한이 배우에게 관심 갖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연기니까. 연기 아니면 배우로서 상대방에게 관심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정한이다. 연기라는 틀에서 더 넘어가 그 감정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한 사람이 홍지수이니 정한에게 있어서 지수는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은, 아주 이례적인 예외이다. 그것도 10년 동안 가슴에 달고 산,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절절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이다.
지금 윤정한이 혼란스러운 이유와 알 수 없는 감정을 계속 느끼는 이유가 모두 홍지수인 걸 정한은 끝내 인정했다.
사랑이란 감정 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로맨스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정한은 항상 작품을 위해서, 작품과 관련된 사랑에 몰입했고, 그 위대한 로맨스를 연기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지금까지 어떤 작품이든 ‘내가 이 작품에 몰입해서 상대방을 좋아한다.’라는 감정을 정한은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승관이의 말이 정한의 머릿속에서 더 맴돌았다 보다.
‘좋아한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좋아한다’라고 의심이 가게 만드는 이 감정을 홍지수한테서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정한은 10년 동안 지수의 연기를 보면서 느꼈다. 그리고 형용할 수 없었던 가슴 아린 감정이 오랫동안 정한의 마음속에 있었고, 마침내 ‘좋아한다’라는 단어 하나로 정의된 것이다.
-
‘내가 진짜 홍지수를 좋아하나?’라고 생각이 든 날 이후 정한은 고장이 났다. 정한의 하루 루틴은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기, 개인 스케줄, 그리고 남는 시간에 사계절 돌려보기.
그렇다. 사계절을 볼 때마다 나오는 지수의 사랑 연기에 정한은 고장이 단단히 났다.
‘곧 있으면 미팅인데.. 나 얼른 정신 차리고 연기 준비랑 미팅 준비해야 하는데..’
결국 미팅 날까지 정한은 일명 ‘나 홍지수 좋아하는 거 아니야? 맞는 거 같아. 아니야. 안 좋아해. 아니야 좋아하나 봐. 아니야 안 좋아해.’를 반복하는 병에 걸려버렸다. 연기 분석은 무슨, 정한은 다시 루틴으로 돌아와서 여느 때처럼 사계절을 봤고, 지수 연기로 가슴이 아려왔다.
“형 진짜 진짜 잘 하자. 제일 떨리는 건 형일 거 같은데 왜 내가 더 떨리지?!?! 긴장하지 말고 잘 하고 와! 배우들만 들어간다고 해서 난 못 들어 가니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또 말해!”
드디어 미팅이 시작했고, 정한이 [Falling For U]라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
홍지수와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방 안은 정한이 가을을 생각하면서 느꼈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습하지만 곧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기분 좋게 머리를 감싸면서 끝은 쌀쌀하게 마무리를 짓는, 다시 더운 공기로 돌아오는 그런 바람.
늦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여름과 가을이 섞인 바람과 함께 정한의 맞은 편에는 사계절의 주연, 홍지수가 앉아 있었다.
“정한씨, 안녕하세요.”
정한은 지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아챘다.
10년 전, k작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계절의 겨울을 소개하면서 보이스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꼭 k작가의 작품에 참여하고 싶었던 정한이기에, 정한은 k작가의 하나뿐인 인터뷰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사계절을 보기 전, 항상 인터뷰를 보기 때문에 거의 매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정한은 지수의 연기를 본 만큼이나 k의 인터뷰를 들었다.
그렇기에 정한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k구나.
정한은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홍지수가 작가겠어? 하지만 자리에 앉아 지수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의심은 확신이 됐다.
‘내 앞에 있는 홍지수가 사계절의 작가, k이다.’
정한은 얼굴이 다홍빛으로 빨개졌다. 애써 진정시켰던 감정이 다시 올라왔다.
정한이 그렇게 홍지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부정한 이유도, 10년 동안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생각한 이유도 모두, k 때문인데.
10년 전부터 정한은 사계절의 가을 연기를 위해 좋아한다는 감정을 연기하면서 (물론 느낀 적도 없지만,) 항상 그 어떤 작품에서도 연기’만’했다. 정한은 사랑 안에 녹아있는 좋아함을 사랑 안에서 표현하기엔 얕은 감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연히 ‘사랑해’보다 ‘좋아해’가 작은 감정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한은 지금까지 연기를 하면서 실제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그 감정을 며칠 전에 홍지수를 생각하며 느꼈고, 아니 10년 전부터 느낀 것 같고. 그런데 작품을 위해 혼란스럽지만 애써 억누른 이 감정을 부정한 원인이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니.
정한은 머릿속이 마치 사계절의 첫사랑인 겨울에 나오는 첫 장면처럼, 지수가 홀로 서있는 눈 밭과 같이 하얗게 변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새하얀 정한의 머릿속 안에 지수의 해맑은 눈꼬리가 나타났다. 정한이 지수를 보고 처음 이 감정을 느꼈던 그때 그 장면처럼 말이다.
“정한씨, 괜찮으세요? 얼굴이 많이 빨개요.”
“네.. 네? 아, 더워서 그런가 봐요. 하시려던 말씀 계속해 주세요.”
수백 번, 수천 번 들은 지수의 청아한 목소리가 정한의 귀에 감긴다.
“사계절의 가을 확실히 참여하시는 거 맞으시죠?”
“당연하죠. 단역이라도 꼭 출연하고 싶었는데, 지수씨의 상대 배우로 지수씨와 같이 감정선을 연기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아, 이번에는 저는 출연하지 않아요.”
“네?”
망했다. 진짜 망했다. 홍지수랑 연기하려고 왔더니 홍지수가 연기를 안 하고 작품에서 하차를 하겠대.
“저기 지수씨, 다시 생각해 보시면 안 될까요? 제가.. 제가 정말 지수씨랑 연기하고 싶어 한 거 지수씨도 아시잖아요. 제가 촬영장도 가고 싶다고 문자 보내고 항상 그랬던 거 아시..”
당황한 정한의 손을 잡으며 지수는 정한에게 말을 건넸다.
“정한씨, 원래부터 가을은 정한씨를 위해 만든 작품인걸요. 제가 겨울, 봄, 여름에서 연기했던 것처럼 연기해 주시기를 원해요.”
“네?”
겨울의 꽃이 웃으며 가을의 꽃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윤정한 배우님. 사계절의 작가 k, 홍지수입니다.”
정한의 확신이 현실로 다가왔다.
‘나의 부정이 나의 감정으로 가을바람처럼 되돌아왔구나.’
.
첫 미팅이 끝나고 정한은 처음으로 하루 루틴을 깼다.
‘사계절 보지 않기’
예상한 일이고 k작가 정체에 대해서 확신도 섰지만 지수가 k라는 말을 당사자한테 직접 들으니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정한은 하루 종일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를 위해 가을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왜 지금까지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출연하지 않고 나만 나오게 하는 건지. 정한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왜 자신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또, 그 대단한 연기 실력을 가지고 더 대단한 각본을 쓰고 있었으니, 정한은 지수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참 아이러니하다. 좋아하는 거 같은데 좋아한다고 인정하기 싫고, 더 알아가고 싶은데 알아가기 싫고.”
“알면 알수록 여러 감정을 느끼기에 다가가지 못하는 거겠지.”
정한은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진짜 사랑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녹아 있네.”
“좋아한다는 감정이 얕은 감정이 아니었어. 사랑 안에 있는 그 감정 자체만으로도 큰 존재인데.”
정한이 10년 전부터 쌓아온, 소중한 감정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수는 나에게 사랑이구나.
매 순간 나한테 그 감정을 알려줬어.
-
한 달 동안 가졌던 수많은 미팅과 영화 홍보 영상 촬영을 마치고, 어느새 영화 촬영 날이 다가왔다.
“정한아,”
한 달 사이 말도 트고 금세 친해진 정한과 지수이다. 사실 정한은 10년 전부터 일방적으로 지수에게 말을 놓긴 했다. 지수를 생각할 때, 존대를 하며 감정을 느끼는 건, 정말 이루어질 수 없는, 멀고 먼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그렇다. 슬픈 사랑을 느끼는 건 너무 힘드니까.
정한과 지수는 배우와 작가의 관계로 영화를 찍는 것이지만, 정한은 지수를 상대 배우라고 생각하고 촬영하기로 했다.
‘내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오로지 지수 너야. 그래서 난 너를 생각하면서 연기할 거야.’
자신을 위해 이 작품을 만든 k작가, 홍지수를 위해서 정한은 오늘부터 영화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모든 힘을 쏟아부어 사랑을 연기할 계획이었다.
“정한아, 대본 가져왔어?”
“아니. 네가 현장에서 준다며.”
“응, 내가 태워버렸어 ㅎㅎ”
응?
대본이 없으면 촬영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지수는 갑자기 정한에게 와서, 대본 없는 연기를 찍자 했다. 옆에 있는 스탶들은 당연하다는 듯 놀라는 기색도 없고, 정한만 빼고 모두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정한아,”
“지수야,”
당황하는 정한의 손을 잡고 지수는 촬영장 밖으로 달려나간다.
늦여름 바람을 맞으면서 정한과 지수가 뛰어간 곳은 사계절의 겨울 첫 장면인 새하얀 눈밭을 찍었던 큰 공원이었다.
“정한아, 이제 촬영하자.”
“응?”
“각본 없이, 네가 느끼는 감정을 화면에 담아줘.”
아,
나를 위한 영화.
정한은 지수가 만든 이 영화의 진짜 의미를 알아냈다.
윤정한과 홍지수의 끝 사랑 연대기.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니까, 또 나의 계절이니까. 각자 가지고 있던 감정들을 이 영화에 쏟아부어 영화를 완성할 것이다.
서로를 처음 만난 겨울에서 우린 다시 만나서 가을로 넘어가야 하니까.
-
모든 게 홍지수가 10년 동안 쌓아왔던 사계절이다.
지수는 정말 정한을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각본이 없는, 윤정한이 느끼는 이 감정을 화면에 담아내는, 만들어내지 않고, 정의되지 않은,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정한이 지수를 생각하는 감정을 이미 지수도 느끼고 있었다.
10년 전 겨울의 첫 장면, 새하얀 눈 밭에서 웃으면서 촬영하고 있던 지수의 맞은편에는 마침 똑같은 장소에서 다른 영화 촬영을 끝낸 정한이 지나갔다. 정한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때를 지수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수는 그저 작가이자 배우로서 활동을 하며 배우 인생을 마무리 짓고 싶었을 뿐인데, 지수도 모르게 작가 겸 배우로 활동한 사실이 정한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이끌었다.
정한을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을 화면에 담아내는 지수를 보면서 정한은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았고, 정한과 지수는 10년 동안 그 감정을 서로로 채웠을 것이다.
10년이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서로 채워진 마음을 확인한 정한과 지수는 이제 둘만의 영화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지수의 감정으로 30분이 채워진 3편의 영화가, 이젠 정한과 지수의 일상을 통해 정한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담은 사계절의 가을로, 3시간의 분량으로 만들어졌다.
무려 2년에 걸친, 더 다양하고 풍부한 정한과 지수의 사랑으로 채워진 사계절의 가을은 개봉과 동시에 로맨스 장르의 꽃이라 불리며 배우 윤정한을 가장 높은 자리에, 작가 k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주었다.
“사랑이란 감정 안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번 작품을 찍을 때마다 관객분들이 제 연기를 보시고 전 작품들과는 다른 감정을 표현한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시고요. 가을에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가을을 보실 때 제 감정이 전달되었기를 바라요. 앞으로도 더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가을의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고 예정대로 홍지수는 은퇴했다. 마지막 엔딩 장면에 정한과 손잡고 가을 거리를 걷는 모습을 끝으로 홍 배우는 작품 출연을 마쳤다.
그리고 윤정한은 계속해서 홍지수와 연기했다. 계속해서 만들어갈 둘만의 이야기로 작가 k, 홍지수와 사랑을 써 내려갔다.
- 가을의 꽃과 겨울의 꽃이 만난다는 건 정말 기쁜일이야.

안녕하세요!! 이번 윤홍 합작 aufgeblüht [개화]에 참여해서 정말 영광입니다 ㅜㅜ. 처음 참여하는 합작이라 더 떨리고 두근두근하네요 ㅎㅎ. 먼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윤홍을 많은 윤홍러 분들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해요^0^
저는 합작 주제인 개화를 꽃이 피는 사전적 의미로 생각하면서 글을 썼어요.(읽으실 때 주제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생각이 드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ㅜ^ㅜ)
영화나 드라마의 꽃은 그 작품을 빛내는 배우들이잖아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한과 지수를 꽃인 배우로 설정했습니다. 작품 안에서 자칭, 타칭 꽃으로 불리는 두 사람!!
윤 배우는 10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계절의 가을에 출연하고 가을의 꽃이라 생각을 했고, 홍 배우는 12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계절의 겨울에 가장 먼저 출연하고 겨울의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계절은 배우의 목소리를 담지 않고 오로지 표정과 몸짓으로만 연기한다는 가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합작 열어주신 주최자님, 그리고 합작 참여하신 모든 분들, 합작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그리고 윤홍러분들! 정말 모두 모두 다 감사합니다! 윤홍 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