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재주의
구룡성채(九龙寨城). 제2차 아편전쟁 이후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간 뒤에도 청나라의 영토로 남게 되면서 치외법권이 된 홍콩의 슬럼가. 빽빽한 건물 밑으로는 성매매, 도박, 무허가 병원을 비롯한 모든 위법적인 일들이 이루어지는 지옥.
누군가는 마계촌에서 자라난다.
신 世界로부터
사월 씀
오랜만에 구룡성으로의 의뢰였다. 타깃의 신상이 적힌 파일을 받아드는 어깨가 굳어있었다. 언제 살인이 일어나도 아무렇지 않은 죄악의 도시는 말단이 아닌 이상 갈 일이 도통 없는 곳이었다. 삼합회 홍콩계 조직 신의안(新義安)의 현 보스, 문준휘(文俊辉)의 인장 음각이 뚜렷하게 찍혀있는 문서를 바라본 조슈아가 한숨을 지었다. 채 다 마르지 못한 잉크가 손에 묻어나왔다. 간부급 인사가 성채로 청부살인을 나가는 것에 담긴 의미는 뚜렷했다. 신생 조직의 말살.
근래의 삼합회는 유독 살인에 목을 맸다. 매일 백 명 이상의 중국인이 죽어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분노를 품었고, 복수를 꿈꾸는 이들이 하나둘 뭉치기 시작했다. 구룡성채로 향한 이들 대부분은 신 시티(Sin city)의 법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멸했으나, 간혹 몸집을 불려 나가는 경우 역시 존재했다. 신의안에 위협이 되는 자들은 뿌리부터 없앤다. 설립 초기부터 이어온 행동 강령에 의해 신의안을 비롯한 삼합회를 증오하는 세력을 처리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체제가 확실히 잡히지 않은 조직은 머리만 죽여도 금세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제 막 둥지를 틀기 시작한 새들의 어미를 죽이는 일이 조슈아가 해야 할 일이었다.
구룡성채 안은 어딘가 이세계 같았다. 탁하게 가라앉은 공기에는 마약 냄새와 함께,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저지르지 않은 범죄의 수를 세는 게 빠를 정도로, 신의안에 있으며 여러 번의 밑바닥을 경험한 주제에 마약만큼은 손대지 않은 조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을 흩뜨리게 만드는 약물은 최악이었다. 눈앞이 흐려지면 급소를 한 번에 노리기 어려웠다. 삼합회 내에서도 손꼽히는 신의안의 최고 나이퍼인 조슈아는 그럼에도 구룡성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죽여야만 하는 곳에서 자라난 이들은 살기를 알아채는 촉이 좋았다. 자칫했다가는 역으로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조슈아가 재킷 안쪽의 잭나이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화승화(和勝和)의 무기상 오른쪽에 위치한 술집으로부터 100m. 타깃의 현 위치를 보고받은 조슈아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름도 만들어지지 않은 조직의 보스는 태평하게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칼은 정확하게 급소를 찔렀다. 익숙하게 손목을 꺾어낸 조슈아가 둔탁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체를 보고서야 칼을 빼내었다. 솟구친 피를 닦아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비싼 셔츠였는데."
버리게 생겼네.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조슈아는 나이프가 자리했던 상처를 한 번 지그시 밟곤,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어느새 담뱃갑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익숙해졌다 한들 사람을 죽이는 감각은 썩 유쾌한 것이 못 되었다. 칼이 살을 파고들 때 느껴지는 감각은 언제나 더러웠다. 빼앗은 메비우스 한 개비를 꺼낸 조슈아가 연초에 불을 붙였다. 담배는 마약을 하지 않는 조슈아의 차선책이었다. 범죄에 눈이 멀었다 해도 살인을 하는 데 맨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담배 연기가 잠시 시야를 가려 줄 때면 그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 느낌을 받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조슈아는 제가 믿는 신에게 기도했다. 언젠가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썩은 시체가 굴러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다 닳은 연초를 바닥에 비벼 끌 때 즈음이었다. 골목에서 작은 신음과 함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있어선 안 될 소음이었다. 조슈아는 조직 내에서도 얼굴을 아는 자가 드물 정도로, 그의 신상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된 인물이었다. 내부 인물이 아닌 이상 조슈아의 얼굴을 본 이 중에 아직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만약 살인 현장을 목격했다면 예외 없이 죽여야 했다.
사살을 목적으로 향한 곳에는 이제 겨우 열일곱이나 될까 한 어린 소년이 앉아있었다. 몸에는 힘이 풀린 채, 뺨에 동그랗게 홍조가 올라 있는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손목 조금 아래, 바늘 자국이 아직 아물지 못해 피가 고여있는 모양새를 유심히 보던 조슈아가 주위를 살폈다. 소년의 주위에 깨진 주사기 몇 개가 널브러져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확신한 그는 다시 한번 소년의 얼굴을 확인했다. 확장된 동공이 여전히 약에 취해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가 확실했다. 심각한 환각에 시달리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얌전한 게 제법 흥미를 끌었다. 사실 이런 약쟁이가 여태 멀쩡하게 구룡성채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전제라, 조슈아의 눈에는 이미 묘한 기대가 스친 뒤였다. 내일까지도 멀쩡히 숨이 붙어 있다면, 신의안의 개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조슈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지옥에서도 가려지지 않던 잘난 얼굴을 내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오션터미널 데크에서 페리를 타고 몇 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홍콩 섬. 페리 항에서 30분 정도를 달리면 홍콩 최대의 부촌으로 꼽히는 리펄스 베이를 마주할 수 있다. 조슈아는 그 안에서도 최고급 거주지로 손꼽히는 리펄스 베이 맨션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까다로운 보안 절차를 거친 그는 곧바로 최상층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낯익은 공간에 들어서자 곧바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진열장에 놓여있던 발렌타인을 꺼내 잔에 따르던 조슈아의 뒤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지 않게 30년이야, 웬일로."
"오늘은 네 취향 술이 마시고 싶어서."
"거기서 거기 아닌가? 조슈아도 발렌타인 좋아하잖아."
"30년 산이랑 파이니스트는 다르지."
"흠… 난 잘 모르겠던데."
얼음 깎아뒀는데. 줄까? 언더락이 취향이잖아. 세심한 질문이었다. 보스나 되는 이가 어린 간부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조슈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의 집에 들어선 직후부터 그들에게 조직에서의 역할은 무의미했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서로의 이름 앞에 붙은 꼬리표를 떼기로 한 암묵적 규칙이 둘 사이에 존재하기 시작한 뒤 적지 않은 세월이 있었으므로. 태생이 다른 둘이었지만, 의지할 수 있던 건 서로가 유일했기에 형성된 유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슈아는 종종, 준의 이런 면 때문에 그에게 신의안을 이끌 리더쉽은 충분했지만, '신의안'이 되기에 그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평을 내리곤 했다. 냉철하고 강인해지기엔 그는 정이 턱없이 많았다. 얼음이 잔에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그 인간 처리는 잘 했어?"
"너무 쉽던데. 반항 한 번 못하고 죽는 꼴이 우스울 정도로."
"역시 미카 답네. 깔끔한 일 처리. 이래서 아버지도 널 예뻐하셨나 봐."
미카라는 단어에 조슈아의 눈이 흔들렸다. 미카엘. 신의안에 들어오며 부여받은 그의 새 이름. 흔치 않은 조슈아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문준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설마, 아직도 네 신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있는 건가. 독하게 내뱉은 준휘의 말에 조슈아의 손에 들려있던 컵이 산산조각 났다. 고가의 잔이었으나 깨진 컵에 신경을 쏟는 이는 없었다. 손을 타고 흐르는 피를 옷자락에 대충 닦아낸 조슈아가 펜트하우스를 나섰다. 준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의 흔적을 쫓았다.
준휘는 늘 조슈아를 깨뜨리고 싶었다. 해진 동아줄을 겨우 붙잡고 있는 어느 설화의 주인공처럼, 존재하지 않는 신을 찾아 회개하곤 하는 그의 죄책을. 이미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사는 그가 안타까워서였다. 조슈아는 모르는 조슈아의 과거. 자신조차 지운 아득한 세월의 일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준은 조슈아가 제 신(神)을 버리고 신(Sin)을 택하기를 바랐다. 몇 년이 지나도록 귀에서 십자가 피어싱을 빼지 않는 조슈아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랬다. 카펫에 떨어진 그의 핏자국이 꼭 상처 입은 천사의 흔적 같았다. 조슈아가 신을 버릴 수 없다면,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새로운 신이 나타나기를. 그의 윗사람으로서가 아닌 오랜 친구로서의 염원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조슈아는 다시 페리를 탔다. 엉성하게 붕대를 두른 왼손에는 피가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에는 여전히 그 소년이 앉아있었다. 안광이 조금 돌아온 걸로 보아 다시 주사를 하지는 않은 듯했다. 눈을 맞춰온 건 소년 쪽이었다. 탁한 눈동자는 상대를 온전히 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조슈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같이 갈래?"
조슈아는 제 앞의 소년이 필요로 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다. 모든 부연을 덜어내 깔끔하게 떨어지는 어절은 그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약 기운 때문에 아직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 휘청이는 소년을 조슈아가 부축했다. 비쩍 말라 그대로 느껴지는 뼈대가 굵었다.
"몇 살?"
"……그쪽은요."
"조슈아. 스물아홉."
"아저씨네요."
"넌?"
"화 안 내요? 엄청 젊어 보이는데."
"네 마음대로 부르는 거지. 물어본 거에나 답해."
"윤정한이에요. 스무 살."
어리네. 한국인이야? 이어지는 물음에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도착한 항구의 선착장 위.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조슈아는 제 연민을 떨쳐내려 애써야 했다. 얼핏 봐도 성채 안에서 하루 이틀 구른 애는 아니었다. 적어도 삼 년이었다. LSD 중독에 빠진 채 그 안에서 꼬박 하루를 살아남을 정도라면. 스무 살도 안 된 타국의 아이가 구룡성채 안에 홀로 남겨질 경우의 수는 많지 않다. 삼합회가 관리하는 고아원에서 자랐거나, 부모가 아이를 고아원에조차 보내지 않았거나. 전자의 경우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삼합회 조직원이 되기 위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정한의 유년은 불 보듯 뻔했다. 이제는 아득해진 어린 날이 떠올랐다.
결국 조슈아는 윤정한을 동정했다. 그를 신의안의 사람으로 만들 수 없었다. 만약 비밀리에 바깥사람을 돕거나, 동지의 재물을 빼앗는 자에게는 천벌을 내려 목숨으로 죄를 갚는다. 삼합회 서약 13항. 입회 때부터 수도 없이 외웠던 맹세가 떠올랐다. 준에게 정한의 존재를 알리지 않을 경우, 그를 구해 준 사실이 발각되자마자 조슈아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당연히 정한까지도. 맨션 관리실의 시간표를 되뇌어 본 조슈아는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30분 정도 조직 소속이 아닌 이가 임시 보초를 서는 시간이 있었다. 그 안에 정한을 리펄스 베이 맨션 입주자 명단에 포함시켜야 했다. 교대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단 20분. 페리는 이미 정박 중이었다. 홍콩의 직선 도로를 타고 달린다면 충분했다.
조슈아의 계획은 완벽했다. 빈방 하나를 정한에게 내준 조슈아가 겨우 한숨을 돌렸다. 맨션에 살고 있는 삼합회 사람은 준과 조슈아, 그리고 화승화의 보스가 다였다. 조직의 일을 제외하면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이었기에, 준이 갑자기 조슈아의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정한의 존재를 들킬 위험은 높지 않았다.
의외로 정한은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충동조절력이 크게 낮지 않다는 점에서 조슈아는 그가 중증 약물 중독이 아니라는 진단을 내렸다. 금단 현상에 관련해서는 더 지켜볼 필요가 있었지만, 정한을 일반의 범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늘 제 삶을 증오해 온 조슈아는 정한에게 평범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의 구원자가 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악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를 연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품어온 마음이었다. 조슈아는 어느새 정한에게 제 어린 날을 투영하고 있었다.
조슈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치료감호소 경력이 있는 의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홍콩 전역에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는 삼합회 세력을 제외한 치료사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포기해야 하나 싶을 무렵 찾아낸 의사는 기대보다 유능했다. 정한의 재활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중독 증세가 심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지만, 사실 조슈아의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슈아는 미쳐가는 조직원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이들 중 하나였다. 정신을 놓고 제 목숨줄을 끊는 조직원을 목격한 날, 그는 정한의 손을 부여잡고 울었다. 다 좋으니까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갈 생각만 말아 달라고. 다른 무엇을 해도 좋으니 구룡성채에 어떤 미련도 다 버려달라고. 유려하게 휘어진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며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환자의 의지가 충족된 상황에서 전문 재활사의 치료는 정한의 회복에 박차를 했다. 그렇게 단 두 달. 정한은 마약사범으로서는 흔하지 않은 완치 판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날, 조슈아는 처음으로 정한 앞에서 웃어 보였다.
함께하는 일상이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신의안 내에서 도박을 일삼은 무리가 발각됐다. 조직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입회 후 부모형제 및 6촌 4대까지 일체 사적인 도박을 금한다. 명백한 서약 위반이었고, 조슈아는 레드 폴(Red pole, 훈련 · 전투 지휘 간부. 紅棍)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했다. 처형장에 들어설 때까지도 조슈아는 준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분노와 동시에 슬픔이 점칠 된 얼굴. 제아무리 삼합회 차기 총 회장이라 한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 온 규율을 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직원 몇만 명을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들 하나하나에 애정을 품고 살던 이였다. 흑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그의 성정으로 다진 믿음이 지금의 신의안 보스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조슈아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감정은 쉽게 전이되는 것이라, 조슈아 역시 어느새 문준휘와 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이마를 한번 쓸어낸 조슈아가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흔들려선 안 됐다. 반투명한 처형장 유리 너머 아끼던 얼굴이 몇 보였다. 망설였다간 저들보다 먼저 제 머리에 총알이 박힌다. 마음을 다잡았다. 조슈아의 장검이 빠르게 나부꼈다. 휘날리는 핏방울이 어느 신화 속 꽃을 떠올리게 했다.
새벽 네 시가 넘어갈 때까지 조슈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목을 벴던 이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삼합회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규율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처분이었으나, 그래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스치듯 마주한 눈에 서려 있던 공포. 수십 개의 눈동자가 꿈속까지 따라올 것만 같았다. 결국 조슈아는 몸을 일으켰다. 술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어김없이 꺼내든 발렌타인 파이니스트를 잔에 따랐다. 동그란 얼음에 부딪히며 흐르는 소리가 맑았다. 숙성 기간이 짧은 위스키를 고집하는 것은 조슈아의 오랜 취향이었다. 오크 향이 짙지 않은 술의 맛은 그의 우울을 달래주기 적합했다. 냉동 살라미를 곁들여 먹던 조슈아의 뒤로 소음이 들렸다. 방문을 여닫던 소리가 소음의 주인공이 정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잔을 두어 번 디켄딩 하던 조슈아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술 마실래?"
"저 술 안 마셔 봤는데."
"마약도 해 본 애가 술은 안 해봤어?"
"구할 돈이 없어서요. 사실 저 아저씨 본 날 마약 거의 처음 해 본 거였어요."
다 같은 처지인 주제에, 유독 나를 꺼리더라고요. 발음이 구려서 그런가. 그런 놈이 마약 구할 돈이 어딨겠어요. 두 세 번 해 본 마약도 그냥 바닥에 굴러다니는 거 호기심에 해 본 거예요. 뭐, 생각보다 세서 미치광이처럼 살게 됐지만.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 정한은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틈새로 새어 나오는 미묘한 감정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조슈아는 말 끝에 스며있는 우울을 읽어냈다. 그가 건네는 잔을 군말 없이 받아 든 정한이 반쯤 남아있던 위스키를 한 번에 들이켰다.
"확실히 내가 어리긴 한가 봐요. 맛없다."
"술이 맛으로 먹는 건 아니니까."
"왜요. 굴러다니는 신문 같은 거 읽으니까 이런 술은 최상의 맛이라면서 광고하던데."
"순진하네. 신문을 다 믿고."
"보고 자란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술을 더 따라 달라는 제스처를 해 보이는 모양새가 제법 귀여웠다. 정한의 얼굴에는 어느새 구룡성의 흔적이 사라져 있었다. 스무 살 언저리의 순수하고 밝은 기운. 얼마 전 쥐여준 카드로 곱게 물들이고 온 금발이 어깨선에서 찰랑였다. 제 머리칼을 닮은 황금빛 액체가 잔에 가득 채워지는 모양새를, 정한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한국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가끔 의외의 질문을 할 때가 있는 정한이었다. 그의 물음은 보통 시작점조차 예측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슈아는 정한과 대화할 때 종종 한국어를 쓰곤 했다. 한때 한국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조슈아의 서재에 꽂혀 있던 것을 정한이 발견한 뒤부터였다. 광둥어를 할 수 있기 전부터 구사할 수 있던 영어와 한국어. 준으로부터 캘리포니아 한인타운 뒷골목에 버려져 있던 저를 주워 키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할 줄 알았어. 나 한인들 사이에서 키워졌을 거야 아마."
"그럼 한국 이름 같은 건 없어요? 보통 미들네임으로라도 짓지 않나."
"응. 태어났을 때부터 버릴 생각이었나 봐, 정 없이 퍼스트네임만 대충 지어준 걸 보면."
"……."
"뭐 그럴 사정이 있었겠지. 기억도 안 나는 부모에게 미련 없어. 괜찮아."
괜히 가라앉는 듯한 분위기에 조슈아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의 그였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부분이었으나, 앞에 있는 상대가 정한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랬다. 그럼에도 정한의 눈동자에 스민 깊이는 변할 줄을 몰라서, 조슈아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렸다. 따뜻한 살결이 닿아오는 감촉이 좋아 정한은 눈을 감았다. 다정이 실린 손길이 느껴졌다. 정한이 시선을 맞춰온 건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였다.
"……있잖아요, 만약에."
"응."
"내가 아저씨한테 이름을 주면 싫어할 거예요?"
"응?"
"아저씨 한국 이름 내가 지어주고 싶어요. 나 구해준 보답이랄까. 그래도 돼요?"
목이 멨다. 아끼던 이들의 죽음을 지켜볼 때와는 다른,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뜨거운 것이 명치께를 짓눌렀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조슈아를 바라보던 정한이 환히 웃었다.
서툰 한자가 적힌 쪽지가 조슈아의 서재에 놓여있던 건 언젠가의 새벽으로부터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實粹. 순수에 이르다는 뜻이에요. 서툴게 쓰인 한자를 조슈아의 엄지가 쓸고 지나갔다. 조슈아 지수 홍.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정한이 고심해서 지었을 이름을 속으로 두어 번 굴리던 조슈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이름 밑에 쓰인 당돌한 추신 또한 마음에 들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조슈아였다. 평범을 꿈꿨던 시절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좌절된 과거를 이고 살아가는 것은 저 하나로 족했다. 조슈아는 망설임 없이 차를 몰았다. SOLO STRINGS. 중국 내에서 현악기의 완성도가 가장 높은 곳. 처음으로 무언가를 시작해보려는 정한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홍콩 악기 상가는 대부분 뮤직 스쿨도 함께 운영했다. 리펄스 베이에서 레슨실까지는 버스로 20분 정도가 걸렸다. 조슈아는 정한을 아이 보듯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한의 첫 수업 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차까지 버려두고 함께 버스에 올라타 수시로 정류장을 확인하는 그를 보며 정한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저씨, 나 어린 애 아닌데. 그제서야 멋쩍은 웃음을 짓는 조슈아였다.
"그러게. 너 어린 애 아닌데."
자꾸 신경이 쓰이네. 처음 버스를 타 보는 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였음에도 줄곧 걱정되는 건 정한이었다. 그를 매번 데려다줄 수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온갖 명품으로 치장한 젊은 남성을 건드릴 간 큰 이는 없을 터였지만, 고작 몇 달 전의 정한을 생각하면 여전히 심장이 저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일이라는 건 언제나 존재했으니. 바이올린 케이스를 맨 넓은 등이 보였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무언가가 조슈아를 짓눌렀다. 지금껏 정한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들은 늘 그를 죄책 속으로 빠뜨리게 했다. 작게 한숨을 쉰 조슈아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정한이 평생 알아선 안 될 것들. 작은 흔적마저 숨겨야 했다.
바이올린 선율이 적적하던 집을 가득 채웠다. 성인이 된 후에야 배우는 악기는 손이 굳어 진도가 빠르지 못할 것이라던 강사의 말은 정한에겐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최고급 악기는 초심자의 연주에도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그의 바이올린 실력은 좋은 울림과 함께 자랐다. 정한이 스즈키 1권을 완전히 떼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도가 낮은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자 정한은 연습량을 배로 늘렸다. 레슨 시수는 줄었지만, 그는 하루도 쉬는 법이 없었다. 지수가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듣곤 하던 비탈리의 샤콘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제가 켜는 샤콘느를 들으며 잠에 들기를 원했다. 지수는 항상 정한의 연주를 녹음해두곤 했는데, 그런 그의 행동이 정한의 야욕에 불을 지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슈아는 정한의 활이 현에 닿는 모양새를 구경했다. 잔뜩 굳은살이 박인 그의 손이 떠올랐다. 바이올린을 애정하는 정한의 흔적은 이미 곳곳에 퍼져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저런 모습을 하고 있구나. 희열에 찬 정한을 보는 조슈아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제 여분의 삶을 대신 살아내주고 있는 듯한 느낌. 행복도 전염성이 강한 감정이었던가. 처음으로 행복한 것 같다고, 조슈아는 생각했다.
정한의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아무 언질도 없이 늦을 아이는 아니라, 조슈아는 괜히 불안해지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한 게 벌써 며칠째였다. 혹시라도 다른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자신이 주었던 믿음이 부족했나 하는 자책이 밀려왔다. 부쩍 재떨이에 떨어지는 담배가 늘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금세 괜찮아질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 틈을 벌려낸 것은 조슈아의 서재에 있던 악기 케이스였다. 정한은 어렵지 않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잊고 있던 제 처지가 떠올랐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정한을 휘감았다. 지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그가 듣고 싶지 않아 할 이야기를 꺼내게 될 것만 같았다. 그의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꼭 주어진 운명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가 돼서야 겨우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났다. 막차를 타고 겨우 들어왔을 때, 조슈아의 손에는 위스키가 들려있었다.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만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 정한이 지수에게 다가갔다. 왜 이렇게 늦어. 인사도 전에 물어오는 목소리가 낮았다. 식탁 위에 놓인 발렌타인의 원인을 알아챈 그가 다급히 말을 꺼냈다. 레슨이 끝나고 악기 상가를 구경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정한의 변명은 그럴 듯했지만, 조슈아의 미간에 작게 주름이 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사람의 감정에 기민한 그였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눈을 맞추려는 지수를 정한은 애써 피했다.
"무슨 일 있어?"
"아뇨, 없어요."
"거짓말이잖아. 숨기지 말고 말해줘. 응?"
"……."
"제발……."
목소리 끝이 떨렸다. 수 달 전 제 손을 잡고 울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신을 구해준 이는 정한이 마주한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물에는 면역이 없었다. 투명한 유리잔 속에 담긴 황금빛 액체를 지수 대신 들이켰다. 몇 주 동안이나 쉽게 떼어지지 않던 입이 고작 술 한 잔에 모든 걸 토해냈다.
"사실 봤어요. 실수로 못 치운 거였겠지만."
"……무슨. 뭐를."
"서재에 있던 총이요. 악기 케이스에 담겨 있던데, 아저씨 거죠?"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가끔 이상했거든. 그냥 확신할 수 있었을 뿐이에요. 이어지는 정한의 말에 지수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정한은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이 숨기고 싶어 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피했던 거고."
"……."
"아저씨가 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날 구해준 게 아저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정한아."
"대신 총 쏘는 거 가르쳐 주세요."
"어?"
"위험한 일이잖아요. 나도 가르쳐줘요.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너무 세게 짓씹은 탓에 조슈아의 입술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로 입술을 괴롭히는 것은 그가 생각에 빠질 때면 나오는 오랜 습관이었다. 투명한 정한의 갈빛 눈동자에는 악이 없었다. 그의 손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생각만으로도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정한이 밖에 나갈 때마다 품어야 했던 불안감. 떨쳐지지 않던 공포심.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들은 그의 존재가 들통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서였다. 지수는 정한이 조직에 발각되었을 때를 가정하는 것만으로 이미 두려움이 몰려왔다. 신의안에서 취할 조치는 단 하나였다. 피살. 만약 그가 총을 다룰 수 있다면 적어도 저 자신은 똑바로 건사할 수 있을 터였다. 조슈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정한을 위한 일이었다. 마다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신의안의 눈을 피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홍콩 섬 남부로 조금 더 들어가면 보이는 군사기지 근처의 폐건물. 조슈아가 말단 조직원일 시절 홀로 연습하곤 했던 곳이었다. 준휘조차 알지 못하는 유일한 장소. 완공되기 전에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외벽은 살을 다 드러내고 있었고, 건물 내부는 콘크리트 칠이 되어있는 게 전부였다.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누구도 찾지 않았는지, 조슈아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집을 지은 입 없는 구경꾼들을 제외하면 차가운 회색 벽에 박힌 총알 자국 역시 여전히 선명했다. 수도 없이 쏘아 댄 덕에 한쪽 벽면은 빈틈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조슈아가 가진 능력의 출처였다.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만져보던 정한이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무언의 신호. 신호는 거절되지 못했다. 울림이 좋은 공간이 금속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선명히 드러냈다.
바이올린이 있어야 할 어깨에 소총이 자리했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조슈아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정한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럼에도 죄책감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정한은 자신의 삶에 대한 미련이었다. 절망으로 전락한 제 인생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것. 그런 존재를 무너뜨리고 싶을 리 없었다. 내가 널 망치지 않았으면 했는데. 자신의 불행이 정한을 삼킨 것만 같았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아주며 닿았던 피부의 온기가 손안에 감돌았다. 홀로 총을 잡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함이었다. 잃고 싶지 않은 감각에 주먹을 말아쥐었다.
정한은 총을 잘 다루었다. 습관적으로 틀어지는 자세에도 총알은 언제나 정확한 지점을 저격했다. 조슈아의 판단에 따르면, 정한의 실력은 신의안 소속 스나이퍼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가 총을 잡은 지 겨우 한 달. 어떤 뛰어난 저격수도 이 정도의 정확성을 보이지 못했다. 어렴풋이 드는 불안감을 지수는 애써 무시했다. 정한의 평범을 지키고 싶었다. 사실 자신의 평범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침사추이의 수많은 여행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무언의 위안. 보편에 속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 정한을 통해 그 무형의 것에 대한 확신을 받고 싶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귀가 예민해야 했다. 커다란 총성이 정한의 귀를 해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있다는 걸 지수가 눈치채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 안을 빈틈없이 메우던 현악기의 울림은 빈도를 점점 낮췄다. 어느 순간부터 집착으로 바뀐 제 여분의 생에 대한 미련. 한여름의 습기처럼 찐덕하게 달라붙는 정한의 평범에 대한 갈망은 조슈아를 집어삼켰다. 정한이 바이올린을 그만두게 되는 것은 지수에게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청력 보호구가 지켜주지 못하는 청력. 바이올린을 대신해 자리 잡은 소총. 그 끝이 너무나 선명했다. 조슈아는 더이상 섬의 끝자락으로 향하지 않았다. 애초에 정한에게 필요했던 것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사격술이었을 뿐이다. 그에게 총을 쥐여줄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바이올린 레슨 시수가 다시 늘었다. 일주일에 세 번. 다시 성실한 연주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언젠가 했던 다짐의 무게를 되새겼다. 잔뜩 풀어진 현의 조율을 다시 맞추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홀로 버스를 타는 정한의 코트 안주머니에는 작은 리볼버가 들어있었다. 정한이 총을 잡는 것에 대해 극도로 예민해 하던 지수가 직접 선물한 것이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망설임 없이 쏴. 그의 손에 총을 쥐여주며 유독 단호하게 말하던 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탄알. 리볼버의 무게가 정한을 짓눌러왔다.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지는 권총이 왠지 불길했다.
오늘따라 연습이 엉망이었다. 활과 현이 듣기 싫은 마찰음을 냈다. 악보엔 표기되어있지 않은 음들. 소리가 좋은 악기가 줄곧 거부하던 것이었다. 평소보다 좋지 않은 컨디션에 정한의 레슨은 일찍 파했다. 정한의 레슨실 앞에는 완탕면으로 유명한 가게가 하나 있었다. 늦지 않은 시간. 출근을 하지 않은 조슈아를 떠올린 정한이 문자를 남겼다. 수업 끝났어요. 오늘 같이 저녁 먹어요. 긍정의 답은 금세 돌아왔다. 차를 끌고 온다 했으니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을 터였다. 활 털이나 새로 갈까. 엉망이었던 오늘 연습의 핑계를 찾는 데 성공한 정한이 눈앞의 악기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하던 활이 새것처럼 바뀌었을 때, 타이밍 좋게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도착했다는 지수의 메시지였다.
완탕면은 두 사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거짓 소문이 났다며 툴툴대는 정한을 지수는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어린 태가 났다. 아직 다듬어지지 못한 십 대의 무언가가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모양새가 새삼 정한의 나이를 떠올리게 했다. 온전히 기쁜 시간이었다. 정한이 제 나이를 찾았을 때 지수는 그렇게 느꼈다.
"오랜만에 시간 좀 남는데, 좀 놀다 갈까?"
평범한 음식에도 지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떤 포인트가 지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정한은 짐작해내지 못했지만, 왠지 정한도 함께 즐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종일 있었던 불길한 일들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좋아요. 생각해 둔 거 있어요?“
"너 옷 좀 살까 하고. 백화점 안 간 지 오래되지 않았어?"
"사 줄 거예요?"
"웃기다. 너, 돈이 있기는 해?"
"없죠. 뭐, 아저씨가 사 줄 생각 없을 수도 있으니까."
"흐음, 아저씨라고 안 하면 생각해 볼게."
"뭐야. 처음엔 편한 대로 부르라면서."
"나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갑자기 억울해서.“
형이라고 불러보든지. 지수의 목소리에 장난이 서렸다. 새초롬하게 뜬 눈매가 예뻤다. 조슈아에게서 느껴졌던 그동안의 괴리감. 정한은 처음으로 그 장벽이 무너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슈아는 종종 이번이 두 번째 삶인 것 마냥 굴 때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겨우라는 수식어가 여전히 어색하지 않은 나이. 입안에서 굴려지는 발음이 어색했다. 형. 20년의 삶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단어가 뱉어졌다. 어딘가 다듬어지지 않은 정한의 언어는 지수를 웃게 하기에 충분했다. 좋다.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
소고 백화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필이면 세일 행사를 하는 날이라, 평소였다면 한산했을 명품관마저 줄이 길었다. 시끄럽고 복잡한 분위기는 금세 피로를 누적시켰다. 인파가 몰린 곳을 조슈아가 유독 꺼린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정한이 발걸음을 저지했다.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고 다음에 오는 게 어떻겠냐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너랑 나랑 시간 맞는 때가 또 언제 있다고. 혹시 피곤해?"
"그건 아닌데……."
"그럼 좀만 더 있다 가자. 오늘은 정말 너 좋은 옷 하나 사 주고 싶어서 그래."
지수가 정한을 브리오니로 이끌었다. 아직 먼 이야기였지만, 언젠가 있을 정한의 콩쿠르 때 입을 수트를 위해서였다. 다시 바이올린을 잡은 정한에게 꼭 선물하고 싶던 것. 단정히 걸려있는 옷들 중에 지수가 꺼내 든 건 회빛의 체크무늬 재킷이었다. 허리선이 적당히 잡혀있는 옷은 정한의 체형과 꼭 맞았다.
정한이 피팅룸에 들어간 사이, 지수는 코트 몇 벌을 더 집었다. 또래에 비해 골격이 일찍 잡힌 편인 정한은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났다. 그의 하얀 피부에 어울릴 법한 색을 찾는 눈이 섬세했다. 크림색의 캐시미어 니트. 천사 같은 정한의 얼굴을 떠올린 지수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예쁘겠다. 몇 벌의 옷을 지수가 더 골라내는 동안, 피팅을 마친 정한이 걸어왔다.
"진짜 잘났다, 너."
밝게 탈색한 머리에 화려한 얼굴. 고급스러운 옷까지 갖춰 입은 정한은 당장 브라운관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모습이었다. 부끄러운 듯 붉어지는 귀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지수는 괜히 뿌듯해졌다. 고작 몇 개월 함께 한 게 다였으면서, 정한을 제가 키워낸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것도 입고 나와볼래? 골라 둔 옷들을 정한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었다. 낮은 음성이 귀에 닿았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조슈아의 손이 저지당했다.
"조슈아."
평생을 듣고 자라온,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 준휘였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입술을 짓씹는 조슈아를 보는 준휘의 표정이 어두웠다. 신의안의 보스는 고위 간부의 개인사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세세한 인간관계까지도. 이제 막 글을 떼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직에서 길러진 몸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였다. 준휘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하나의 각본이 스쳐 지나갔다. 조슈아 역시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후회는 지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조슈아의 걸음이 고문실로 향했다. 단 한 번도 발 들인 적 없던 장소였다. 좁은 방은 어딘가 꿉꿉했다. 더러운 것들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져 나간 누군가의 살점이 썩어들어가는 냄새.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 후각을 자극하는 구취들 때문에 기분이 발끝까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무엇이 묻어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는 낡은 의자 위에 조슈아는 순순히 자리를 잡았다. 일련의 모습들을 지켜본 준은 이마를 짚었다. 조슈아 홍은 서약을 위반한 이였다. 삼합회의 사람은 함부로 타인을 도와서는 안 됐다. 그러나 제 친우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조슈아에게 서약에 명시된 처분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직까지 신의안 내에 총기와 나이프 모두를 능숙하게 잘 다루는 사람은 조슈아가 유일했다. 누구보다 레드 폴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이였다. 딱딱한 자세로 서 있는 조슈아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의 성정이 일을 낼 것을 짐작했지만, 시기가 이렇게 이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나 말고도 아는 사람 있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줄곧 펜트하우스에서만 들을 수 있던 음색. 준이 잠시 신의안의 보스 자리를 내려놓았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너도 어쩔 수 없구나. 헛웃음을 지은 조슈아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서약을 어긴 간부가 있다는 이야기는 소문조차 되지 못했다. 애초에 조직 간부의 얼굴을 아는 이가 몇 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됐어. 처분은 내가 임의로 내린다."
"……무슨."
"윤정한을 신의안으로 들여."
어떤 처분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각오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제가 유일하게 양보할 수 없는 것.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이 무너졌다. 정한은 조슈아의 세계에서 유일한 희망이었다. 준의 결정이 최소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카엘."
"……."
"명령 불복 시 원칙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보스."
"마지막으로 말한다. 윤정한을 신의안으로 들여.“
여분의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지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오랜만의 펜트하우스였다. 함께 사는 이가 생긴 뒤로는 거의 들리지 않았던 장소. 고작 몇 달 새에 느껴지는 공기가 어색했다. 어쩌면 정한이 제 옆에 있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준의 장소로 침입하는 발걸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조슈아가 정한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편하게 생각해.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목에는 여전히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한 잔 할래?"
발렌타인이 가득 담긴 언더락 글라스를 건네는 준의 얼굴이 부드러웠다. 조슈아는 일말의 불안을 완전히 놓았다. 저런 얼굴의 준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여전히 그는 정이 많았고, 사람에게 모질게 굴지를 못 했다. 익숙하게 잔을 받아 든 조슈아가 단번에 양주를 들이켰다.
"정한이라고 했나?"
"……네."
"할 줄 아는 건?"
"총 쏠 줄 알아. 잘해."
"정한, 네가 대답해봐."
"총기는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자신 있어? 누구한테 배웠는데?"
"네. 형한테서 배웠어요. 자신 있습니다."
정한의 목소리는 떨림이 분명했지만, 강단이 있었다. 정한을 흥미로운 눈으로 보던 준이 조슈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네가 직접 가르쳤다는 말이지.
"너는 얼마나 확신해. 이 애의 실력에 대해서."
"백 프로. 완벽해. 신의안에서 이보다 뛰어난 스나이퍼는 나 말고 없어."
단호한 음성에 준휘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는 정한에게 정식적인 입회 절차를 요구하지 않았다. 가장 은밀한 존재로서 조슈아를 도울 것. 준이 정한에게 요구한 것의 전부였다.
홍콩의 야경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방. 홍콩 내에서 최고가로 책정되는 건물을 세계 최대 규모 범죄 조직의 소유로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가장 완벽한 은신처였다. 보스의 공간에 있을 때면 조슈아는 이런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순리라는 것이 말소된 것처럼 느껴졌던 날들. 거대한 흑사회는 언제나 이치를 거부했다. 이는 개인의 작은 바람 하나조차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과도 뜻을 같이했다. 신의안 조직원 일람에 정한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보았을 때 조슈아는 비로소 제가 속한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무던하게 내밀어진 종이봉투는 단단히 밀봉되어있었다. 극비 문서. 정한이 입회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떨어진 대형 프로젝트였다. 화승화를 비롯한 화자두(和字頭. 조직 이름 앞에 和자를 쓰는 삼합회 조직의 총칭) 조직들은 물론 러시아 마피아까지 개입되어 있다는 보고서를 받아 든 조슈아가 미간을 구겼다. 첫 페이지에 크게 쓰여 있는 작전명만으로도 부담이 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통칭 베네시안 프로젝트. 마카오에서 가장 큰 카지노를 보유하고 있는 리조트 호텔에서 벌어질 마약 밀거래. 참여하는 갱단의 이름과 이동 루트, 거래 물품까지 세세하게 적혀있는 서류를 단숨에 읽어낸 조슈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뭘 하면 되는데?"
일평생을 신의안에서 구른 몸이었다. 단순 거래였다면 인터폴 적발 시 도주 경로 이상의 것을 적어놓지는 않았을 터였다. 지나치게 세세한 설명. 다른 목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참여하는 다른 조직들 모두가 타깃이 될 거야."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거래되는 마약류는 총 10t가량이었다. 삼합회에게 할당된 것은 그 중 약 3톤. 미국 갱단들이 취할 이익을 생각했을 때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즉, 삼합회는 공동으로 개입되는 모든 조직을 멸한 뒤 베네시안 호텔로 유통될 모든 마약을 독차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작전의 덩치가 컸다. 신의안의 모든 간부급 인사가 대동 될 예정이라는 준의 목소리가 결연했다.
란타우 섬. 마카오 행 밀항선에 조직원들이 모두 승선한 것을 확인한 조슈아는 곧바로 차를 돌렸다. 배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호텔에 도착해 미리 도주 경로를 확실히 확보해두어야 했으므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홍콩 국경 버스 터미널에서 HZMB(Hong Kong–Zhuhai–Macau Bridge)를 거치면 마카오까지는 단 20분. 시간이 촉박하지는 않았다. 대기하고 있던 준과 정한이 건네주는 티켓을 건네받았다. 덜컹거리는 이층 버스. 피로 물들 축제의 서막을 축하하는 듯,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반짝이는 밤의 강주아오 대교가 화려하게 반짝였다.
5성급 호텔은 그 명성에 걸맞게 호화스러웠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대운하를 콘셉트로 한 실내 운하는 이곳 카지노에서 벌어질 일을 짐작하지 못하는지 고요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길 양옆으로 펼쳐진 수많은 상점들. 그 안에 자리한 창고들은 모두 삼합회의 도피 경로가 될 것이었다. 도주로는 이미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일찍이 화자두 내 몇 조직이 손을 써 둔 듯했다. 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개죽음을 당할 게 뻔했기에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세계. 핏빛 축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네시안 프로젝트의 성공은 신의안에게 특히 간절했다.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할 경우, 신의안은 약 300억에 달하는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최근 조직 내로 대마초를 밀반입하던 선박 한 채가 불타며 거래량이 크게 반락한 사건이 그들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다. 호텔 스위트룸 어딘가에서 편안하게 몸을 뉘고 있을 미국 갱단과 러시아 마피아의 보스들. 그들을 말살시키는 조직이 삼합회 내에서 가장 큰 몫을 챙기게 될 터였다. 반드시 선제가 되어야 했다.
조슈아에게 떨어진 첫 번째 명령은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보스를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패밀리는 단 한 팀. 보스의 이름은 블라지미르(Владимир). 이전에 한 번 거래했던 기억이 또렷했다. 작고 뚱뚱한 외양에 심술은 덕지덕지 붙어 있던 인상이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던 사람. 밀살 시일은 프론트 파티 직후라 했으니 당장 오늘이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속에서 유독 튀는 목소리가 그의 동태를 살피기에 적합한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기억 속보다 주름이 한 층 깊게 팬 그의 얼굴은 기억 속보다 더 추해 보였다. 이름깨나 날리는 러시아 마피아 패밀리의 보스로는 보이지 않았다. 밤 열한 시. 블라지미르는 칼같이 파티장을 나섰다. 자신에 대한 자만인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그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밤 산책에 집착했다. 병적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중앙 분수 뒤편에 숨겨둔 제 소총을 챙겨 든 조슈아가 조용히 그를 따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쉬운 살인이었다. 총알은 한 번에 그의 머리에 박혔다.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은 시신은 금세 악취를 풍겼다. 쉽게 발견되지도 않을 깊숙한 뒷골목. 그 자리에 차게 식은 시신 한 구가 있다는 사실은 며칠 후에나 밝혀질 것이었다.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음이 카지노 안을 가득 채웠다. 곱게 깔린 카펫 위로 화려한 조각상이 들어왔다.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상자 안에는 아마 대마가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조각마저 마약으로 만들어졌을 테지. 조슈아가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미국 갱단의 간부는 전일 정한이 말끔히 처리한 뒤였다. 본식 전에 눈에 거슬리는 인사들을 최대한 처단한다는 작전은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조무래기들은 자신들의 리더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도 모르는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샴페인 잔이 맞닿으며 울리는 부드러운 소리가 울렸다. 확실한 긴장감이 쫙 죄어오는 카지노 안. 호화스러운 음식을 즐기고 있는 이들은 웃음으로 점칠 된 가면이 깨어질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발탄을 쏜 것은 화승화의 새끼 보스였다. 디에잇이라는 예명을 쓰는 자. 차기 두목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다. 판단력과 민첩성에 관해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들었다. 애가 탔을 게 분명했다. 신의안에서 이 정도로 빠르게 일을 처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번뜩이는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고작 스물일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살기였다. 과연 용두의 차기 주인다웠다. 그는 답지 않게 장검을 다뤘다. 빠르게 움직이며 긴 두 칼로 사람을 베는 모습은 마치 무용 같았다. 흩날리는 핏방울이 꽃잎 같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하나하나 죽어 나가는 이들을 보며 조슈아가 빠르게 단검을 빼냈다. 정한은 이미 저격을 위해 위층으로 올라간 듯했다.
"미카, 평소대로만 해."
인이어를 통해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수를 상대로 하는 근접전이 처음인 조슈아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역시 쓸데없이 다정하니까. 속으로 혀를 찬 조슈아가 망설임 없이 상대를 제압했다.
"걱정하지 마, 보스."
끝이 예쁘게 말려있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칼날은 이미 상대의 급소에 박힌 뒤였다.
화려한 장식이 빛나던 카지노는 어느새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비린내 사이에서 와인을 즐겼다. 바디감이 풍부한 레드와인은 배경과 썩 잘 어울렸다. 기분을 좋게 하는 것들. 문득 지수는 정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게 끝난 상황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엄습하는 불안에 급히 정한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혹시나 그가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조슈아는 오랜만에 제 신을 찾았다. 십자가 피어싱이 자리해 있던 귓바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십자가가 있던 자리엔 정한이 선물해 준 링 피어싱이 자리하고 있었다.
걱정과 다르게 정한은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무사하지는 않았다. 그의 옆에는 빵칼을 손에 쥔 거구 한 명이 머리가 터진 채로 엎드려 있었다. 정한의 다리에 자리한 얇고 긴 상처의 범인인 듯했다. 척 봐도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지수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 아린 상처. 유순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접히는 모양새가 괜히 얄미워 정한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탈색으로 잔뜩 상한 머리가 손에 감기는 느낌이 괜히 좋았다. 형, 나 걱정했어요? 장난스레 물어오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지수의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한이 악기 케이스를 맨 채 멀쩡히 걸을 수 있다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집요한 시선을 거둔 지수가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발끝부터 아리고 간지러운 느낌. 언제나 여분의 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왔던 감정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한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간을 졸였던 프로젝트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마약 배분을 위한 삼합회 총 회의만을 남겨둔 채였다. 모든 게 안온해 보였다. 최종 회담을 사흘 남기고 화승화가 갑작스레 불참을 선언하며 평화는 산산조각 났다. 타 조직의 본부 급습이 사유였다. 이미 핵심부까지 내침 되었다는 보고를 접한 디에잇은 급히 홍콩으로 향했다. 휘날리는 듯한 적박의 필기체 S를 상징으로 하는 새끼 갱단. 고작 신생 조직 하나가 삼합회를 흔들어놓았다는 사실에 동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한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Scarlet. 구룡성채에서 구르던 시절, 정한은 늘 그들을 마주하곤 했다. 피의 색을 이름으로 하는 그들은 잔인하게도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 필기체 S. 성채 안 작은 인쇄소에서 수도 없이 뽑아내던 명함에는 스칼렛의 첫 알파벳이 박혀 있었다. 볼에 튀던 피가 생각보다 묽었던 기억이 또렷했다.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준은 최소 인력을 제외한 모든 조직원을 출국시켰다. 정한과 조슈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삼합회의 개별 조직은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았다. 화승화가 공격당했다는 것은 신의안 역시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스칼렛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밀항선이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조슈아의 대포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신의안 본부가 습격당했다는 연락이 쉴 새 없이 쌓여갔다. 준휘가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나흘. 1층은 이미 초토화되었다 했다. 버텨내야 했다. 보스가 돌아오기까지. 신의안은 조슈아에게 모든 것을 앗아 갔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쥐여준 공간이기도 했다. 잃고 싶을 리 없었다. 거대한 공포가 그를 덮쳐왔다. 잘게 떨리는 어깨를 투박한 손이 붙잡았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살갗이 따뜻했다.
"별일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다정한 목소리. 조슈아의 눈이 흔들렸다. 투명한 갈빛 눈동자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었다. 정한아. 너는 온전히 괜찮은 걸까. 정한은 어느 때보다 단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믿음과 사랑은 같은 말이라고. 정한을 사랑해버린 뒤였다. 지수는 웃는 방법을 택했다.
찬란한 홍콩 도시를 배경으로 쉴 새 없는 총격전이 이어졌다. 뺨을 스치는 총알과 스러져가는 시체들을 보고도 지수는 정한의 귀를 걱정했다. 예민한 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소음이었다. 신의안에 입회한 뒤에도 정한은 종종 바이올린을 켰다. 첫 작전을 무사히 마쳤을 때, 정한은 집에 들어와 조용히 악기를 집어 들었다. 한없이 부드럽던 선율이 들리는 듯했다. 누구도 삼합회의 스나이퍼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연주. 정한은 오선지를 뛰어넘곤 했다. 악보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것들의 실현은 지수를 희열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귓가에 라 캄파넬라가 울렸다. 현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종소리. 악보에 그려진 음표에 맞춰 조슈아의 권총이 숨을 토해냈다. 정확한 급소. 고운 얼굴에 잔혹한 흔적들이 남았다.
침입은 끝이 없었다. 소리 없이 세력을 키워 간 스칼렛의 몸집은 비대했다. 그들이 삼합회를 타깃으로 잡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중국의 가장 큰 범죄 조직이라는 사실. 그들은 흑사회가 가진 지위를 탐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그 이름을. 웃기지도 않았다. 어둠은 동경할 것이 되지 못했다. 비소를 지은 조슈아가 두 귀를 막았다. 비명소리도, 발포음도,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 날개가 검게 물든 미카엘은 암흑을 탐한 이들에게 벌을 내렸다. 두 발로 우뚝 서 있는 사람들보다 발에 채이는 시신들이 더 많아졌을 때가 되어서야 준휘는 도착했다. 보스의 안전이 주는 안정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어느 한 곳 다치지 않은 준휘를 확인한 조슈아가 웃었다. 안도.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렸다.
"미카……!"
찢어지는 듯한 준의 음성이 공간을 갈랐다. 자각은 한 발 느렸다. 겹겹이 쌓여있던 죽은 이들 사이, 미약하게 숨이 붙은 이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조슈아의 옆구리에는 나이프가 깊게 박혀 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천사의 몸이 천천히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날카로운 칼은 제가 있던 자리를 또렷이 기억했다. 쉴 새 없이 흐르던 피를 겨우 지혈했을 때, 준은 조슈아와 정한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좁은 공간에 숨어 저격했던 정한에게는 생채기 하나 없었지만, 조용히 수긍했다. 두 사람이 유독 각별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친 조슈아를 혼자 두는 게 퍽 걱정이 됐을 터였다. 고통이 심한지 붉은 입술이 신음성을 뱉어냈다. 이토록 아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태연한 척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슈아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를 커다란 침대에 뉘이고, 진통 주사를 놓은 뒤에야 편해진 얼굴을 본 뒤에야 정한은 자리를 떴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가라앉는 태양이 정한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하늘이 먹칠을 한 듯 온통 검었다. 지수는 밤을 싫어했다. 암흑의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면서도 어둠이 두렵다 했다. 모순적이네요. 농담처럼 꺼냈던 말에 따라 웃지 못하던 그의 얼굴이 선명했다. 침실 통유리가 반짝이는 파도를 투명하게 담아냈다. 조슈아가 잠들기에 가장 안정적인 공간. 어느새 잔잔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샤콘느. 감정이 요동칠 때면 듣곤 하는 음악. 조슈아는 제가 다친 것을 괘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의 선율은 정한에게서 기인한 것이리라. 누군가는 자만이라 여기겠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정한이 위험했던 날이면 극도로 불안해하는 지수였다. 신의안이 타격을 입은 지금, 바보 같은 그는 저보다 정한을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잠들어 있는 모습이 고왔다. 긴 속눈썹이 흩어지는 뺨에 입 맞추고 싶었다. 애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게 다정을 베푼 처음이자 유일이었으니. 감정은 쉽게 모습을 바꾼다. 어느새 사랑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밤의 해변보다도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좁혀진 미간을 따라 흐른 걱정이 눈에 가득 담겨있던 모습은 평생 지우지 못할 기억이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차가운 달빛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정한의 손에 들려있었다. 잭나이프. 조슈아가 가장 즐겨 쓰는 무기. 수없이 많은 피를 묻혔던 칼은 어쩌면 제 주인의 피조차 달가워할 터였다. 그러나 정한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왜 망설이고 있어."
언제나 사랑스러운 모양새를 띠던 눈이 서서히 뜨였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정한에게 안정으로 자리했던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수는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당황을 숨기지 못한 얼굴이 적나라했다. 모든 정황이 단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지수는 웃고 있었다.
"네가 죽는 일이잖아."
"뭐……?"
"너는 살아야지, 정한아."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가 정한을 아프게 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눈빛. 저를 해하고 살아남으라는 말을 내뱉는 입술이 미웠다. 모든 일은 저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언제부터 알았던 거예요?"
"네가 총을 잡았던 날부터."
"처음엔 의심이었어. 이상하잖아. 처음 총을 잡아보는 애한테 습관이 있다는 게."
"확신은 언제 했는데요."
"베네시안 프로젝트."
너 다리 다쳤을 때 급하게 드레싱 하는데 치골 쪽에 보이더라. 너희 조직 문양. 높낮이가 일정한 음성은 정한을 더 아프게 했다. 꼬박 삼 년이었다. 그의 의심이 시작된 지가. 카펫 위로 눈물 자국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억울이 치밀어올랐다. 조금만 더 평범했다면. 아니, 스칼렛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솔직한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한아."
여전히 잭나이프가 들려있는 정한의 손을 잡았다. 익숙하고 따뜻한 온도. 정한은 지수를 마주 보았다. 아픈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괴로웠다. 역시 불가능했다. 그가 제 곁에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으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정한이 차분히 지수를 기다렸다. 그는 느린 동작으로 정한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사랑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억센 힘이 정한의 팔을 끌어당겼고, 지수의 배에 칼이 꽂혔다. 살을 파고드는 감각. 줄곧 총을 써오던 정한에게는 생경한 것이었다. 고통에 소리조차 못 내는 지수가 천천히 추락했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다행이야. 네가 아프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도 밝게 빛났던 사람. 나의 유일.
정한아, 너는 나의 神이다.

‘개화’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표현에는 많은 방식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조금 더 정한이와 지수에 가깝게 녹여내고 싶다는 욕심으로 번졌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입체적인 만큼 제 글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읽어주시는 분들이 <신세계로부터>가 주제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주셨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아요.
여러 고민이 있었던 만큼 도와주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분 한 분께 찾아가 인사를 드릴 예정이에요.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함께 마감해주신 모든 분들 역시 너무 즐겁고 감사했어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의 해석이 정답이지만, 개인적인 의도를 밝혀볼까 합니다. 개화의 여러 뜻 중에서 제가 착안한 정의는 ‘사람의 지혜가 열려 새로운 사상, 문물, 제도 따위를 가지게 됨.’입니다. 글 속에서 조슈아라는 인물은 거의 평생을 신의안에서, 삼합회의 소속으로 살아온 사람이에요.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온갖 피를 손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사람을 애정하는 캐릭터입니다. 유성애적 관점을 떠나 바라보았을 때 조슈아는 가장 사랑이 많은 인물입니다. 냉철해야 하는 조직 간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런 성정과 함께 조슈아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또 한 가지가 자신의 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정한을 만나기 전까지 조슈아는 나름의 독실한 신자였어요. 하지만 정한을 만난 뒤부터 조슈아는 자신의 신을 점차 잊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한은 조슈아에게 ‘지수’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정한이는 지수에게 새로운 신이었던 거예요. 지수가 정한으로 인해 제 평생의 신을 버리고, 새로운 신을 택한 것을 곧 개화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꼭 한번 써보고 싶었던 홍콩에서의 사랑을 합작을 통해 그릴 수 있게 되어 기뻤습니다. 아직 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여름. 두 사람의 타오르는 사랑이 이어지기를.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윤정한과 홍지수를 애정하시는 모든 분들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