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fgebluht


달릴 때는 앞을 보고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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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총독부투탄의거를 배경으로 한 허구의 사건을 다룹니다. 지명 등의 설정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건은 창작되었음을 알립니다.]

 

 

 

 

 

 

 

 거대한 소음이 총독부 건물을 덮쳤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총성이 경성 바닥을 뒤흔들었다고 해도 총독부 건물만큼은 총성으로부터 안전했다. 삼엄한 경비를 뚫긴 어려웠으리라. 그래서 그런 걸까. 이번 소음은 분명 단순한 총성과는 달랐다. 폭탄이었다.

 

 

 

 - みんな早く逃げて!

 (다들 어서 피해!)

 

 

 

 순식간에 건물 한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총독부 건물 내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정작 폭탄이 떨어진 곳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씨발… 첫 폭발음이 들리고 몇 초 뒤 나지막이 뱉어진 욕지거리는 분명 조선어였다.

 

 

 

 소음이 잦아들자 헌병 무리가 다급히 2층으로 올라왔다.

 

 

 

 - この階は今危険です。

 (2층은 지금 위험합니다.)

 

 

 

 행색이 멀끔한 남자가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헌병 무리를 막았다. 그들이 우왕좌왕한 틈을 타 남자는 유유히 1층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홍지수는 건물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윤정한. 성공을 자신했던 남자. 분명히 총독을 암살하고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그는 지금 무너져가는 건물 속에 있을 터였다. 도저히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막 가을에 접어들었으나 가시지 않는 후끈한 공기 속에서도 지수는 한겨울의 냉기를 느꼈다.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자꾸만 구역질이 나는 바람에 결국 멈춰 서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음은 굉장했고 지수는 계속해서 달려도 소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벗어날 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시간은 고작 5분 남짓이었지만 지수에겐 한참이었다.

 

 

 

 - 이봐 청년, 괜찮은 거 맞아?

 

 

 

 내지어라면 이젠 신물이 났다. 지수는 일어와 조선어 모두에 능통했지만 일어를 쓸 때 온몸이 굳어버리는 느낌을 여전히 어색해했다. 그러나 무장한 헌병 경찰들이 경성 한복판을 돌아다니던 게 엊그제와 같은 지금, 경성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조선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아주머니가 건넨 조선어 한 마디에 정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지수는 냉수를 들이켜며 지난 일 년간 있었던 일을 천천히 복기해나갔다.

 

 

 

 

 

 

 

 

 

 

 

 

 

 

 

 지수는 한성법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유학을 다녀와 이제 막 사무소를 개업한 변호사였다.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호기롭게 개업했으나 사무소 사정은 썩 좋지 못했다. 사무실은 경성 한복판에 있었으나 그 공간은 지수와 그의 동료들 외엔 드나드는 사람이 전무했다. 유난히 칼바람이 매서웠던 어느 겨울, 지수는 사무실 앞에 서서 줄담배를 태웠다. 웃기는 일이었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대낮부터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니. 답답한 마음은 담배를 아무리 태워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 사이 사무실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지수는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 박정한입니다. 만주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눈에 봐도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으나 어쩐지 화려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한은 멀끔한 행색으로 조금은 뻔뻔하게 앞으로의 숙식을 부탁했다. 지수는 동료들에게서 전해 들은 바가 전혀 없었기에 정한을 빤히 쳐다보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곧 정한의 거처가 사무실에 딸린 작은 쪽방으로 결정되었다. 차림새에 비하면 과하게 모자란 방이었음에도 정한은 군말 없이 짐을 풀었다.

 

 

 

 다른 동료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으나 지수만은 정한이 방에 들어가고, 앞으로의 생활을 안내받고, 짐을 푸는 동안 내내 그를 지켜봤다. 이름 박정한. 얼마 전 만주에서 들어왔다. 이 두 가지 외에 그 어떠한 정보도 없었으나 사무소 사람들은 이 남자에게 숙식을 제공해주었다. 그렇다면 믿을 구석이 있는 사람이란 뜻인가. 믿음, 신뢰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겐 아주 쓸모없는 것이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누군가에겐 너무나 중요해서 목숨이 오가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수는 후자의 경우였다. 동료들이 이 남자를 믿는다고 해서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지수는 잠자코 그를 지켜만 보았다.

 

 

 

 - 저는 지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예?

 

 - 1년 안에는 떠난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묻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지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1년 안에 떠난다. 어떠한 인과관계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지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정한은 꼭 지수의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조금 머쓱해진 지수는 그제야 제 자리로 돌아갔다. 만주, 그리고 지령. 지수는 명석했기에 정한이 무슨 일을 하는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조용히 지내다 떠날 사람. 정한의 첫인상이었다.

 

 

 

 

 

 

 

 

 

 

 

 

 

 

 

 1921년 2월 23일

 

 

 

 - 변호사님!

 

 

 

 누군가 상념에 빠져 있던 지수를 불렀다. 부른 이가 누군지 지수는 이제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정한이 사무실의 쪽방에 기거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는 한 달 동안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곧바로 지수를 불러댔다. 처음 만났을 땐 1년 안에 떠날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무슨 바람이 들어 매일 지수를 괴롭히는지 모를 영문이었다.

 

 

 

 - 이번엔 또 왜요?

 

 - 혹시 여분 이불 같은 거 없으십니까? 제가 추위를 좀 심하게 타서요.

 

 - 만주에서 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그거랑은 별개죠.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금방 떠날 사람이라고 하니 처음엔 지수도 별말 하지 않고 그의 편의를 봐주었지만 이런 날들이 지속되니 슬슬 귀찮아질 참이었다. 게다가 정한의 요구에도 점차 장난기가 섞이기 시작하자,

 

 

 

 - 알아서 하세요.

 

  

 

 지수도 이제 참을 수 없었다. 물론 굳이 마찰을 빚고 싶지는 않아서 웃는 낯으로 이야기했지만, 전과는 다르게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정한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서려 있는 장난기는 그대로였다.

 

 

 

 - 변호사님!

 

 

 

 이번에도 역시나 정한이었다. 일어로 된 우편 하나를 해석해달라는 게 그의 부탁이었다.

 

 

 

 - 일어 할 줄 모르십니까?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사람이 일어로 된 우편 하나를 못 읽는다는 게 의아했지만 이 정도 문장 해석은 별로 귀찮은 일도 아니었기에 흔쾌히 우편을 받아들었다.

 

 

 

 - 春が来たら桜を見に行きましょうか? 京城の桜は東京と同じくらい美しいと聞きました。

 

 

 

 - 별 내용 아니네요. 중요한 우편이라고 하기엔 흘겨 쓴 것 같이 보이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한의 표정이 묘해졌다.

 

 

 

 - 정말 별 내용 아닌 것 같습니까?

 

 - 네. 모르셔도 됩니다.

 

 

 

 별 내용 맞는 것 같은데…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정한을 뒤로 한 채 지수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정한에게 저 우편을 보낸 이가 누구일까 궁금해하며.

 

 

 

 

 

 

 

 

 

 

 

 

 

 

 

 1921년 4월 9일

 

 

 

 - 모처럼 날도 따뜻하고, 밖에 꽃도 피었던데 산책이나 나갈까요.

 

 

 

 어느덧 봄이었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동료 변호사 한 명이 다음 주쯤이면 비가 내려 벚꽃이 다 져버릴 것이라고 전했다. 창밖으로만 꽃구경을 하고 있던 게 아쉬웠던 때에 마침 정한이 밖에 나가 잠시 걷자고 제안했다.

 

 

 

 정한은 제가 나가자 했으면서 막상 벚꽃을 보고도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지수는 괜히 우편의 내용이 떠올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 이맘때쯤이 되면 동경은 벚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벚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으니까요. 유학 생활은 아주 지루하고 갑갑했는데… 그때 본 벚꽃은 잊히지 않네요.

 

 

 

 정적을 깨고 지수가 먼저 말을 건넸다.

 

 

 

 곤란한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네 어디 한 번 해보세요. 정한은 지수의 말에 답하는 대신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예전의 지수 같았으면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그사이 정한을 닮기라도 한 건지 지수의 대답에도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 어떤 벚꽃이 더 예쁩니까? 동경에서 봤던 벚꽃, 아니면 지금 보는 벚꽃?

 

 - …

 

 - 다른 질문으로 할까요? 그때가 더 즐겁습니까, 아니면 지금이 더 즐겁습니까?

 

 

 

 정한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런 질문을 잘도 했다. 분명히 눈치를 채고 하는 질문이었다. 지수가 적당한 대답을 골라내려 한참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정한은 갑자기 멈춰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졸지에 정한보다 한 발자국 뒤처져 있던 지수는 정한의 등에 부딪힐 뻔 했다.

 

 

 

 정한은 작은 꽃 앞에 멈춰 서있었다. 주변에 가득한 벚꽃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걸었던 정한이 무릎에도 미치지 않는 꽃을 보고 걸음을 멈추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 이 꽃의 꽃말을 아십니까?

 

 

 

 정한이 또 의중을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 어떤 꽃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요?

 

 - 도라지꽃입니다. 나중에 생각나면 꼭 찾아보세요.

 

 

 

 정한의 다소 생뚱맞은 소리에도 이제 지수는 곧잘 대답할 수 있었다. 아주 익숙해 보이는 꽃이었는데 정한 덕분에 이름을 알게 되었다. 꽃말을 알면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지 않을까 싶어 기억해두기로 했다. 도라지꽃… 도라지꽃…… 중얼거리는 지수를 보고 정한이 작게 웃었다는 사실을 지수는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1921년 7월 10일

 

 

 

 비가 일주일째 내리고 있었다. 장마였다. 정한이 우산을 들지 않고 나간 게 떠올라 지수는 결국 업무를 보다 말고 장우산 하나를 들고 밖을 나섰다. 정한은 만주에서 온 동료를 만나러 경성역에 다녀온다고 했다. 비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내리는데 정한은 경성역 근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초조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러운 일어에 긴가민가했지만 분명 정한의 목소리였다. 정한과 그의 동료로 추정되는 이는 비에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순사로 보이는 사람이 정한에게 신원을 따져 묻고 있었다. 자칫하면 정한과 그의 동료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한이 계속해서 묵묵부답이자 순사의 언성이 높아져 갔다.

 

 

 

 - じらさずにすぐ返事しろ。

 (뜸 들이지 말고 당장 대답해.)

 

 

 

 정한이 답을 하려 입을 떼던 그 순간,

 

 

 

 

 

 - 彼は私の弁護士の同僚です。

 (제 변호사 동료입니다.)

 

 

 

 

 

 지수가 끼어들었다. 만약 정한이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지수는 그를 자신의 사무실에 숨겨준 것으로 모자라 거짓말까지 한 셈이 되니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総督府の建物が見えるところに小さな事務所を一つ運営しています。 こちらは私の同僚です。

 (총독부 건물이 보이는 곳에 작은 사무소 하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쪽은 제 동료들이구요.)

 

 

 

 정한을 쏘아보던 순사는 그제야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고 돌아갔다. 정한의 동료도 지수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건네곤 사라졌다. 지수는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우산도 소용없어 보이는 정한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한은 한참 말없이 지수의 걸음에 맞춰 따라 걷다 사무실에 다 도착해서야 말을 건넸다.

 

 

 

 - 방금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 저도 알고 있습니다.

 

 - …

 

 - 하실 말씀 끝나셨습니까?

 

 - … 아마 감당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는 1년 안에 떠나야 하는 몸입니다.

 

 

 

 정한은 또 맥락 없이 그런 소리를 잘도 했다. 그럼에도 지수는 그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한이 그렇게 말하면 할수록 지수의 오기를 부추기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굴어놓고 이제 와서 내빼는 게 어딨어. 가만히 있는 사람 먼저 툭툭 건든 게 누군데. 괘씸해서 뻔뻔히 말하는 정한을 단숨에 흔들어 놓고 싶었다. 당장 지수로선 택할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마치 영화처럼 그 순간 내리던 비가 그쳤고, 지수는 정한에게 천천히 다가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뺨에, 그리고 입술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입술을 부딪쳤다. 어딘가 서툰 입맞춤이었지만 지수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용기였다. 아주 잠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것에 불과했지만 정한의 눈은 크게 일렁였다. 지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말을 이었다.

 

 

 

 - 일어 잘하시던데요.

 

 - 제가 배움이 빠른 탓에.

 

 

 

 정한의 부탁으로 일어로 쓰인 우편을 해석해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분명 짧은 문장도 해석하지 못했었는데 아까 본 정한은 유창한 일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 春が来たら桜を見に行きましょうか? 京城の桜は東京と同じくらい美しいと聞きました。 그때 그 문장, 그쪽이 쓴 겁니까?

 

 -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말을 빙빙 돌리는 정한의 화법에 금세 적응한 지수는 이제 그의 대답이 무슨 의미인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정한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문장을 해석해달라고 부탁한 걸까. 그러나 더 캐묻지 않고 사무실 안으로 향했다.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 내내 신경 쓰였다.

 

 

 

 

 

 

 

 

 

 

 

 

 

 

 

 1921년 9월 11일

 

 

 

 - 사실 제 이름은 박정한이 아닙니다.

 

 

 

 어느 밤 정한이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했다. 지수는 당연히 그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그런 농을 하십니까. 이제는 안 속습니다. 지수의 얕은 타박에도 정한은 꿋꿋했으며 어딘가 결연한 표정마저 짓고 있었다.

 

 

 

 - 제 진짜 이름은 윤정한입니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성이 윤 씨여서요.

 

 

 

 그제야 지수는 정한이 지금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정한… 윤정한…… 그의 이름을 조용히 입에서 몇 번 굴려보았다. 혀가 굴러가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 확실히 박정한보다는 낫네요.

 

 

 

 그렇게 대답하니 정한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지금 처음 얘기하는 겁니다.

 

 - 예?

 

 - 제 진짜 이름이요. 아는 사람이 저와 어머니, 둘 뿐이었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지금 한 명 늘었네요.

 

 

 

 그리고 정한은 한참 뜸을 들였다.

 

 

 

 -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전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이곳으로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아주 큰 결심 끝에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한은 처음 만났던 그 날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지령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정한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주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수는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정적이 흐르는 방에서 지수는 문득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수는 명석했기에 그의 추측이 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21년 9월 12일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한은 온데간데없었다. 지수는 불안한 예감이 들어 다급히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정한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그는 이미 총독부 건물에 들어서고 있었고, 저지했다간 좋은 꼴을 못 볼 게 뻔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지만 돌아온 건 굉음과 함께 무너지는 건물이었고……

 

 

 

 다시 현재.

 

 

 

 정한은 사라졌다. 그리고 지수는 그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는 성공할 거란 확신을 내비쳤다. 분명 돌아올 거란 말도 남겼다. 그러나 그건 자기 암시에 불과했다는 걸 지수는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조선의 중심인 경성에서 거사가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결국 건물이 무너지는 그 장면까지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분명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그 거대한 건물을 사람 혼자 무너트리기엔 한계가 있으니. 그렇지만 무너져가는 건물 속엔 정한이 있었다. 설사 붕괴를 피했다고 하더라도 헌병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지수는 무너진 총독부 건물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 좀 전과 같이 땅만 보고 달려 사무실로 들어갔다. 역시나 그곳에도 정한은 없었다. 걱정이 두려움을 이겨 찾아간 총독부 건물은 건물 한쪽이 부서졌다는 점만 빼면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고 조용했다.

 

 

 

 - 윤정한……

 

 

 

 그러나 정한은 어디에도 없었다. 행방이 묘연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 건가. 누군가에게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자칫해서 연루되었다가는 좋지 않은 꼴을 보기 십상이니. 지수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지수를 아주 두렵게 했다.

 

 

 

 

 

 

 

 

 

 

 

 

 

 

 

 지수는 종종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잃어버린 사람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이 났다. 정한을,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찾고 싶었다. 분명 즐거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정한은 시한부 운명이었고 지수는 그런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도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1분 1초가 소중해서 자꾸만 목이 메었다. 처음 만나 그를 경계하던 순간, 꽃이 핀 거리를 거닐었던 순간, 그의 진짜 이름을 들었던 순간……

 

 

 

 1년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겨울의 끝자락에 만나 가을의 초입에 헤어진 덕분에 사계절을 그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지수는 겨울이 되면 만주에서 왔으면서 추위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정한이 생각났고, 봄이 되면 정한과 함께 경성을 걸었던 날이 떠올랐고, 여름이 되면 비에 젖은 정한과 나눈 짧은 입맞춤이 그리웠고, 가을이 되면…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뒷모습이 생각나 내내 비참했다. 가을이 지나 다시 겨울이 오면, 겨울이 와서 눈이 오면 문득 정한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정한이 있는 그곳은 따뜻한지 아니면 이곳처럼 추운지. 간간이 눈이 내리는지. 여전히 추운 걸 못 견뎌 하는지. 만약에, 아주 만약에 살아 있다면… 내 생각을 하는지. 자주는 아니더라도, 혹은 가끔도 아니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를 떠올린 적이 있는지. 지수는 계속해서 물었는데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1년을 채우려면 아직 석 달도 더 남았는데. 1년 안에 간다고는 했지만 사 분의 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미련이 차고 넘쳐흘렀다.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난 사랑은 금세 몸집을 불려 금방이라도 자신을 삼킬 것만 같았다. 벅찼다.

 

 

 

 지수는 지나간 사랑을 연민하며 추억하고 멀어진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며 살았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흐릿해져 갔지만 그럴수록 지수는 더 악착같이 그를 떠올렸다. 누군가는 박정한을 기억하더라도 윤정한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에. 윤정한은 오로지 지수만이 기억할 수 있었다.

 

 

 

 

 

 

 

 

 

 

 

 

 

 

 

 칼바람이 매섭게 불던 어느 날에 지수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또다시 줄담배를 태웠다. 꼭 어디선가 정한이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 뻔뻔하게 들어와 당당하게 숙식을 부탁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만약,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정한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건 꼭 오늘이 될 것만 같았다. 정한의 생각으로 지수가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어느 가을에 들렸던 굉음이 다시 한 차례 경성을 흔들었다. 이건 분명.

 

 

 

 지수가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당황한 사람들이 건물을 에워쌌고, 그 중심에는 경무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폭탄으로 인해 처참히 무너진 건물이 보였다. 깨진 창문 틈 사이로 건물 잔해에 맞고 깔려 여기저기 널브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번 거사는 분명 확실한 성공이었다.

 

 

 

 - この野郎が逃げを…!

 (이 개자식이 도망을…!)

 

 

 

 그러나 정작 폭탄을 던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정한이었을 텐데. 지수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경성의 한복판에 겁도 없이 폭탄을 던졌던 2년 전 그의 모습이 붕괴된 건물과 겹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성공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몰라도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말은 사실이 되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지수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면서. 헛된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지수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지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정한의 방에 들어갔다. 정한이 살던 방은 정한이 사라진 후 지금까지도 쭉 그대로였다. 지수가 틈틈이 청소하며 그의 물건 하나하나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줄줄이 꿰고 있는 지수는, 정한의 책상 위에서 아주 낯선 무언가를 발견했다.

 

 

 

 도라지꽃이었다. 그리고 작은 쪽지.

 

 

 

 [ 만주는 추워 꽃이 피지 않는 바람에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

 

 

 

 글씨만 봐도 한눈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한 번도 입에 사랑을 올린 적 없는 그의 고백이었다. 지수는 이 꽃의 꽃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지수는 이젠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에 떠났다. 꽃이 없는 땅으로. 꽃은 없어도 꽃을 선물해준 이는 있을 것이기에. 만주는 그가 말했던 대로 아주 척박하고 추운 곳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지수는 그가 있는 곳이 어디이든 그곳을 향해 달릴 준비가 되었다. 이제 지수는, 앞을 보고 달릴 수 있었다. 지수의 앞에는 정한이 있을 테니까.

 

 

 

 

 

 

 

 

 

 

 

 

 

 

 

 봄이 오면 벚꽃을 보러 갈까요?

 

 경성의 벚꽃은 동경의 벚꽃만큼이나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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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윤홍만 생각하며 작업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몇몇 부분, 특히 일본어 대사가 어색하더라도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이 미흡하고 또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