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그의 요람을 잊었다.
태초에 에리두에 인간을 창조한 신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들은 이제 드물었고, 신전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찾는 이도 점점 줄어들어 갔다.
신은 공명정대하다. 신은 자비롭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신을 경배하라, 신을 찬양하라,
신은 빛이요, 위대한 만물의 창조주다.
담적색의 두꺼운 벽마다 음각으로 새겨진 비문(碑文)은 오래도록 내려오는 가르침으로, 감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압도적인 위용이 서려 있었다. 보랏빛 튜닉을 걸친 신관은 신전의 벽을 수놓은 문장들을 쓸며 곱씹듯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신전을 돌아나가는 호젓한 수로에 이르러 가늘고 긴 손을 담그자, 물결의 부드럽게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갔다. 그 흐름 속에 오색 찬연한 빛을 품은 비늘이 아롱이던 그때, 푸르른 손이 신관의 손을 잡고 떠올랐다.
“안녕.”
청량한 인사와 함께 나타난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물기가 흥건한 그의 머리칼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투명하면서도 무지개를 품은 듯 반짝였다.
신관의 가슴 안쪽으로 따뜻함이 번졌다. 그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두 팔을 벌렸다. 청아한 그의 부름과 우아한 미소에 신은 화답했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물소리, 싱그러운 풀벌레 소리를 연주삼아, 두 사람은 긴 호흡을 함께했다.
덜 자란 풀의 향기와 함께 따뜻한 볕 아래서 매끄럽게 익어가는 살결의 냄새를 맡으며 후희를 즐기던 신은 신관의 귓가에 속삭였다.
“홍수에 대비하도록 해. 사랑스런 나의 아이야.”
신의 품에 안겨있던 신관의 두 눈이 커졌다. 신은 그 모습이 귀여웠다. 더 놀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신의 위엄마저도 벗어 놓아야 할 참이었다.
옛 은혜는 무색하게 잊어버리는 시끄럽고 멍청하고도 덧없는 인간들. 그러나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번성하며, 사소한 것에도 행복과 기쁨을 아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신은 말을 더하지 않았다. 다만 그 어느 보석보다도 찬연히 빛나는 비늘을 하나 뽑아 신관의 머리칼에 꽂아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우기가 시작되었다. 으레 반복되는 자연현상에 수많은 도시민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그러나 범람이 무섭게 커졌다. 수로를 개방해도 물은 무섭게 차올랐고, 오직 몇몇이 대재앙을 견디기 위해 설계된 방주에 올라 기도를 이어갔다.
대홍수가 멈추고 살아남은 인간들은 양지바른 곳을 찾아 제를 올렸다. 신은 지상으로 내려와 그들을 굽어 살피며 단아했던 제 사람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신관을 찾아 바닥이 드러난 온 땅을 헤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처음 만났던 신전의, 홍수로 쓸리고 깎여나간 비문 아래 늘어진 보랏빛 옷가지를 발견했다. 신의 심장이 고요히 멎어들었다. 그의 시선이 수많은 가르침이 새겨진 벽의 끝에 담담하게 적힌 글귀에서 멈추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나, 인간은 감히 신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은 그곳에서 오래도록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신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사랑했던 연인이 입고 다니던 옷과 꼭 같은 보랏빛의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꽃은 폐허가 된 신전을 뒤덮어 황무지에 피어난 보랏빛 무덤 같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