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법 봄 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3월 말이다. 개나리와 진달래는 진작에 펴서 거리를 환하게 장식했다. 제주도에는 벌써 벚꽃이 만개했다는데 이제야 꽃봉오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서울 거리의 저 나무들도 다음 달만 되면 분홍빛으로 물들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같이 벚꽃 축제 가자고 하겠지? 어디가 사람이 적으려나.
"오빠"
"응?"
"나 결혼해."
"나랑?"
"아니, 다른 남자랑. 잘 살아. 안녕."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윤정한은 지 할 말만 하고 나가는, 방금까지 여자친구였던 그녀가 뒤돌아 좋아하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건 꿈이 아니다. 차가운 거라도 마셔야 정신이 들 것 같아 시켰던 아아메를 마시려 고개를 내리는 순간, 테이블에 아까는 없던 게 놓여있었다.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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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봄날
평생의 짝을 만나 서로의 봄이 되어주며
따스한 가정을 이루려 합니다.
참석해 지켜봐 주시고 축복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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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윤정한은 인생 처음으로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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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한의 전 여친인 미정이는 예쁘다. 존나게. 정한과 미정이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한 번씩 쳐다봤다. '와, 저 커플...'. 정한의 친구가 말한다. 미정이가 얼굴값 한 거라고.
윤정한도 얼굴값이라면 지지 않았다. 저 좋다는 사람 막지 않았고 그렇게 시작된 연애에 당연히 열정적일 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성의'만' 보였다. 그런데 웃기지. 그런 윤정한 어디가 좋다고 그의 전 여친들은 하나같이 그래도 애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고 허튼짓은 안 하지 않냐며 그를 놓지 못했다(얼굴이 큰 몫 했다). 윤정한을 포기하는 대신 윤정한을 바꿔보고 싶었던 그의 전 애인들은 결국 윤정한을 질리게 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런 점에서 정한과 미정은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동류끼리의 만남에 그의 최측근들은 티는 안 냈지만, 꽤 흥미로워했다. 드디어 네가 너 같은 애 만나 보는구나. 정신 좀 차리려나.
또 다른 친구가 말한다. 윤정한 전 여친들의 바람이 오늘에서야 이루어진 거라고. 너 솔직히 좋은 애인은 아니었잖아.
"야, 나는 좋은 남친은 아니었어도 바람은 안 폈어. 그리고 뭐? 결혼? 청첩장을 주고 가? 이거 뭐냐. 와서 축의금이나 내라는 거야 뭐야."
"그래서, 갈 거야?"
"미쳤냐. 거기 가서 내가 좋을게 뭔데."
정한은 소주 한잔을 더 들이켰다. 술이 썼다.
*
미정이랑 같이 보려고 했던 벚꽃이 만개한 4월 둘째 주 주말이었다. 저번 주에 벚꽃이 개화하고 완전히 만개한 오늘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신랑 신부는 팔짱을 낀 채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렴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자 제일 행복해야 할 두 사람이긴 했다.
그들을 지켜보는 윤정한은 그렇지 못했지만. 그래. 결국 왔다. 미정의 결혼식에. 식은 서울의 유명한 호텔 야외 예식장에서 열렸다. 신랑이 돈 좀 있나 본데. 어떤 새끼랑 결혼하길래 나를 차나 했더니 외모가 아니라 그의 조건을 본 듯싶었다. 이렇게 따지는 저 자신이 구리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전 남친은 뭘 해도 구질구질 한 존재다. 확 비나 와서 벚꽃 다 떨어지고 식도 망하길 바랐는데 그런 윤정한을 비웃듯이 날씨는 아주 쾌청했다. 결혼하기 좋은 날씨다 씨이-발. 신부 화장을 받고 드레스를 입은 미정이는 더럽게 예뻤다.
매정한 미정이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쁜 기지배.
"나쁜 새끼."
어? 나 방금 입 밖으로 안 뱉었는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어떤 남자가 울면서 욕을 뱉고 있었다. 그새 또 '개새끼'라고 말했다. 키는 저랑 비슷했고, 얼굴은 저 만큼은 아니지만 이 남자도 굉장히 잘생겼다. 뭔 남자가 애교살이 저렇게... 아 윤정한 넌 이 시대의 지성인이야. 그런 편협한 생각,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저기요."
".... 킁, 네?"
"혹시... 그쪽도 쟤랑 사귀다 차였어요?"
정한이 한창 식이 진행 중인 앞을 가리키며 물었다. 훌쩍인 남자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미친. 양다리도 아니고 세 다리?!
"얼마나 만났어요?"
"1년이요...."
제가 미정이랑 만난 기간이랑 비슷하다. 이쯤 되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아니 얘는 이걸 부지런하다고 해야 해 뭐라고 해야 해. 하, 진짜 골때린다.
"어쩌다 만났는데요?"
"제가 그걸 왜 그쪽한테..."
"나도 쟤랑 사귀었거든요. 결혼한다고 차였고."
"네?!"
남자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꽤 크게 놀라 반문하다가 이내 주변의 눈치를 본다. 아이구, 어떡하면 좋아.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인다. 표면적으로 제 처지나 이 남자의 처지나 다를 게 없지만, 정한은 눈앞의 남자를 동정했다.
"우리, 술이나 마실래요?"
*
뷔페는 커녕(남의 집 잔칫날에 개진상 짓 하려다가 둘 다 사회적 체면을 우선시했기에 참았다.) 냅다 열려있는 술집으로 향한 두 사람은 탕 하나만 시켜놓고 소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일 건데 아무것도 모르긴 뭐해서 통성명도 하고 나이도 깠다. 둘은 동갑이었다. 국물이 쫄으면 물 넣고 재탕 삼탕 했다. 그러다가 홍지수가 메뉴판을 훑더니 딸기화채를 먹고 싶다길래 빨개진 걔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걍 시켜줬다(나중엔 정한이 더 많이 먹었다). 아무튼 둘 다 만취했다. 눈앞의 남자는 정한이 취하기 한참 전부터 맛탱이가 갔다. 홍지수는 술자리 내내 욕의 욕을 해댔다. 욕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이 곱게 생겨서 입은 험했다.
"평생 나 밖에 없다더니......"
홍지수가 취해서 중얼거리는 얘기들을 들어보면 그래도 홍지수가 윤정한보다 나았다. 미정이는 윤정한한테 평생 오빠밖에 없다느니 같은 말 절대 안 했고, 사랑한다는 단어 한 번 뱉어본 적이 없으며, 어쨌든 그랬다. 윤정한도 똑같았으면서 은근히 속이 쓰렸다. 진짜 걔도 내 껍데기 보고 만났나 보네.
분명 윤정한이랑 홍지수는 달랐을 거다. 정한은 20대 초반에도 사랑에 열성적이지 않았고, 하물며 나이를 더 먹어 서른이 된 지금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회의적이다. 반면, 홍지수는 미정이에게 사랑 많이 주고 사랑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미정이가 대단했다. 하도 해탈하고 어이가 없어서 그런지 이제는 그냥 '바람도 능력이지'라는 생각이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간도 남들보다 배로 쓰고, 아니다 미정이는 세 배로 쓰고 감정도 세 배 정성도 세 배였다. 윤정한이 받은 쇼크도 세 배.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서비스 개발팀 윤정한입니다."
저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아, 반갑습니다. 서비스 마케팅팀 홍지수입니다."
이직해 온 새 직장에 결혼한 같은 엑스를 두고 있는 사람을 만날 확률을 구하시오. 홍지수와는 미정의 결혼식 날 고주망태가 된 홍지수를 덜 고주망태인 윤정한이 택시 태워 떠나는 모습을 보고 저도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얼결에 번호까지 주고받아 핸드폰에 저장이 되어 있긴 하지만 연락해서 뭐 하겠는가. 딱히 할 말도 없는데.
"너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그러게. 나도 놀랐어."
"....잘 지냈지?"
"그럼. 너도?"
"응."
같이 스모킹 존에서 담배 피우며 몇 마디 나눴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어서 반가웠다. 뭐 좋은 일로 만났다고 그러나 싶지만 그래도 그 하루에 술 마시면서 공유한 게 꽤 많았다. 그때는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고 오히려 비밀이 없었으니까. 과거에 어떤 연애를 했는지까지 알고 있는 사이. 그런데 친하지는 않은 사이. 이제는 직장 동료 사이.
*
윤정한과 홍지수는 잘 맞는데 잘 안 맞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면 서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누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법이 없어서 자주 언쟁을 했고, 장난치는 거 좋아해서 쿵짝이 잘 맞았다. 공교롭게도 정한과 지수는 사적 만남보다 공적 만남이 더 길기 때문에 대체로 안 맞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메인 화면 구성을 아예 바꾸자는 말인가요?"
"네."
"...기한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조쉬."
"네, 하니."
아씨. 내 영어 이름 하니로 하자고 한 홍지수 진짜... 꿀밤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수평적 조직 관계 어쩌고 때문에 직급 대신 영어 이름을 쓰는 회사 방침 때문에 영어 이름 뭐로 할까 고민이라던 윤정한한테 지수는 정한이니까 하니 어때? 하고 미끼를 던졌고, 당시 정말 아무 생각이 없던 정한은 덥석 물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후회만 오질나게 하고 있지만. 홍지수 지는 조쉬고 왜 나는 하니야?! 너무 깜찍해서 돌아버릴 것 같다. 당분간 야근 확정에 홍지수를 노려보니 절대 지지 않고 눈을 마주한다. 얄밉다.
"하니? 할 수 있죠?"
퇴사 말린다.
*
그래도 윤정한과 홍지수는 정한의 입사 후에 금방 친해졌다. 생각도 하기 싫은 같은 과거(?)를 공유했다는 동질감과 의외로 잘 맞는 둘의 대화 코드, 같은 회사의 같은 직급이라는 공통점 등등이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켰다. 덕분에 의외로 낯 가리는 윤정한은(초면에 술 마시자고 하긴 했지만 진짜 가린다) 의외로 인싸 기질 다분한 홍지수의 옆구리에 껴 진 채로 거의 매일 같이 저녁 시간을 함께했다.
"야, 홍지수. 너 진짜 너무한다."
"내가 뭘."
"나는 너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아- 해줬다가, 이거 아니라고 하면 또다시 새로 하고... 엉? 개 힘든 나날을 보내다가 인제야 끝났는데, 너 얼굴 좋아 보인다?"
"어쩌라고 정한아. 그게 네 일이야."
윤정한은 모르겠지만 홍지수도 졸라 고생했다. 걍 피곤이 겉으로 잘 티가 안 날 뿐. 자세히 보면 얘도 판다다. 그렇지만 지수는 구태여 저가 고생한 걸 티 내지 않는다. 나도 힘들다 한탄해서 뭐해.
"쨋든 좆같아. 퇴사하고 싶어."
"로또 두 번 정도 당첨되고 해."
아 홍지수 개웃겨! 로또 두 번... 맞지.. 윤정한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테이블을 팡팡 쳐가며 웃었다. 걍... 애가 이제 미쳐가는 듯. 홍지수는 자신의 관자놀이 옆에 검지손가락으로 원을 두 번 그렸다. 그리고서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소주를 원샷했다. 술이 달다.
"저기요, 번호 좀 주세요."
아까부터 정한의 시선에 앞에 있는 테이블에 있는 여성분이 같이 온 지인이랑 대화하며 이쪽을 흘끔거린다 싶더니 지수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말을 건넨다.
"죄송합니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요."
여자는 다소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렇다고 더 매달리지도 않고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그 이후로 사람 안 만난 지 꽤 됐잖아. 한 번 연락이나 해보지 왜."
"....정한아, 진심으로 묻는 거야?"
"응?"
"진심이야?"
"왜...? 무슨 문제 있어?"
"윤정한, 내 전 애인은 박시혁이야. 그니까 네 전 여친 남편."
"어?!?"
"야, 쉿. ...쨋든 나 게이라고."
윤정한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아, 느낌표도 있을 듯. 어쨌든 지금 충격받았다. 이제까지 저랑 같은 엑스를 두고 있는 줄 알았던 홍지수가 사실을 걔 남편이랑 사귀었고 게이다. 그니까 평생 행복하게 어쩌고 눈물 질질 짜고 욕 졸라 박은 상대가 현 미정이 남편, 전 홍지수 남친이라는 거다. 이럴 수가.
이럴 때 꼭 과거엔 그냥 넘겼던 일화들이 다시금 떠올려진다. 오늘 말고도 홍지수에게 번호 따러 왔다가 거절당한 수 명의 여성분들이라든지, 윤정한이 술에 취해 철없던 시절 했던 연애 같지 않은 연애 얘기 꺼낼 때 그냥 조용히 웃고 넘기던 홍지수라든지, 회사 동료의 아는 언니 소개팅 거절한 홍지수라든지.
연애 상대 기준에 여성이 없으니 당연히 거절의 연속이었던 거다. 정한은 자신에게 커밍아웃한 지인이 홍지수가 처음이라 거기다 대고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씨,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건데. 학교에서 이런 건 왜 가르치지 않는 거야? 망할 공교육.
"정한아, 그냥 그렇구나. 한마디 해."
"응. 그렇구나 지수야."
"근데... 왜 그럼 내가 미정이 가리키면서 물었을 때 맞다고 했어?"
"그때 걔네 둘 다 멀리 앞에 있었고, 둘이 똑같은 사람인지 모르고 당연히 그런 쓰레기는 나한테 청첩장 주면서 미안하다고 한 개새끼인 줄 알았지... 그러다가 너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죄다 전 여친 얘기길래 알아챈 거고. 근데 또 오해였다고 말하기 애매하잖아. 상황이. 어차피 둘 다 뭣 같은 취급 받은 건 똑같은데."
"....... 게이 새끼가 여자랑 결혼은 무슨 씨발..."
"...미정이 불쌍하다."
"윤정한 드디어 진짜로 돌았어?"
"미정이 쌤통이다."
"존나 유치해."
"어쩌라고......"
급 분위기가 다운됐다. 갑자기 텐션이 낮아진 정한이 한몫했다.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상했다 마음이. 잠시 사라졌던 물음표들이 정한의 머릿속에 다시금 채워진다. 의문투성이이다. 그런데, 물음표는 늘어만 날 뿐 없어지지는 않는다. 윤정한이 문제를 해결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
"아... 씨 개무거워 진짜. 야, 너 안 깼어? 네 발로 걸어."
"으응-"
홍지수의 단점은 술을 한 번 마시면 매번 끝장을 본다는 거였다. 주량도 얼마 안 되면서 꼬옥 술을 이렇게. 그래서 항상 윤정한이 들쳐 엎고 데려다줬다. 허리 나갈 것 같다. 이건 홍지수가 윤정한 한의원 데리고 가서 침을 놓아 주든지 도수치료를 시켜 주든지 경락 마사지라도 시켜 주든지 어쨌든 뭐라도 해줘야 한다.
하도 이런 일이 많아진 탓에 홍지수 집 비밀번호는 윤정한에게만 허벌 비밀번호가 되었다. 얼마냐 허벌이냐면 간단하게 둘 생일 합쳐서 *1030 하기로 했다. 어이없다. 미정이랑 사귈 때도 이런 짓 안 했는데 이런 걸 홍지수랑 하고 있다. 당시 홍지수는 앞으로도 이럴 거면 비번 알려달라니까 아무렇지 않게 네 생일 언젠데? 묻더니 냅다 설정했다. 내 생일이랑 네 생일이니까 까먹지 말라는 말과 함께. 당시 윤정한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한 세 개쯤 떠다녔다.
"정한아아--"
"왜, 잠깐 신발 좀."
"고마워."
"뭘 새삼."
"푸흐, 자고 가던가. 손만 잡고 잘게."
"아! 미쳤냐고오- 아저씨 같아."
또 이상한 소리 하네 홍지수. 어렵게 신발도 벗기고 양말도 벗겨 질질 끌어 지수를 침대 위에 눕혔다. 지수가 이불을 덮어주고 떠나려는 정한의 손을 턱, 잡는다. 잘자 정한아. 좋은 꿈 꿔. 윤정한은 언제 깨었냐는 듯 다시 잠든 홍지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평균보다 옆으로 긴 눈, 정갈하게 나 있는 속눈썹, 올라가 있는 입꼬리. 예쁜 얼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정한은 파드득 놀라 지수의 집을 빠져나왔다.
미쳤어. 미쳤어.
*
"윤정한, 요즘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근데 안색이 왜 그래? 요즘 칼퇴 하면서."
"아... 그냥 좀. 피곤하네."
"...정한아."
"어..?"
"문제나 고민 있음 털어놔. 우리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응. 근데 정말 그런 거 아냐."
고민의 당사자한테 어떻게 고민 상담을 해.
윤정한과 홍지수가 거의 매일 같이하던 저녁 식사(술판)를 거른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정한이 요즘 몸이 안 좋아 술을 좀 줄일 필요가 있다는 이유였다. 그럼 굳이 술 안 먹고 밥만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당분간 퇴근하고 집에 가서 바로 쉬고 싶다고 했다. 잠깐일 줄 알았는데 날짜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다. 누가 봐도 홍지수 피하는 걸 그 홍지수가 모를 리가 없는데. 집 가서 바로 쉰다는 놈이 안색이 더 안 좋아져서 출근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오늘은 나랑 얘기 좀 하자."
"어... 그게, 어..."
"딱히 핑곗거리 없으면 그냥 알겠다고 해."
"...알겠어."
*
문제를 해결할 용기가 없는 윤정한 대신에, 그 문제를 생기게 하고 어쩌면 해결해 줄 수 있는 홍지수가 용기 냈다. 정한은 자신의 인간관계에, 특히 연애 감정이 얽힌 관계에는 젬병이다. 이제까지 해온 행동만 보면 사랑으로 겪을 거 다 겪어봐서 회의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윤정한 경험한 거 좆도 없다. 꼴에 외로움은 많이 타서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연애를 해왔을 뿐이었다. 미정이 결혼식에 간 이유도 별거 없다. 그녀를 사랑해서 그 배신감에 복수심에 불타올라 간 게 아니라, 별로 좋지 않은 연애 상대인 윤정한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전 여친들과는 다르게 미정이는 바람 피고 결혼까지 한다고 해서 어이가 없어서 찾아간 거였다. 날 차고 어떤 새끼랑 결혼하는지 얼굴이나 보려고. 단순히 궁금하니까.
"윤정한. 너 게이 싫어해?"
"야, 너는 나를 무슨,"
"그럼 왜 내가 커밍아웃 한 이후로 나 피해?"
결국 저런 말까지 나오게 만들었다. 지수에게 물어볼 게 너무 많다. 항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음표들을 방치한 결과다.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서 뭐 하나 골라내기도 쉽지 않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해야 하는 건 알았다. 편두통이 몰려왔다. 정한은 엄지와 중지로 이마 끝을 꾹꾹 눌렀다.
"지수야 나 요즘 머리가 너무 아파."
"아파? 머리가 어떻게 아픈데?"
아, 쓸데없이 다정한 홍지수. 아프다니까 바로 맞은편에서 정한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따뜻하고 큰 손으로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고 윤정한의 양 볼을 잡아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 그 상태로 정한이 입을 연다.
"너 왜 자꾸... 나 헷갈리게 해? 지수야 나는 이런 쪽으로는 멍청이라 구분이 안 돼. 너 왜 나한테만 이런 스킨십 해? 잘했다고 머리 쓰다듬고 귀엽다고 볼 꼬집고, 냄새 좋다고 품에 대고 부비고. 또 다정하게 밤인사 하고, 가끔 알 수 없는 말로 사람 혼란스럽게 하고, 너네 집 비밀번호는 왜 우리 생일로 바꾼 건데? 그냥 원래 네 비밀번호 알려주면 됐잖아. 그리고 또, 또......"
"정한아, 울지마."
지수는 엄지손가락만 움직여 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닦아 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그냥 네가 다정한 사람이구나 했어. 주변 사람에게 사랑을 줄 방법을 아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원래 친구 관계에도 이러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 친구들이랑 이러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너는 그냥 그런 사람이구나 했다고. 그런데, 네가 게이라고 한 뒤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야. 그치만, 게이라고 해서 모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너한테 나 좋아하냐고 섣불리 묻는 것도 실례니까......"
"혼자 고민 많이 했네. 머리 아플 만했네."
"응..."
"그래서, 정리는 됐어?"
"조금...?"
"그럼 물어봐. 대답해 줄게."
".........홍지수, 나 좋아해?"
"응. 좋아해."
삐- 어디선가 잡음이 들린다. 시공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어쩌면 둘 다 예상했던 일이다. 정한에게는 외면하고 싶었던 상황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껏 떠오르는 모든 물음표를 그냥 방치했다. 의문이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하면서 해결하지는 않은 채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확실하고 안정적인 거 좋아하는 윤정한에게 지금 이 상황은 조금 버겁다. 그렇지만 놓아버리고 싶은 버거움은 아니다. 양가감정이 마구 솟구친다.
"아직 나는 혼란스러워."
"응. 알아."
"조금만 시간을 줘."
*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한은 정말로 기다리기만 하는 홍지수가 조금 미웠다. 제가 먼저 거리를 두고 시간까지 달라고 했으면서, 막상 멀어지니 아쉬운 감정이 생기는 걸 보니 인간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다 싶었다. 거의 매일 같이 퇴근 후에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사라지니 빈자리가 꽤 컸다. 주말에 메신저 확인을 안 해도 제 집 앞까지 찾아와 알아둔 맛집에 끌고 가는 홍지수의 뒤를 귀찮은 척 따라갔던 기억이 떠올라 그리웠다. 이렇게 매일 홍지수 생각인데 이번에도 용기가 나질 않는다.
홍지수다. 기뻐야 하는 금요일 칼퇴인데 그마저도 의미가 없어 아무 생각 없이 회사를 빠져나왔을 때다. 너무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지수는 어떤 남자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나 웃긴 얘기를 하는지 앞 사람의 팔뚝을 두어 번 툭툭 치기도 한다. 남자는 휘청거리는 지수의 팔을 잡아 바로 세워주기도 한다. 끼기도 뭐하니까 둘을 그냥 지나친다.
"윤정한!"
"지금 퇴근하는 거,"
이번에도 홍지수에게 선수를 빼앗긴 윤정한은 한숨을 한번 푹 내쉬며 뒤를 돌아본다. 머리카락을 팔락이며 저에게로 달려오는 지수를 바라본다. 사랑스럽다. 그래, 너는 사랑스럽다. 제 앞에 멈춰서는 부-하게 튀어나온 젤리 같은 입술로 말을 한다. 지수의 앞으로 크게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기고, 비슷한 높이인 홍지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처음엔 당황한 듯한 지수는 이내 마주 안아 등을 쓸어 준다.
"나 고백 해본 적 없어."
"응."
"형편없는 연애는 많이 했어도 절절한 사랑을 해본 적도 없어."
"......"
"지금 무슨 말을 꺼내야 괜찮아 보일지 모르겠어."
"아무렇게나 해. 괜찮게 봐줄게."
"......우리집 비밀번호 *1030이야."
"진짜 아무 말이나 하네."
"좋아해."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도 나 많이 예뻐해 줘. 잘했다고 귀엽다고 머리도 쓰다듬고 볼도 꼬집어줘. 좋은 향기 맨날 나도록 노력 할 테니까 이제는 계속 내 품에 안겨줘. 다정한 밤인사는 나도 같이해볼게. 주말에 갈 맛집도 같이 찾아보자. 나도 너를 많이 사랑해 볼 테니까 너는 지금처럼만 나를 사랑해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