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추적추적 내려 우산에서는 빗줄기가 흘러내려 왔다. 정한은 계속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지수는 그걸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를 이 사이는 1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시작한다. 10대에 서로를 좋아했고 20대에 사랑한 둘은 앞으로가 평생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보관한 이 관계에는 녹이 슬었고 나중엔 점점 부서졌다. 처음엔 정한은 무릎을 꿇었지만, 지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 행동하는 것처럼 일어나라는 말만 말하다 나중엔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한은 그제야 일어섰다. 제대로 미안하다는 말도 채 하지 못하고 그저 안녕을 빌어줘야만 했다. 지나간 세월이 아쉽게도 그렇게 끝을 맞이했다.
“우리…. 진짜 헤어져야겠다.”
“그래.”
애써 담담한 척하는 서로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었다. 정한은 눈물을 삼켰고 지수는 뒷말을 삼켜야 했다. 네 덕분에 그래도 행복했다는 말이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로의 등은 보지 못했다. 동시에 다른 길로 몸을 틀었다. 마치 서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아메리칸 블루
#1-1
이혼 후 정한은 한동안 바빴다. 홍지수의 남은 흔적들도 지워야 했고 새로 시작된 프로젝트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에 제대로 눈을 붙여본 적이 없었다. 정한은 퇴근 뒤 조금씩 물건들을 정리했다. 폴라로이드 사진과 홍지수가 좋아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버렸다. 그 사이에서 추억이 생각나 미칠 것 같았고, 물건을 핑계로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말았다. 여기서 애절하게 굴어봤자 싸늘한 얼굴로 저를 외면하는 홍지수에 상처만 받을 것이다. 정이 많고 다정한 홍지수에서 이젠 헤어진 사람 얼굴도 안 보려는 홍지수는 참 나쁘고도 좋았다. 정한이 집을 다 정리했을 때는 12시가 넘어있었다. 원래라면 1시간도 안 걸렸을 텐데 홍지수 생각에 몇 시간이 더 걸렸다. 당연하던 것들이 사라졌던 이 순간에도 새로운 거처에서 적응이나 잘하고 있을지 걱정되는 저가 미웠다. 헤어진 마당에 왜 또 걱정인지. 예전에 싸워서 잠깐 또 헤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지금과 다를 게 없었다. 그땐 집까지 찾아가 문 앞에서 한참을 무릎 꿇고 있었다. 지금은 그래봤자 어림도 없겠지만.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맥주 한 캔으로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소파 위 미처 정리하지 못한 꽃씨가 담긴 봉지가 보였다. 지수가 키우려다가 만 꽃임이 틀림없었다. 이 꽃씨마저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아니, 어떻게 본다면 지수의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다음날 일어나 화분과 흙을 사 왔다. 열심히 검색해 물도 주었다. 꽃이 다 필 때면 지수를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2
처음으로 정한의 생각이 나지 않은 날이라고 생각할 무렵, 또 정한의 생각을 해버린 지수였다. 염치없지만 왜 이리도 외로운지. 정한이 자신을 쿨하게 보내버린다면 그것만큼 자신에겐 슬픈 일이 없을 것이다. 네가 뭔데 나를 벌써 잊니. 우리가 함께 보낸 세월이 얼만데. 정한은 가장 친한 친구였고 제일 소중한 존재였었다. 그리고 함께면 평생을 산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늘 견해차로 싸웠고 뒤틀린 마음은 서로를 지치기 만들기 좋았다. 지수는 더는 견딜 수 없었고 결국 정리를 원했다.
서로의 마지막은 정한이 본 것처럼 후련하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지쳤다. 잠을 청하기 전에도 함께한 시간은 생각났고 잠에 빠져도 꿈엔 정한이 나와 끝까지 저를 괴롭혔다. 이제 와서 붙잡는다면 그건 저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은 생각보다 정한을 많이 사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본다면 정한은 어떤 모습으로 마주할까. 저를 본 것을 싫어할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대해줄까. 잘살라는 말은 정한의 진심이 맞았을까.
때론 생각이 많은 게 좋을 때가 있다며 위로해준 정한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으로선 전혀 아니다. 사소한 기억들조차 모두 정한과 연결되어있어 더 생각이 많아지게 한다. 위태로울 때의 자신을 붙잡아준 게 정한이었지만 다시 부서진 마음을 가지게 한 것도 정한이라 평소답지 않게 서툴러지고 로봇 같아진다. 차가운 자신의 손을 매만져줄 사람이 곁에 없다는 건 홍지수의 생각보다 훨씬 슬픈 일이었으니까.
#2
우연히 정한은 점심시간에 카페에서 홍지수를 봤다. 헤어진 지 2달 후였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와 자몽에이드를 시키고 서로를 마주했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생기가 넘쳤다. 씁쓸한 맛이 나는 자몽에이드는 홍지수와 퍽 잘 어울렸다.
“어떻게 지냈어?”
지수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애써 담담한 척하는 모습이 정한에겐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나야 뭐. 잘 지냈지. 넌?”
다 죽은 눈으로 그런 말을 하니 신빙성이 없었다. 볼이 푹 패 있는 게 지수는 한심했다.
“조금 바빴어.”
너 생각에 허덕이느라. 지수는 헤어졌던 그때처럼 또 뒷말을 삼켰다.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마치 네가 이렇게 앞에 있기만 해도 괜찮다는 것처럼.
#3
정한의 꽃씨는 이젠 새싹이 되었다. 푸릇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가 없는 여름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함께 에어컨을 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텅 빈 거실에는 정한과 시끄러운 티브이 소리만이 함께했다. 빈자리를 채우고자 티브이를 틀었지만 조용하게 느껴졌다.
지수는 그사이에 다른 사람을 만나보았다. 동기가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고 하여 소개해준 그 사람은 참 멋졌다. 말투는 조곤조곤하고 목소리도 좋고 키도 훤칠한 사람이었다. 같이 밥을 먹고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아픈 상처들을 공유했다. 그 사람도 다른 사람과 이별했고 지수의 과거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며 다정하게 말하고는 자신의 품에 파고들게 했다. 참 바보 같게도 그 모습에 정한이 보였다. 나도 네가 첫사랑이라며 서투른 건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이대로 나를 사랑만 해달라며 안아주었던 정한이 생각나 애써 그 사람을 밀어냈다.
이럴 땐 정한에게 달려가고 싶었고, 그건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왜 아직도 잊지 못할까.
#4
쓰였다가 지워진 메시지는 여전히 보내질 못하고 손가락은 아직도 허공을 맴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상대가 저를 잊을까 아직도 불안했다. 왜 너의 연락을 먼저 기다리는지에 대한 의문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은데 입 밖으로 꺼내거나 적기엔 부족한 마음이었다. 혼자 걷는 길이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복작거리는 도로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듯이 함께한 추억들은 시시때때로 생각났다.
노래를 들으면 생각이 조금이라도 정리될까 해서 들여다본 플레이리스트는 서로가 가장 좋아했던 곡들로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5
헤어지고 전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야 겨우 버틸 수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짓다가도 이젠 조금이라도 지울 수 있다는 것에 위로를 얻었다. 정한은 웃으며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고 지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자꾸 꿈엔 서로가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아파하고 꿈에서 깨면 그게 현실일까 우울해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잊은 거다. 그래야만 했다.
#6
빛바랜 기억 사이에 욕심만 커지어서 마음이 아픈 하루다. 연락이 여전히 오지 않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정한은 일상 속에 괜히 한 번 보고, 지수는 가끔 생각나면 둘이 했던 대화를 곱씹었다. 그러다 서로 마주하면 이젠 행복을 빌어줘야만 했다. 옆에 있는 그 사람이 자기보다 잘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정한은 뒤를 돌았다. 작은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던 지수는 그런 정한의 뒷모습만 씁쓸하게 바라봐야 했다. 그날 마셨던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유난히도 쓰고 시원했다.
#7
“미안해, 지수야.”
그 사람은 아직도 저가 전 애인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실에 부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보냈다. 이별 통보는 언제 들어도 슬프다. 흘린 눈물이 그날의 비와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잘 모른다. 이 정도면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사랑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8-1
지수의 그 사람이 정한을 불렀다. 인스타 메시지로 지수의 애인이라며 술집에서 만나자 했다. 처음엔 미심쩍어 고민했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은 재미있게도 정한과 전혀 다른 얼굴과 몸매였다. 이런 사람이나 만나고 다녔다는 게 신기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그새 취향이 바뀌었다 싶기도 하고, 어쩌면 저가 취향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 좋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죠.”
그 사람은 술을 따른 뒤 마시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 헤어졌어요”
“그래서요.”
그 사람은 웃음을 짓고는 다시 한번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당신 잊지 못하는 것 같던데?”
정한은 그 사람을 계속 주시했다.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이.
“지수가 당신이랑 했던 대화를 계속 보더라고요. 인스타도 보고. 이러면 딱 드는 생각이 있지 않나요? 난 미칠 것 같더라고. 언젠간 잊겠지 하면서 기다렸는데 아직도 당신을 많이 사랑하더라고요. 당신도 그런 것 같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정한의 앞에 보여주었다. 차마 지우지 못한 지수와의 사진이 게시글로 올려져 있었다. 정한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고는 다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수한테 잘해줘요. 더 할 말은 없어요.”
그 사람은 일어나 정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한은 애써 미소를 지으고는 술을 따라 마셨다. 바보 홍지수. 이랬을 거면 왜 사람을 만나고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하는데. 안도감에 젖을 무렵 정한은 지금이라도 당장 지수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마 지우지 못한 전화번호를 찾아 연결음이 어서 끊기길 기다렸다.
#8-2
정한에게 전화가 왔다. 벨 소리는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전화를 거절하고 무시해도 계속 왔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헤어진 지도 1년이 다 되어가려는 시점에서 처음으로 오는 전화가 미웠다. 마음의 문은 아직도 수리 중이지만 문을 계속 두드리는 정한의 존재는 더 이상의 미련을 용납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잠깐만 보자. 제발….”
#9
맞이한 정한의 모습은 낯설었다. 눈물을 흘리고 양손은 주머니에 있는 채 몸을 채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지수는 숨을 고르고 정한에게 다가갔다. 정한도 그런 지수를 의식했는지 바로 고개를 들고 주머니에 손도 빼 가만히 서 있었다.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기에 지수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간의 아픔들을 다 잊은 것처럼 정한이 없어도 괜찮다는 듯이 행동했다. 정한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로 멈춰서자 정한이 말을 하려다 만 듯이 망설이고만 있었다. 너무 답답해진 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나한테 이제 기회 더 없는 거야?”
지수가 자신을 아직 그리워한다는 걸 알아도 괜한 마음에 말을 던졌다. 지수는 한숨을 쉬고는 마음을 추슬렀다.
“우리 끝났어. 너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정한아?”
“너 아직 나 좋아하잖아.”
지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한이 말했다. 지수의 마음이 찔리듯이 아팠다. 정한은 늘 아픈 곳만 찔렀다가 다시 약을 주고는 했다. 이기적이고 다정한 그런 사람. 정한이 다시 준 약들은 지수에게 잘 맞았기에, 더더욱 정한을 피하기 어려웠고, 간직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간직하기 힘들었다.
“안 좋아해. 다 잊었어.”
괜한 지수의 자존심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사이에 이렇게 깔끔하게 잊는 건, 더군다나 정한 자신이라면 홍지수는 잊을 수 없다. 정한이 생각하는 지수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틀리지를 않았다. 정한은 조금 고민하고 난 뒤 말을 꺼냈다.
“네 다른 전 남자친구가 찾아오더라. 걔는 네가 나를 못 잊었다는데.”
“걔가 오해한 거야. 나 이제 가도 돼?”
상황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게 될 리가 없다. 정한은 고개를 저으며 지수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지수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 채 미간을 찌푸렸지만 정한은 그런 지수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속은 타들어 갈 것 같았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다시는 이렇게 마주할 수 없을까 봐 애써 태연한 척 연기했다. 연기는 썩 괜찮았는지 지수는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오해면. 너 지금 표정은 뭔데.”
지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랑 10년이야. 이것도 모를까 봐?”
다 들켰다. 애써 담담한 척 행동한 것도, 아직도 정한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사실도.
“나 진짜 기회 없어?”
정한의 목소리에서 떨림도 함께 들렸다. 지수의 손을 붙잡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지수는 정한과 잡은 손을 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린 피 맛이 조금 느껴졌다.
“내가 너를 잊으려고 해도 나는 자꾸 너만 사랑하잖아.”
지수가 울먹이며 말했다. 정한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만 갔다.
“그래서 왜 거절했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면 뭐가 달라져. 또 헤어지고 만나게? 넌 그게 좋니?”
정한이 지수의 손을 고쳐잡았다.
“너나 나나 똑같아. 아직 서로 못 잊었잖아.”
“......”
“좋으면서 또 튕기지 마. 사람은 변할 줄도 알아야 되는 거야. 지수야.”
#1
지수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코를 훌쩍이며 얼굴이 눈물에 젖었다. 사람이 변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여전히도 정한은 똑같았다. 지수가 먼저 정한의 품에 파고들자 정한은 그런 지수를 능숙하게 받아내 주었다. 등을 쓸어주고 똑같이 눈물을 흘렸다. 감정이 이토록 격해질 줄은 몰랐다. 정한은 일단 지수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지수는 정한의 차에 타고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코를 훌쩍였다. 그런 지수가 귀여워 웃을 때면 한 번씩 정한을 흘겨보고는 했다.
지수와 손을 잡고 현관으로 들어오니 공기가 달라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었을까. 지수는 오랜만에 오는 집에 자신의 흔적들이 사라지니 어색했지만, 정한과 자신이 헤어져 있던 시간을 나타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떫어졌다. 눈치 빠른 제 애인은 지수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지만, 기분이 다시 이상해졌다. 씻고 오겠다는 정한을 뒤로하고 집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창가에는 보지 못했던 화분에 아메리칸 블루가 활짝 피어 있었다. 이별 전 자신이 키우려다 두고 간 아메리칸 블루의 꽃씨가 분명했다. 몇 분 뒤 정한이 젖은 머리를 매만지며 나타나자 지수는 지긋이 화분을 보며 말했다.
“저 꽃, 내 꽃씨 맞지.”
정한이 그대로 굳었다. 그런 정한을 힐끔 보고 웃음을 참았다.
“어, 그게…. 미안.”
“아니야. 내가 두고 갔는데. 근데 왜 심은 거야?”
“저 꽃 필 때 너 잊을까 해서.”
“꽃말 때문에 못 잊었나 보다.”
꽃말? 정한이 눈썹을 추어올리며 되물었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서 정한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정한은 흥미로운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정한의 앞에 다다르고 지수가 정한의 목에 팔을 감자 정한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두 사람의 인연이래. 꽃말이.”
“우리가 인연인가 보지?”
“아무래도.”
지수가 정한에게 입을 맞추고 정한의 손은 지수의 허리로 가 입맞춤은 점점 더 진득해졌다. 창밖의 달이 유난히도 반짝여 어두운 방을 비췄고, 거실은 그 둘의 온기로 가득 채워졌다.
인연은 거부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다. 꽃은 그걸 말해주었고 둘은 그 꽃의 말처럼 될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설령 다시 흔들린다 해도, 인연은 그대로일 테니까.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