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fgebluht


오버 페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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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fgeblüht [개화]

 

: the saga of yoonhong

 

 

 

 

 

 

 

 

 

 

나는 늘 지나가는 계절 따위는 모르는 것처럼 찬란하지도 않은 과거에 얽매여 살았다.

 

그리고 걔는 내 추억 속 유일한 여름이다.

 

 

 

지나간 일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여름이 주로 그랬다. 사람들은 녹아버릴 것 같은 뜨거운 날씨와 등에 줄줄 흐르는 땀, 숨 막히고 불쾌한 습도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이미 지나가 버린 여름을 청춘이었다며 포장한다. 눈부신 햇빛과 높고 파란 하늘, 시원한 나무 그늘만 기억한 채로 말이다. 난 머릿속에 질문을 하나 떠올린다. 그렇다면 내가 추억하는 여름도 미화되었나? 내가 여태껏 지나왔던 여름은 모두 허상인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허황된 꿈이고 왜곡된 청춘이라 해도 난 한 평생 그 찰나의 여름을 놓지 못 할 것이다. 그게 내 사랑이고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남들보다 좀 더 이른 12월 중순에 종강을 했다. 대입 실기 시험 날 엎은 물통의 물처럼 쏟아지던 기말시험과 과제는 저번 주 이후로 완전히 끝이 나 간만에 찾아온 여유였다. 그 뒤로 온종일 집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잤긴 하지만. 슬슬 집에 있던 즉석식품들이 다 떨어져 가니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약 3일 만에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온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야작하고 시험공부 한다고 학교에만 박혀있었으면서, 끝났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 꼴이 웃겼다. 자취방에서 작업실까지 가는 길은 도보로 20분이 넘게 걸렸다. 찬 바람에 눈동자가 시려 틈틈이 눈을 꾹 감고 걸었다. 크리스마스가 곧이라 거리는 색색의 작은 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따금 비관으로 똘똘 뭉쳐진 생각이 버릇처럼 머리를 덮쳤다. 미안합니다. 다들 행복하세요.

 

나름 번화가에 자리 잡은 작업실엔 사람이 없었다. 있어봤자 고작 한둘이 다였겠지만 늘 있던 사람들이 없으니 조금 쓸쓸했다. 그래도 우중충한 자취방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아 그나마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시계는 곧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바깥도 아까보다 더 소란스러워 진 것 같았다. 원래라면 자기도 사람들 틈에 끼어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종강하고 나서 곧바로 폰을 꺼놓고 아직까지 켜질 않아 약속 없이 혼자 있는 게 다였다. 사람들을 구경하다 창문을 닫고 겉옷을 벗은 뒤 고무줄로 대충 머리를 묶었다. 거울을 보니 요란한 푸른 머리칼 밑으로 검은 뿌리가 자라나고 있었다. 조만간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다 잘라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팔을 걷고 펜을 들었다.

 

 

 

윤정한은 꽃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작업실 지천엔 죄다 꽃이 그려진 캔버스며 갖가지 종이들이 널려있었다. 타투도 작업하는 거라곤 꽃과 레터링 도안이 전부였다. 물어보면 언제나 다른 걸 말하려는 듯 고민하다가 결국엔 사람들한테 잘 팔려서라고 속물적인 답만 했다.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윤정한이 그린 꽃들은 주인을 닮아있었다. 쟤를 닮은 게 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냥 그랬다.

 

 

 

아, 정신 차리고 보니 붓이며 팔레트며 온통 검은색이었다. 가끔 생각에 잠기면 나오는 이상한 버릇이었다. 색을 만든답시고는 자각도 없이 손 가는 대로 섞어버리는 언제부터 생긴 지도 모르고 되도 않는 버릇. 머리가 맑아지긴 무슨, 착각도 그런 착각이 따로 없었다. 히터 때문에 후덥지근한 공기가 기분 나빠 그냥 다 내버려 두고는 옷도 안 걸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추웠다. 무신사에서 산 하늘하늘한 재질의 무지 긴팔티 사이로 바람이 몸을 훑었다. 겉옷이라도 입고 나올 걸. 다시 들어갈까 생각 했지만 가서 또 똑같은 짓 하고 있느니 얼어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쭈그려 앉아 고개를 팔에 기대 푹 숙이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곁눈질 했다. 눈에 보이는 장면들이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자꾸 끊겼다. 그대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머리통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쯤에야 고개를 들었다. 느슨해진 고무줄이 흘러내려 긴머리를 다 풀렸다. 머리를 넘기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대로 앞을 향해 고꾸라질 뻔했다. 익숙한 잔상에 머릿속에 떠오른 그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이러면 안되지만 못 볼 걸 본 듯한 기분에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나 지금 대체 무슨 표정 짓고 있니.

 

 

 

"정한아."

 

 

 

5년 만에 찾아온 홍지수가 무섭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제일 싫어하는 세 가지를 말하라 하면 언제나 답답한 거, 따가운 거, 추운 거를 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누가 여름이 좋냐 겨울이 좋냐를 물으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겨울이라 답했다. 겨울은 적어도 네가 내게 안겨준 기억이 여름보다는 적었으니까. 추위보다 여름만 되면 불현듯 떠오르던 네가 차지하는 모든 기억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었는데. 지구가 태양을 다섯 번이나 도는 동안 나타난 적도 없으면서. 너는 날 몇번이고 체념하게 만들었던 그 눈빛과 목소리 그대로 나의 계절을 뒤집었다. 겨울 날씨 때문인지 발목이 시큰거렸다. 나 여기서 네 손 잡고 네 어깨에 고개 처박은 채로 보고 싶었다고 하면 미친놈 되는 거지?

 

 

 

"정한아."

 

 

 

네 입술을 거쳐 나오는 글자가 내 이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근데 너는 그대로라서. 온 몸에 한기가 서린다.

 

 

 

"...어."

 

"오랜만이야."

 

 

 

내가 살아온 세계가 온통 거짓말인 것처럼 굴었다. 나는 여기서 어떡하면 좋지. 홍지수가 힘없이 늘어진 내 손을 잡았다. 손에서 전해져 오는 차가운 온기가 머리 끝까지 스며들었다. 왜 왔어, 여긴 어떻게 안 거야, 그동안 내 생각 안 했어... 아까 형형색색으로 섞어 만든 검은색 물감에 목이 매인 기분이었다. 그거 진짜로 먹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그때 홍지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싱긋 웃어 보였다. 아니, 저걸 웃었다고 해야 하나.

 

 

 

"나 타투 하나만 해주라."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어머니를 따라간 삼촌네 빙상장에서 홀로 걷다 넘어진 거, 그게 다였다.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라는 실내 빙상장은 아직 어린 나에게 너무 버거운 풍경이었고 호기심에 나는 그 얼음덩어리에 발을 내디뎠다. 나는 그날을 후회하진 않아도 하필이면 그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처음의 기억이란 게 날 사무치게 만들었다. 넘어지고 나서 아팠던 건 기억 안 나지만 그 순간 마주한 창문으로 햇빛이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나를 비추었다. 아마 내가 빙판 위에서 빛났던 순간은 그때 한 번이 끝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날 피겨 스케이팅 국가대표로 키우고 싶어 하셨다.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판 위를 거닐었던 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도 피겨 스케이트 타는 것을 좋아했고 잘 따랐기에 모두가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나만의 궤도를 도는 일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 내 발목은 자기 혼자만 너무 고귀했다. 평상시에 남들 다 하는 만큼 쓰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는데 본격적으로 꾸준히 쓰면 안된다고 하셨다. 이게 뭔 개소리야. 그 상황에서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날 이후로 난 훈련을 그만뒀다. 그때의 기분은 어땠나 잘 모르겠다. 정말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슬펐던 것 같다. 그만뒀다고 다시는 못 타는 것도 아니고. 꿈 하나에 절절 매기엔 너무 어렸다.

 

학교가 끝나면 예전에는 나의 훈련장이었던 삼촌네 빙상장에 늘 가서 하는 거라곤 없이 앉아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하루가 멀다하고 거기를 들락거리는 걸 좋아하진 않으셨지만 바쁘셨기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두셨다. 워낙 크고 유명한 곳이라 구경할 사람도 언제나 있었고 삼촌이나 직원 분들 하고도 나름 친했기 때문에 다행히 집에 혼자 있는 것 보다는 덜 심심했다.

 

 

 

그날은 학교 책가방을 훈련장에 두고 와서 저녁 늦게 다시 발을 옮기던 중이었다. 불이 다 꺼진 줄 알았던 실내는 아직 밝았고 공기 중에 얼음이 날에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직도 연습하는 사람이 있구나. 가방은 진작 다 챙겼지만 누군가 있다는 사실에 왠지 떠나기가 싫어 관객석에 올라가 앉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눈에 담았다. 이 시간까지 남아서 연습을 하길래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일 줄 알았는데, 암만 봐도 내 또래로밖에 안 보이는 남자애가 그 넓은 빙판을 홀로 누비고 있었다. 나도 아직까지 배우고 있다면 분명 저런 모습이었을까. 1년도 채 안 되는 스케이트와의 추억을 문득 떠올리니 정말 별거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뇽."

 

 

 

내 목소리에 걔가 놀랐는지 흠칫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나 위에 있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다.

 

 

 

"...?"

 

"난 윤정한인데, 이름이 뭐야?"

 

"홍지수... 인데."

 

"몇살이야? 6학년?"

 

 

 

지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변화가 없던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매일 이 시간에 연습하러 와?"

 

"다른 시간에도 오긴 하는데... 혼자서는 이 시간에만 타."

 

"그렇구나."

 

 

 

이런 건 왜 물어보지 하는 눈빛이었다. 피겨화랑 가방을 들고 있는 걸로 봐서는 이제 다 끝나고 집으로 가려 하는 참에 내가 부른 것 같았다. 나는 앞 의자에 팔을 걸치고는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했다. 지수는 마지막까지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선 자기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 봐 지수야."

 

 

 

지수가 나가고는 나도 가방을 챙겨 다시 내려왔다. 집에 가는 길에는 신발장 구석에 있는 피겨화의 날을 갈아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그새 또 작아졌진 않을까 고민하며 간만에 들뜬 기분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난 그렇게 무더운 열대야 속에서 그 애를 처음 만났다. 또 보러 올게.

 

 

 

 

 

 

 

 

 

당연한 사실이지만 지수는 국가대표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루에 거의 10시간씩 연습만 한다고. 이번에 이쪽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어 원래 다니던 훈련장에서 우리 삼촌네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익숙하지 않았구나. 학교도 거의 못 나가는 편이라 또래인 나랑 친해진 게 좋다고 지수는 웃으며 말했다. 훈련하느라 바빠 실질적으로는 가끔 쉬는 시간에 이야기하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지수는 힘들어도 빙판 위를 가르며 스케이트 타는 걸 좋아했고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게 좋았으니까. 지수가 훈련을 쉬는 일요일에는 가끔 둘이 만나서 놀기도 했다. 얘랑 친해지면서 알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피겨를 시작했고 이미 전국대회에서 순위권을 딴 적이 두 번이나 있다는 것, 트윅스 초콜릿을 꽤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면 피어싱을 뚫고 싶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정한아, 혹시 너도 피겨 했었어?"

 

"...아니? 왜?"

 

"너 스케이트화 따로 있는 것 같아서. 그럼 그건 뭐야?"

 

"그냥 취미야. 맨날 거기 틀어박혀 사는데 심심해서."

 

"아하."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걸 배웠다고 하기에도 조금 그렇고 스케이팅이 취미는 맞았으니까. 취미라기 보다는 미련의 일종인가. 그리고 아무래도 했다고 곧이곧대로 말하면 왜 지금은 안 하냐는 말이 딸려왔을게 뻔한데. 난 굳이 지금 잘 하는 애한테 나는 너와 달리 선천적인 신체의 한계 때문에 그만뒀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방학 때 같이 놀아줘야 해, 알겠지? 약속."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꾹 찍었다. 지수는 겨울방학 동안은 훈련을 잠시 쉰다고 했다. 아마 이번에 쉬면 다음에 길게 쉬는 날은 10년 뒤가 될지도 모른다고. 아예 훈련을 안 하는 건 아니고 틈틈이 가서 몸이 굳지 않게 해주기는 해야 한단다. 그렇게 타러 갈 때는 너도 같이 하자. 그럴까... 빨리 방학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신던 게 작아져서 새로 산 피겨화의 끈을 단단히 매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처음 신어 티 없이 하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취미라고는 했지만 이게 얼마 만에 타는 스케이트 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직 지수가 오기 전이지만 괜히 붕 뜬 마음에 혼자 단단한 얼음판에 스케이트 날자국을 새겼다. 오랜만이라 낯설지만 예전에 느꼈던 익숙한 감각이 훅 끼쳐왔다. 불가피한 현실을 잊고 되찾은 나의 꿈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날을 떠올리며 온통 닳아버려 구질구질해진 후회를 내뱉는다.

 

 

 

그날 뒤로 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매일같이 스케이트를 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안다. 한참이 지난 아직도 외면하고 싶을 뿐이다. 지수는 내가 갑자기 이러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아해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게 눈에 보였다. 며칠이 지나니 발목에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적당히 무시하고 다음날이 되면 알아서 사라졌었다. 피겨화를 신을 때마다 일부러 신발 끈을 세게 조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답지 않게 멍청한 짓이었다. 한 달 정도 그 짓거릴 반복하니 당연한 일이지만 내 발목은 아작날 대로 아작이 나 있었다. 개학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친 듯이 아프더니 결국엔 학교까지 빼먹고 정형외과를 갔다 왔다. 부모님이 우셨다. 내가 얼음판에 그은 선 뒤로 미루어 놓았던 현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절대 아닐 거란 걸 생각의 저 너머에서는 알았지만 그때와 지금이 다르길 빌었다. 조금이라도 크면 다 나아질 줄 알았다. 다시 해도 괜찮을 것 같았고 괜찮다고 느꼈다. 이 모든 게 착각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하지 말걸 그랬어. 내 어릴 적의 아름다웠던 꿈이 상실로 가득 찰 줄 알았다면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걸. 아니었다면 그저 작은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었을 텐데.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눈이 내리던 졸업식 날 지수랑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지수는 방학 동안 다 쉬었으니 다시 하루에 12시간씩 훈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지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왜 다시 피겨를 자주 안 타냐는 말에는 대충 둘러대니 그렇구나 하고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재미있었다고 해주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지수 어머니께서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셔서 둘 다 나란히 꽃다발과 졸업 앨범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지수야."

 

"응?"

 

"너는 꼭 올림픽 나가서 금메달 땄으면 좋겠어."

 

"갑자기?"

 

"꼭 따야해. 그리고 티비에서 내 이름 불러주라."

 

 

 

하나 둘 셋-

 

찰칵.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셔터음이 울렸다. 눈물 같은 건 나오지도 않는다. 지수는 처음 만난 그날처럼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는 손을 흔드는 나에게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보기야 하겠지만 나는 꼭 마지막인 것처럼 말을 건네고 인사를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또 보러 갈게.

 

 

 

 

 

 

 

 

 

중학생이 됐다고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지수는 여전히 학교에 잘 나오지 못했고 나는 이따금 훈련장에 가서 스케이트를 타는 지수를 한참 바라보다 집에 들어가곤 했다. 평범했지만 잘못 끼워맞춘 퍼즐처럼 어딘가 어긋난 일상의 연속이었다. 발목은 이제 아프지 않았고 지난 날의 상실도 굳이 애를 써서 잊으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시간 날 때 삼촌네 빙상장에 가는 것도, 앞으로 녹슬지 않을 피겨화의 날을 가끔 정리해주는 것도 그냥 그런 이유로. 생각보다 나는 괜찮았다.

 

지수가 또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그즈음부터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아예 이쪽으로 길을 정하려 하는 중이었다. 어쩌다가 몇 번 씩 친구가 다니는 화실을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붙었다. 어떻게 보면 캔버스에 선과 물감들을 긋는 게 빙판에 날을 긋는 것과 같이 피겨랑 비슷해서였을까. 내게 남는 시간을 빙상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과거로부터 도피하려고 충동적으로 벌인 행동들은 아니었지만 요즘 바빠? 잘 못 오네 하며 말하는 지수에게는 이따금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어차피 지수는 내 발목이 아픈 것도 몰라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하면 속에서부터 숨이 턱 막혀왔다. 난 언제쯤 모든 것으로부터 떳떳해질 수 있을까 지수야.

 

 

 

 

 

 

 

 

 

[정한아]

 

[자?]

 

[보고싶어]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한밤중에 울린 비상벨을 듣고 잠에서 깬 기분이었다. 지수는 일주일 전 늦은 새벽 내게 문자 세 통을 보내고는 그대로 연락이 끊겼었다. 새벽에 이런 문자를 괜히 보낼 애가 아녀서 일어나 문자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수신음만 늘어지는 걸 반복할 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훈련장에 찾아가도 지수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다들 선뜻 대답을 해주지 못하거나 모른다고 했다. 집에 찾아가 벨을 눌러봐도 아무도 없다는 듯이 고요했다. 저렇게 문자만 띡 남기고 사라질 거면 나보고 어쩌란거야. 갈 곳 없는 짜증과 동시에 걱정과 불안은 틈만 나면 머릿속에서 홍지수의 얼굴과 함께 일렁였다.

 

그러기를 일주일. 다시 월요일이 찾아와 학교를 가니 늘 비어 있던 자리에 지수가 앉아있었다. 홍지수가 앉아있었다.

 

 

 

"야 너...!"

 

"아, 정한아."

 

 

 

홍지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얼굴로 날 반겼다. 그 얼굴과 함께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문자는 왜 한 거야. 왜 연락 안 받았어. 훈련장도 안 나왔잖아. 만나면 묻고 싶었던 말들이 목 끝까지 터져 나왔다가 입안에서 흩어졌다. 다시 주워 담기엔 내가 너무 슬플 것 같아 관뒀다.

 

 

 

"날씨 춥다. 그치."

 

"응..."

 

 

 

너랑 같이 있으면 지독하게 추운 여름이 함께 머물렀다.

 

 

 

지수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학교에 나왔다. 원래는 시험 날이나 개학식 방학식 등 꼭 필요할 때만 오던 애가 졸업 두 달을 채 안 남겨 두고 꼬박꼬박 등교를 했다. 나랑만 같이 다니면서도 지수는 왜 피겨를 안 하는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그냥 말하고 싶지 않나 보다 하고 조용히 있었다. 지수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기에. 우리 사이엔 내가 어떻고 넌 어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나도 물어보지 않을게. 언젠가는 쟤도 나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말로 꺼낼 수 있겠지.

 

그것과는 별개로 난 지수가 이대로 피겨를 그만두는 게 너무 무서웠다. 다시 돌아갈 거라는 신호 하나만 줬으면 좋겠다고 매일같이 생각하니 어느새 둘이 함께 두 번째 졸업식을 맞았다. 지갑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3년 전의 폴라로이드 사진에는 그날의 내가 작게 읊조린 말이 묻어있었다. 이번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카메라 렌즈를 보고 미소 지으며 지수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의 작고 어쩌면 바닥까지 긁어모아 전부인 소망.

 

방학 때는 학원 말고도 개인적으로 다니는 작은 화실에 지수를 자주 데리고 갔다. 데리고 갔다기 보다는 지수가 허락 맡고 따라온 거긴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신경 안 썼다. 내가 옛날에 빙판 위의 그 애를 감상했던 것처럼 지수도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감상했다. 너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끔 난 커다란 캔버스에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담긴 꽃들을 그려 벽에 걸어놓는 상상을 했다. 그 그림을 엎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였으므로. 여름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무난하게 집 근처로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매일 지수랑 같이 등교했다. 학교와 미술학원, 집을 반복하는 별 볼 일 없는 하루들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그 하루들 주변에는 늘 홍지수가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웃어주는 홍지수. 훈련장에 가지 못하고 학교에 오는 홍지수. 미술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날 데리러 나와 있는 홍지수... 지수는 그러다가 가끔, 아니 어쩌면 자주, 아무 말도 없이 학교를 안 나오거나 그때처럼 연락이 끊겼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단념했고 또 아주 조금 외로웠다. 너의 일상이 예전처럼 돌아가는 날엔 숨 막히도록 더운 여름이 시작될 것 같았다. 너와 함께 겨울 바닷가의 모래를 밟고 서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다음날엔 네가 다시 내 하루의 주변으로 돌아왔다. 너는 또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는 또 네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지. 묻는 순간 지수는 영영 돌아가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지수의 이름만 하염없이 떠올렸다.

 

그날은 고등학교에서의 첫 1학기가 끝나는 방학식 날이라 그런지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모두가 들떠있었다. 나는 왜인지 그날따라 늦게 일어났고 눈을 떠 시계를 보자마자 지수에게 먼저 가라고 문자를 보냈다. 어차피 방학식이라 일찍 갈 필요도 그다지 없었기에 적당히 준비를 마치고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학교까지 가는 15분이 너무 길고 지루했다. 다행히 1교시 전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는데 자리에 지수가 안 보였다. 방학식 날 지각할 애가 아닌데. 폰을 보니 아침에 보낸 문자는 아직 읽지도 않은 상태라 반 애들한테 물어보았다.

 

 

 

"지수? 우리는 너랑 같이 오는 줄 알았는데."

 

"좀 있다가 오겠지. 너도 늦었는데 뭐."

 

"모르는데... 선생님도 아무 말 없으셨고. 정한이 네가 젤 친하잖아."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랬구나.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채 다시 자리로 돌아와 엎드렸다. 평소에도 이런 일은 허다했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렇게 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방학식이 끝났다. 다들 방학 끝나고 보자며 서로 인사를 했고 하나둘씩 교실을 빠져나갔다. 책상 서랍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책들을 가지고 가려고 몸을 구긴 순간 서랍 속에서 트윅스 초콜릿 하나와 곱게 접은 쪽지를 발견했다. 초콜릿을 보자마자 오래된 테이프가 감기듯 누군가의 목소리와 잔상이 머리에 스쳤다. 윤정한 문 잠그게 빨리 나와! 아, 미안.

 

학교를 빠져나와 손에 쥔 초콜릿과 쪽지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지수야. 그 작은 종이 하나를 펼치기가 너무 어려웠다. 펼쳐보니 작은 편지지만 한 크기의 종이에 글자는 딱 첫줄만이 쓰여 있었다. 마치 다른 말도 덧붙이려다 포기한 것처럼.

 

-이제 여름이네 정한아. 너무 덥다. 그치?

 

그 열다섯자가 끝이었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빛은 너무 뜨거웠고 더운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내 세상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발걸음을 더 이상 뗄 수가 없었다. 방학에 둘이 같이 바다 보러 가자고 오늘 말하려 했단 말이야. 넌 오는 것도 문자 3개 보내놓고 네 멋대로 왔으면서 왜 가는 것도 쪽지 하나랑 네가 좋아하던 초콜릿만 남겨두고 멋대로 가? 물어봤으면 대답은 들어줘야 하잖아. 나 너무 덥고 숨 막혀 지수야. 너는 떠났는데 왜 여름이 찾아왔을까. 그리고 나 단 거 안 좋아해. 그동안 네가 줘서 그냥 먹은 거야. 넌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일부러 내가 안 먹을 줄 알고 준 거야? 그런 거면 너 진짜 잔인한 거야. 내가 널 너무 몰랐나 봐 지수야. 사실 난 지금 내 기분도 모르겠어. 피겨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거짓말은 아니야. 너는 네가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게 맞는데,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잘가, 나의 열망. 나의 계절. 나의 차디 찬 여름아.

 

 

 

 

 

 

 

 

 

지수가 떠난 뒤에도 별 볼 일 없는 하루가 계속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매일 아침 같이 등교하는 지수도, 미술학원이 끝나고 집에 같이 갈 지수가 없다는 것도 무덤덤하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가끔 네가 생각나는 날이면 난 너무 공허했기에. 마치 자각하면 아파오는 상처처럼 네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날에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홍지수를 쳐보며 가끔 지수의 소식을 훑어보곤 했다. 지수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2학년 때는 미술학원에 아는 형과 누나를 따라 우연히 타투 작업실에 갔다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에 처음 친구를 따라 화실에 가 미술에 관심을 붙였던 그때하고 비슷했다. 남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주는 게 내게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틈틈이 타투를 배웠고 대학에 합격하고 나면 정식으로 학원에 다닐 생각이었다.

 

입시생은 너무 바빴다. 수시하고 수능, 후에 있을 실기를 다 챙기는 건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 여름방학 때는 하루에 12시간씩 미술학원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려댔고 몸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손목에는 지병이 없었단 거일까. 피겨와는 달리 종일 펜을 잡아도 미칠듯이 아프지 않다는 것 자체가 내겐 안도가 되었다.

 

 

 

2월이었다. 몰아치던 일정들이 드디어 모두 끝난 여유로운 달이었다. 애초에 난 수시에 붙어 수능만 보고 후에 있는 실기 시험도 칠 필요가 없었기에 12월에 합격자 발표를 마쳤다. 1월엔 타투 학원에 잠깐 다니면서 한 달 동안 수강하고 작업실에 가는 둥 이리저리 나돌아 다녔다가 이제 와서 쉬는 중이었다. 사실은 집에 누워서 자고 휴대폰 보는 게 다였지만.

 

그날도 어김없이 휴대폰에 걸려오는 전화를 다 씹고 목에 닿는 뒷머리를 방치한 채 티비의 케이블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사실 볼 게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냥 무료를 달래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그냥 잠이나 잘까 하며 다시 공중파로 돌린 채널에는 올림픽 경기가 송출되는 중이었다. 벌써 동계 올림픽을 하는구나. 이제 막 첫 경기가 끝났는지 카메라는 앞서 경기를 한 듯한 외국 선수를 비추고 있었다. 거의 0에 가까웠던 티비 소리를 키움과 동시에 송출되는 화면이 다른 카메라로 바뀌었고 난 그대로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다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 게 20살 피겨 남자 국가대표 홍지수였기 때문에. 지수가 카메라를 힐끗 바라보고는 살짝 웃음을 짓는 모습이 예전에 나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줬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경기가 시작하려 하자 지수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가슴팍에 성호를 그리고 손을 모아 짧게 기도를 했다. 턴을 몇 번 돌다가 중앙에 멈춰서니 귀에 익숙한 선율의 클래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저 난 넋을 놓고 티비 화면 속 지수를 감상했다. 음악에 맞추어 안무를 하던 지수의 모습은 전 세계가 주목했고 학창 시절 부상을 딛고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라는 기사 타이틀은 추천 수가 500이 넘었다. 휴대폰 화면 속 지수는 내가 늘 봐왔던 모습과 다를 거 없이 반짝반짝 빛났다.

 

너는 꼭 올림픽 나가서 금메달 땄으면 좋겠어.

 

6년 전의 내가 지수에게 한 말이 다시 돌아왔다. 지갑에 넣어둔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들에 담긴 것들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3년 전의 지수가 보낸 문자는 하루에 몇 번 씩이나 곱씹었다. 보고 싶어. 네 유일한 관객이 되고 싶어. 사랑 하나에 사람이 무력해진다.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이 너만 꿈꾼다. 난 자주 그랬고 가끔 그랬다. 네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겨울바람이 찼다.

 

 

 

 

 

 

 

 

 

"타투는 언제부터 배웠어?"

 

"...고등학교 2학년?"

 

"꽤 됐네."

 

"뭐 하고 싶은 도안 있어?"

 

"네가 해주고 싶었던 거."

 

"너는 진짜..."

 

 

 

지수를 데리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치도 못한 소리에 정신이 든 건지 아니면 그 잠깐 봤다고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또 스스로 체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나아지고 그런 게 아니라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사고가 제대로 안 돌아간 거지. 그렇다 해도 나는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어디에 할 건지는 정했어?"

 

"응. 여기 오른쪽 어깨에."

 

"뒤쪽?"

 

"응."

 

"조금만 기다려."

 

 

 

지수는 내가 타투펜을 소독하고 도안을 준비하는 동안 작업실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예전에 네가 다니던 화실하고 비슷하다. 여전히 꽃 그리는 거 좋아하는구나, 하나 사 올 걸 그랬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들이 그리웠다. 지수는 나랑 눈이 마주치자 또 예전처럼 웃어주었고 나는 아직도 그 웃음에 익숙해지지 못했지.

 

 

 

"좀 오래 걸릴 거야. 두 세 시간 정도."

 

"밤새도 괜찮아."

 

 

 

지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속도 모를 그런 말을 하면 실없는 웃음이 자꾸 나왔다.

 

 

 

"왜 자꾸 웃어?"

 

"어이없어서."

 

"웃는 거 오랜만에 봐."

 

"...준비 다 됐어. 스케치 하게 윗옷 벗어봐."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살에 펜을 대는 감각은 몇 번을 해도 낯설었다. 내가 남의 살에 펜을 긁는 동안 넌 빙판 위에 스케이트 날을 긁었겠지. 작은 기계음과 불 하나만 켜진 작업실을 맴도는 고요는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몇 년 이내에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너라는 존재는 내게 너무 크고 이상해서 언제 사라질까 언제 나타날까 늘 두려웠다. 수년 동안 너로 인한 나로 인해 곪아 터진 속이 다시 너 때문에 아문다. 나는 또 이렇게 여름 감기에 걸린 것 처럼. 펜 끝에서 새어 나오는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네 피부에 옮았다.

 

 

 

"끝났어. 랩 감아줄 테니까 대충 두 시간 정도 지나면 풀고 티슈로 살살 닦아줘. 연고 줄 테니까 일주일 정도 바르고..."

 

 

 

잡생각이 많아져 네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정한아."

 

"..."

 

"나 좀 봐주라."

 

"..."

 

"표정 좀 풀고. 응?"

 

 

 

지수가 내 손 끝을 잡았다.

 

 

 

"내가 다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말도 없이 5년이나 떠난 것도. 갑자기 찾아온 것도. 너한테 상처 준 것도..."

 

"난 아직도 겁이 너무 많아서, 이런 방법밖에 몰라. 나 진짜 이기적이지."

 

"그런데 넌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니까.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나 네 덕분에 피겨 계속했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너 생각 했어. 너랑 졸업식 때 같이 찍은 사진들이 너무 닳았더라."

 

"왜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변명할 기회는 한참이나 지난 걸 수도 있는데."

 

"네가..."

 

 

 

꽃이 다 지는 계절에 평소보다 더 빛나는 눈으로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더욱 꽉 잡은 채 너는.

 

 

 

"네가 날 피웠잖아."

 

 

 

나도 모르게 지수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지수가 눈을 깜빡이자 따뜻한 눈물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지수의 눈물을 조심스레 훔치자 나도 눈앞이 흐려졌다.

 

 

 

"울지마..."

 

"왜?"

 

"..."

 

 

 

나도 울 것만 같아서.

 

 

 

지수가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귀 뒤로 넘겨주며 내 손과 머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머리 기른 거 잘 어울려."

 

 

 

그대로 몸을 숙여 지수에게 키스했다. 무더운 열대야에 만난 우리는 한겨울 새벽에 처음으로 숨을 나눴다. 서로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오고 가는 호흡 속에서 지수가 지나온 길에 내가 그린 꽃들이 만개한다. 결국엔 사랑, 셀 수도 없이 네게 스쳐 간 나의 사랑.

 

 

 

 

 

 

 

 

 

"나 2월에 마지막 올림픽 나가."

 

"...근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하루는 괜찮아. 이번에 나가서 메달 따고 그만두려고. 원래 피겨는 수명이 짧기도 해서..."

 

"잘 하고 와."

 

"잘 하는 거 봐줘야지 정한아."

 

"어?"

 

 

 

지수가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야 설마."

 

"비행기 표도 있으니깐 타고 와. 호텔 예약한 것도 보내줄게."

 

"이게 다 얼만데 넌..."

 

"뭐 어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잖아."

 

 

 

지수는 또 웃었다. 난 평생 저 웃음을 못 이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올림픽 경기장은 삼촌네 빙상장과는 느껴지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세계가 보고 있다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시차 적응에 오는 길 까지 조금 헤맸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내 자리는 처음 지수를 만난 날과 비슷한 위치의 자리였다. 자리도 잘 보이는 앞자리에 피겨는 인기 종목이라 꽤 비싼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 와도 되나 싶었다. 그래도 지수가 나라고 준 거니까.

 

관람석은 금방 가득 찼다. 주변이 낯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작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아 장 내 분위기는 더욱 더 들뜸과 동시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나님, 지금 보고 계신다면 하나님도 저도 사랑하는 지수 잘 하게 빌어주세요.

 

 

 

경기가 시작됐다. 한국은 조금 뒤 순서라 빨리 지수의 순서가 오길 바라면서 기다리는 동안 편하게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감상했다. 저 밑에 선수석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지수의 옆모습이 보였다. 이제 바로 다음이 한국 순서였다. 지수는 코치님과 대화를 하다가 고개를 몇 번 끄떡여 보이곤 4년 전 티비 화면으로 본 그날처럼 가슴팍에 성호를 그리고 짧게 기도를 했다. 다른 게 있다면 본격적인 무대 시작 전에 나를 바라봐주었다는 것. 그리고 뒷어깨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옷 틈으로 내가 새겨준 동백꽃이 눈에 띄었다. 지수의 눈빛은 그 어떤 때보다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지고 지수가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 아름다운 자태에 압도된 듯, 다시 한번 더 나의 계절이 뒤집혔다. 온 세상이 네가 그린 궤적으로 가득 차서. 보이지 않는 동백꽃 꽃잎들이 흩날리며 시야에 들어찼다.

 

바깥은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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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참여하는 합작에 글을 쓴 지도 오랜만이라 많이 부족한 글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쓰면서 재밌었어요. 이런 기회를 주신 개최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참여작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은데 개인적으로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 하자면 lay.bn - painting을 들으며 작업했습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