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웃팅, 가정폭력, 노골적이지 않으나 성애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0.
두텁게 드리운 시간의 장막 사이로 노을빛이 어룽지면 정한은 속으로 가만히 셋을 세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배경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오래된 미술실. 낡은 창틀을 가리려 허술하게 달아놓았던 새하얀 커튼 너머 홍지수가 있었다. 작은 얼굴에 어깨가 다부졌던 열여덟의 그 소년. 창틈 새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짐 없는 얼굴 위를 덮으면 채가 긴 눈이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내리 감겼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이 마른 턱 끝으로, 가련한 귓바퀴에서 가늘고 긴 목덜미로, 그리고 다시 부드러운 뺨으로 마음껏 오르내리던 순간을 정한은 깊이 사랑했다. 세상에 오직 너와 나 단 둘 뿐인 것만 같던 순간들. 지수야, 무서워? 힘들진 않아? 선이 고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버릇 같은 물음을 건네면 지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짓고는 쉴 곳을 찾은 어린 짐승처럼 정한의 손에 뺨을 묻었다. 나는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수백 번의 재연 속에서 지수의 대답은 단 한 번도 달리 되었던 적이 없었다.
1.
홍지수는 입학 할 적부터 전교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였다. 신입생 대표였고, 전국구 모의고사에서 한 번도 상위권을 놓쳐 본 적 없는 수재였으며, 검도부의 에이스였다. 선이 얇은 붓으로 한 획에 그려낸 듯 유려한 얼굴로 신입생 선서를 읽어 내리던 홍지수를 운동장에서, 창문 너머에서, 교내 방송에서 보고 화들짝 얼굴을 붉히던 여학생이 못해도 수십은 되었다.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한 세단에 몸을 실은 채 등교하고, 또 다시 세단 속으로 묻혀 하교하는 홍지수의 일거수일투족은 학교 모든 이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홍지수는, 전교에서 가장 유명한 왕따였다.
재벌가의 서자라지. 어머니는 술집 작부라는 말도 있었고, 그 애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큰 돈을 후원 해 온 교회의 평범한 선교사라는 말도 있었다. 본처에게서 오랫동안 씨를 보지 못한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홍지수를 데려다 기르고, 남의 눈을 피하고자 그 어머니까지 집에 들여 앉혀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본처가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떵떵거리며 살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빌어먹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홍지수의 어머니는 그대로 쫓겨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이미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을 팔아버린 홍지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집안에 남게 되었다고. 친구가 들이민 휴대전화 속 포털 사이트에는 장난 하는 건가 싶을 만큼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홍지수의 가정사가 한 가득이었다. 얼마나 더 관계없는 타인이 홍지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쟤 동생이 K고 다니는 홍태우래. 알지? 거기 완전 명문이잖아. 걘 그렇게 꼴통이라는데, 중학교 때 사고도 엄청 치고. 근데 쟤네 아빠가 운동장에 잔디 깔아주고 입학 시켰다잖아. 저렇게 공부 잘 하는 장남은 이런 학교에 짱박아두고 개망나니한테 학벌 만들어 주는 이유가 뭐겠어. 회사는 친아들한테 주겠다는 거지. 어제 본 드라마 줄거리를 읊듯 홍지수의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휴대전화를 심드렁하게 잡아 내리며 정한은 재벌들 진짜 피곤하겠다, 따위의 생각을 주워섬길 뿐이었다. 그래도 쟤는 어떻게든 지네 아빠 눈에 한 번 들어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공부 하는 것 같은데, 야, 솔직히 웃기지 않냐? 아무리 잘나봤자 밖에서 주워 온 돌인데 재벌 집에서 미쳤다고 지를. 흥밋거리를 옮기는 정도였던 친구의 이야기는 점점 노골적인 경멸을 담은 험담으로 흘러갔다. 꼴에 재벌 집 아들이라고 고개 빳빳이 들고 학교 애들이랑은 말도 안 섞는 거 진짜 같잖지. 주제를 모르고 재수 없게. 이야기가 거기까지 흘렀을 때야 정한은 고개를 돌려 홍지수를 한 번 쳐다보았다. 정한과 지수의 자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야, 쟤한테 다 들리겠는데? 딱히 걱정의 의미는 아닌 훈수를 두자 친구가 쟤 맨날 이어폰 꽂고 있어서 안 들릴걸, 하고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하얀 줄 이어폰이 꽂힌 귓바퀴조차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글었다.
쟤는 턱도 안 괴네. 재벌집 애들은 예쁘게 앉는 법 같은 것도 배우나.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쯤 반 아이 둘이 홍지수의 곁에서 장난질을 치다 홍지수의 책상 위로 엎어졌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책과 필통과 이어폰 줄이 빠진 구식 엠피쓰리 같은 것들이 요란하게 나뒹굴었다. 어, 야, 너 앉아 있었냐? 못 봤다, 미안. 성의 없는 사과에 큰 눈을 들어 둘을 쳐다보던 지수가 대답 없이 바닥에 흩어진 제 물건들을 주워들었다. 책과 필통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엠피쓰리에는 이어폰을 둘둘 감아 서랍에 집어넣더니 저벅저벅 교실을 나선다. 뭐야 씨발, 사람이 사과를 했는데. 황당해 씨근대는 아이들의 뒤로 역시 재수 없는 새끼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요란했다.
정한은 손등에 괴고 있던 턱을 들어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이어폰이 빠진 엠피쓰리는 시커멓게 먹통이었다. 홍지수는 모조리 듣고 있었던 거다. 저를 향한 경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왠지 가슴이 선뜻해지는 기분에 정한은 지수가 나간 자리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정한은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었고, 발 없이 천 리를 가는 말들에 일일이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로운 성격도 되지 못했다. 그게 일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제가 겪어보지 않은 분야를 입에 올리는 것도 탐탁찮아 했다. 그런 정한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덕에 친구들은 정한이 지수에 대해 넌지시 물어왔을 때 하나같이 토끼 눈을 뜨고 되물었던 것이다. 홍지수? 너네 반 그 재벌 아들? 그 싸가지 없는 새끼? 지수를 수식하는 말들은 가짓수가 많았지만 대부분이 원색적이기 그지없는 것들이라 정한은 한쪽 눈을 비뚤게 찌푸렸다.
"걔가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 그렇게까지 나쁜 애 같진 않던데."
"나쁘지 않기는 개뿔이. 너 그 때 그 새끼가 명진이랑 준호 사과 씹는 거 나랑 같이 봤잖아."
"사람 앉아 있는 거 뻔히 봐놓고 너 거기 있었냐는 게 사과로 보였냐? 시비 거는 거지."
빈 빨대를 질겅이며 정한이 면박을 주자 그건, 하고 뭐라 반박을 하려던 친구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대상인 지수가 공공의 적이었기에 다들 모르는 척 했을 뿐이지, 사실 명백한 조롱의 의도가 담겼던 것을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눈치 챘던 탓이었다. 영 무안해진 친구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지만 다른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재수 없는 사생아 새끼, 로 귀결되고 마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정한은 지수를 떠올렸다. 주름 하나 없게 말끔히 다려진 교복으로 감싸인 어깨와 곧은 등. 긴 목, 동그란 뒤통수. 치기 어린 악의로 똘똘 뭉친 험담 한마디 제대로 막아주지 못할 이어폰을 고집스레 꽂고 있던 불그스름한 귓바퀴.
그 귓바퀴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교실도, 홍지수가 몸담고 있다는 검도부실에서도 아닌 미술실에서였다. 이십 몇 기 졸업생들이 기부했다는 소파는 십여 년 동안 교무실에서 숙직실로, 다시 행정실로 옮겨졌다가 몇 년 전 선배 하나가 인근의 예고보다 높은 실기 성적으로 내로라하는 미대 입시에 성공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을 남긴 이후 입시 미술을 하는 학생들이 밤샘을 해야 한다는 명목을 들어 미술실에 놓였다. 하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잔뜩 흠집이 나고 한쪽이 내려앉은 소파는 그럼에도 말쑥하게 키가 큰 고등학생이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자기에 충분할 만큼 널찍했다. 그래서 정한은 미술실을 진작부터 저만의 아지트로 점찍어 놓았던 것이다.
쉰내가 나는 콩나물국을 한 국자 가득 퍼주는 급식실 대신 매점에서 빵과 군것질거리를 집어 온 정한이 익숙한 소파를 찾아 미술실 문을 열었을 때, 당연히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던 공간을 먼저 채우고 있던 사람이 홍지수라는 사실에 정한은 당황과 동시에 묘한 반가움을 느꼈다. 역시나 하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지만 음악은 틀어놓지 않았는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지수도 일순 당황한 얼굴이었다. 정한은 짐짓 덤덤한 척 어깨를 으쓱하며 미술실 안으로 들어섰다. 부러 털썩 소리를 내며 소파에 주저앉은 정한이 소파 앞 테이블에 제가 사 온 주전부리들을 늘어놓는 동안 지수는 그새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예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했다.
"여기서 뭐 해?"
"..그러는 너야말로."
"난 밥 먹으러 왔는데. 여기 내 전용 급식실이거든."
보이지? 소파 밑에서 익숙하게 먹다 남긴 주스병을 꺼낸 정한이 남은 것을 흔들어 보이자 지수가 인상을 썼다.
"너였구나? 맨날 미술실에 쓰레기 버리고 가는 거.'
그런 걸 알려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정한이 어, 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뭐 맨날 버리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슬쩍 주스병을 바닥에 내려놓자 지수가 또 눈썹을 구기기에 정한이 얼른 덧붙였다. 버릴 거야, 이따 나가면서 다 버리려고 모아 놓는 거라니까.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이다가도 근데 내가 이걸 왜 쟤한테, 하는 생각이 들어 정한이 입을 다물었다. 홍지수가 미술부도 아니고 미술실 전세 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러거나 말거나 지수는 볼 일이 끝났다는 듯 이젤에 캔버스 대신 세워두었던 스케치북이며 연필 따위를 착착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미술실을 나가려는 지수를 정한이 붙잡았다. 야.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한의 앞을 지나치던 지수가 고개만 돌려 정한을 바라보았다. 왜?
"..너 밥은 먹었냐?"
"……."
"이거 두 갠데 하나 먹을래?"
정한이 똑같은 포장지의 빵 두 개를 흔들어보였다. 지수는 물끄러미 정한을 바라보나 싶더니 이내 아니, 짧게 대답하고는 제 목에서 달랑이던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런 지수를 보며 정한이 중얼거린 것은 정말이지 제 의지 밖의 일이었다.
"고장 난 이어폰은 뭐 하러 꽂고 다니나 몰라."
막 미술실 문을 열려던 지수의 손이 멈칫했다. 그제야 아차 싶어진 정한이 제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지만 이미 지수의 화난 얼굴이 제 쪽을 향한 뒤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따지듯 묻는 목소리에 묻어있는 건 명백한 수치심이었다. 아무래도 입이 방정이다. 소문이 많은 녀석이랑 엮이는 건 귀찮은데. 정한은 속으로 곱씹었지만 이번에도 정한의 입이 머리보다 빨랐다.
"무시하려면 그냥 대놓고 무시하는 쪽이 훨씬 당당하잖아. 그건 무서워?"
"야, 윤정한."
"……."
"남의 일에 쓸 데 없는 관심 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씹어 발기듯 내뱉은 지수가 빠른 걸음으로 미술실을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둘이었던 공간에 오롯이 하나만 남게 되자 정한이 머쓱하게 뒷목을 긁었다. 역시 제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영 별로라고, 정한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홍지수는 저를 둘러싼 싸구려 풍문들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주변 일에는 영 관심이 없고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녀석이라는 이야기만큼은 사실이 아닐 것 같았다. 정한은 지수의 입에서 선명히 흘러나오던 제 이름 석 자를 떠올렸다.
2.
그 뒤로 정한과 지수는 자주 미술실에서 마주쳤다. 이렇게 뻔질나게 오가는 걸 그동안은 어떻게 몰랐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오전 자습이 시작되기 전 어슴푸레한 새벽, 모두가 별관 급식실로 몰려가 조용해진 점심시간, 가끔은 방과 후 늦은 밤에도. 처음에는 정한이 들어오는 것을, 혹은 먼저 들어와 있던 것을 볼 때마다 인상을 쓰고 몸을 돌려버리던 지수도 어느 순간부턴가 별 말이 없었다. 딴에는 아예 정한에게 관심을 꺼버리자 다짐 한 것일지도 몰랐다. 기실 입시 미술을 하는 아이들은 죄다 학원으로 몰려 간 통에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미술실에서 둘은 점점 제 자리를 잡아갔다. 지수는 이젤에 제 상체만한 스케치북을 펴놓은 채 연신 뭔가를 그려댔고 정한은 등받이의 인조가죽이 3분의 1 쯤 벗겨진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그런 지수의 등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같은 공간을 공유 하는 둘의 주된 풍경이었다. 교실에서는 주로 샤프를, 홍지수가 입학 한 뒤 한 번도 빠짐없이 전국 대회에서 상을 휩쓸어 오는 검도부의 대표로 대련 시범을 보일 때는 목검을 쥐고 있던 홍지수의 큰 손에 4B연필이 쥐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적어도 교내에서는 윤정한이 유일할 것이었다. 정한을 영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며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던 지수가 기어코 한숨을 푹 내쉬며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물었던 날 정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다가 살벌하게 노려보는 지수의 눈빛에 짐짓 모른 척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너 검도부 아니야?"
"맞아."
"근데 왜 맨날 미술실에 있어? 검도연습 안 해?"
"대회 있을 때 바짝 하면 돼. 대회는 1학기 말이니까 아직은."
"..너 그거 지금 타고났다고 자랑하는 거지?"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농담을 하면 꼭 저렇게 정색을 하고 받아친다. 정한이 그래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누가 뭐래, 알겠다고, 능청스러운 정한의 말에 지수가 기분 나쁜 새끼, 하고는 홱 하니 몸을 돌렸다. 이제 익숙해진 반응이라 정한은 그 등을 향해서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근데 너 그거 아냐."
"……."
"너 애교살 엄청 두꺼워서 눈 그렇게 가늘게 뜰 때 마다 꼭 눈두덩이가 두 개 있는 것 같애. 눈이 네 개."
"……."
"드래곤볼에 나오는 캐릭터 알아? 걔는 눈이 세 개긴 한데."
"그만 해라."
"넵."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둘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시간이 길어졌으므로, 정한은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수에 대해 꽤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지수는 생각보다 말이 많은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누군가 저에게 거는 말을 모조리 무시할 만큼 싸가지가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미가 당기는 주제가 있으면-그런 주제가 많지는 않았다- 제 쪽에서 종알종알 대화를 주도하는 일도 간혹 있었다. 학교 아이들 대부분이 애초에 지수에게 답을 바라지 않는 일방적인 말들만 건네기에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저를 둘러 싼 풍문들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애들이 너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지 알아? 정한이 오며가며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슬쩍 건네면 지수는 영 남의 일을 듣는 것 마냥 무심하게 알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왜 가만히 있어? 안 있으면 어쩔 건데. 대답이 싱거웠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나는 그런 애가 아니라고 변명 할 수도 없고, 변명 해봤자 들어 줄 리도 없잖아. 하루 이틀도 아닌데 이젠 신경 안 써."
"……."
"영 없는 이야기들만 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긴 개뿔이. 그 덤덤한 반응에 괜히 부아가 치밀어 종내 씩씩대고 마는 쪽은 정한이 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러면 지수는 왜 네가 더 난리야, 하고 도통 이해 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해서는 고개를 돌리곤 하는 거였다. 하지만 익숙해진다는 것이 무뎌짐을 의미하지는 않는지 그런 이야기를 한 뒤의 지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말수가 적어지거나 다른 생각을 하다 정한의 말을 놓치는 일이 많아서 정한은 얼마 안 가 풍문을 옮기는 일은 그만 두었다.
지수는 검도보다 미술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스케치북 위에서 제법 유려하게 움직이는 연필의 선은 곧잘 정한의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것들을 그려내고는 했다.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데 검도 말고 미술을 해보지 그랬느냐는 정한의 말에 지수가 흘리듯 대답했다.
"아버지가, 검도를 잘 하는 걸 더 좋아하시니까."
"……."
"이기는 걸 좋아하시거든."
그리고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입을 꾹 다물어버렸지만 정한은 그 순간 지수의 얼굴이 꼭 잔뜩 할퀴어지고 버림받은 어린 짐승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수를 알면 알수록 그 애에게서는 쓸쓸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바람 냄새 같은 것이 짙게 풍겼다.
먹구름 낀 하늘이 영 불안하다 싶더니, 나란히 미술실을 나섰을 때는 이미 비가 퍼붓기 시작한 뒤였다. 운동장 흙바닥이 움푹 파여 들어갈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아무래도 소나기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기사님 안 오시는 날인데. 지수가 낭패라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우산이 없기는 정한도 마찬가지라, 가방끈을 말아 쥐며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보는 지수를 쳐다보던 정한이 묵묵히 제 교복 카디건을 벗었다. 머리 위에 차양처럼 카디건을 뒤집어쓰고 한쪽 팔을 넓게 벌려 틈을 만들어낸 정한이 지수를 불렀다. 야. 의아한 눈빛을 하고 저를 돌아보는 지수에게 고갯짓으로 제 팔 안의 틈을 가리키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던 지수가 이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되긴 뭐가 돼. 너도 버스 타고 갈 거 아냐. 나도 어차피 정류장까지 가야 되니까 이리 와."
"됐다니까."
"너 여기서 밤 샐 거냐? 아, 나 팔 아파!"
사실 제 친구 녀석들과 함께였다면 각자 옷을 흠뻑 적시며 달려가든, 학교 현관에 멀뚱히 서서 밤을 새든 조금도 관심이 없을 게 당연했다. 다 큰 사내 녀석을 상대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이 스스로도 영 낯간지러워 정한은 버럭 성질을 내며 카디건을 든 팔을 흔들었다. 빨리! 한 번 더 재촉하고 나서야 영 마뜩찮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던 지수가 슬쩍 정한의 곁으로 다가섰다. 하복 아래 드러나 싸늘하게 식어가던 맨 팔에 지수의 온기가 훅 끼쳐왔다.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은 정한이 하나, 둘, 수를 세고는 지수와 동시에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카디건 밖으로 비어져 나간 팔이 따가울 정도로 굵은 빗줄기를 뚫고 겨우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카디건을 덮어 쓴 보람도 없이 둘 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기에 정한과 지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야, 이거 하나도 도움 안 됐는데? 마이도 아니고 카디건에 뭘 바라냐? 그래도 이거라도 덮어 썼으니까 덜 젖은 거야. 고마운 줄이나 알아. 투닥거리는 사이 지수가 탈 버스가 먼저 도착했다. 나 간다. 돌아서려는 지수의 손에 정한이 덥석 제 카디건을 쥐어주자 또 눈을 크게 뜨는데 아무래도 만화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랑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실 드래곤볼은 아니고, 공주 옆에서 화관 쓰고 있는 사슴 뭐 그런 애들.
"너 내려서도 또 걸어가야 될 거 아냐. 그거 쓰고 가."
"내가 여자애냐?"
질색을 하며 지수가 하는 말에 정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너, 너 이러다 감기 걸리면 내가 집까지 안 데려다줘서 그랬다고 막 덮어씌울 거 아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야?"
"그냥 가져가라면 가져가라, 좀, 토 달지 말고."
막무가내로 제 카디건을 지수의 품에 떠안긴 정한이 앞에 선 버스로 지수의 등을 밀어 넣었다. 야, 야아! 엉겁결에 떠밀려 가던 지수는 기어이 제 등 뒤에서 버스 문이 닫히자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버스 뒷좌석 쪽 창가로 가까이 다가온 지수가 뭔가 이야기 하는 것이 보였지만 창문에 부딪치는 빗줄기가 워낙에 굵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세탁해서 가져다주겠다는 이야기이겠거니 했다. 멀어지는 버스 뒤꽁무니를 망연히 바라보던 정한이 벌개진 제 얼굴을 양 손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방금 그거, 뭔데 진짜….
이윽고 정한이 탈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정한은 이미 그 곳에 없었다.
"뭐야, 윤정한. 감기 걸렸냐?"
다음 날 아침 코를 훌쩍이며 교실로 들어서자 친구들이 어리둥절해서는 물었다. 야, 너 어제 일찍 간다고 우리랑 피방도 안 갔잖아. 집에 간 거 아니었냐? 어디서 비 맞았어? 아, 몰라 새끼들아. 다다다 쏘아대는 친구들에게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인 정한이 제 책상 위에 팔을 겹쳐 얹고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어제 그렇게 지수를 보낸 뒤 괜히 온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멀쩡한 버스를 두고 빗속을 한참 달렸다. 샤워를 하면서도 내가 여자애냐, 하던 지수의 목소리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목소리, 얼굴, 홍지수 목소리, 홍지수 웃는 얼굴.. 걔 그 때 자기가 웃는 줄 알고는 있었을까, 웃는 거 정말 신기하던데. 눈꼬리랑 입꼬리가 손으로 만진 것처럼 휘어져서 꼭 솜사탕 같이.. 아 씨발! 혼자 펄쩍 뛰며 휘두른 손에 냉수를 얻어맞고 또 꽥 소리를 질렀더니 엄마가 욕실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씻다 말고 왜 자꾸 욕을 하냐고 한소리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으니 몸이 으슬 거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판이었다. 파묻었던 고개를 슬쩍 들어 살핀 지수의 자리는 아직 비어있었다. 보나마나 미술실에 가 있겠지. 지수는 감기 안 걸렸나 모르겠다. 아니, 걔가 감기 걸리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잘생긴 코끝을 손등으로 대충 비비고 도로 엎어지려던 정한은 드르륵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뜩 허리를 세웠다. 소란하던 교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잠잠히 가라앉은 것을 보면 지금 들어 온 사람은 아마 홍지수일거다. 지수랑 눈이 마주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어제 잘 들어갔냐고 물어봐야 하나. 카디건은 세탁 할 필요 없이 그냥 줘도 된다고 이야기 할까. 너 웃는 거 예쁘던데 자주 좀 웃으라고.. 돌았냐 윤정한.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는 정한의 귓전에 잔뜩 비아냥대는 친구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야, 재벌 나으리 오셨다."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머리를 세게 후려 맞은 것 같았다. 한동안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기에 학교에서 지수가 어떤 존재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친구들은 지수와 제가 어울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지금 여기서 지수와 말을 섞으면 반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될 것이 당연했다. 친구들이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둘이 친하냐고 물으면. 지수가 사실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학교에서의 지수는 그저 재수 없는 새끼, 사생아, 왕따. 그게 다였다. 왕따와 친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앞으로의 제 학교생활도 순탄치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정한은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 만큼이나 제 일상이 뒤틀리는 것도 끔찍하게 싫었다. 지수가 제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에 정한은 고개를 푹 숙였다.
"……."
지수는 아무 말 없이 정한을 지나쳐 제 자리에 앉았다. 조용했던 교실이 차츰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지수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수의 무릎 위에 놓인 카디건은 수놓인 명찰이 보이지 않도록 잘 개켜진 채였다.
지수는 이제 미술실에서만큼은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제게 다가서지 못하고 멀뚱히 문간에 서있는 정한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수가 네 카디건 거기 있어, 하고 이젤 옆 의자를 가리켰다. 엉망으로 젖었던 카디건은 말끔하게 드라이 되어 좋은 향기까지 풍겼다. 그냥 줘도 되는데, 고맙다. 내가 세탁 한 것도 아니고 별로 고마울 건. 아, 그래, 너네 집 부잣집이었지. 영양가 없는 랠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 번도 저를 돌아보지 않는 지수의 옆얼굴을 객쩍게 내려다보던 정한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까 교실에선,"
"됐어."
"……."
"애들 앞에선 계속 그렇게 나 모르는 척 해. 안 그럼 네가 곤란해져."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치부를 들킨 것 같았다, '계속 그렇게'라니. 어느새 스케치북에서 멀어져 저를 바라보는 지수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으나 정한은 그 눈에서 저를 향한 경멸을 읽은 것만 같았다. 위선 떨어봤자 너도 결국 다른 아이들과 똑같지 않느냐는. 어쩌면 그건 지수가 아닌 제 마음 속에서 울리는 말인지도 몰랐다. 카디건을 쥔 손에 땀이 찼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너를 가십거리로 입에 올리는 저런 녀석들과는 달라. 나는, 그러니까. 벙긋대던 입술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굳게 다물렸다. 고요히 가라앉은 눈동자를 더 이상 마주 할 자신이 없어서 정한은 그대로 등을 돌려 미술실을 빠져 나왔다. 도망치듯 달리는 저를 지수는 붙잡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빈 복도에 다다랐을 때 정한은 제가 들고 있던 카디건을 되는대로 내팽개쳤다. 진짜 거지같았다.
그 뒤로 정한은 미술실에 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며 하교 할 즈음이 되면 말릴 새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던 정한이 아니었던가. 친구들은 돌아온 탕아를 기꺼이 반기면서도 내심 의아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 여기서 점심 먹게? 으레 향하던 매점이 아닌 급식실에서 저희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는 정한을 보고 친구가 물었다. 엉. 성의 없게 대꾸하곤 정한은 입 안 가득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모래를 씹는 듯 입 안이 꺼끌했다.
미술실에 발길을 끊은 후 지수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끝나 갈 즈음이었다. 왁자함이 잦아드는 복도 사이를 마치 다른 공간인 양 걸어오는 지수의 손에는 으레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막 뒷문으로 들어서려던 정한은 하마터면 홍지수 또 밥 안 먹었지, 하고 말을 걸 뻔 했다. 바닥을 보며 걷던 지수가 문득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을 때 정한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가 먼저 교실로 들어서고, 잠깐의 공백 뒤 열린 앞문으로 지수가 들어왔다. 미술실에서 제가 등을 돌린 이후, 간혹 허공에서 마주치지 못하고 엇갈리는 시선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다시 제게 와 닿는 지수의 시선은 없었다. 두 번이나 지수를 외면 한 것은 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한은 왠지 제가 버림받은 듯한 비참함에 휩싸였다.
3.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시장배 검도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별관에 있는 검도부실에서 매일 기합 소리가 요란했다. 그 누구도 수 십 년 전통의 명문이자, 이제는 홍지수라는 에이스를 필두로 한 S고의 검도부가 우승 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기실 당연히 그래야 할 일로까지 여겼다. 홍지수는 제 아버지 뿐 아니라 저를 소속 시킨 모두에게 영광을 안겨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렇다 할 지역대회 한 번 출전 해 본 적 없는 오합지졸 K고의 검도부에 허무하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는 소식을 들은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홍지수를 원망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K고 검도부에는 홍지수의 배 다른 동생 홍태우가 있었다. 영 탐탁찮다는 표정으로 상장을 읽어 내리는 교장의 앞에 선 검도부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들지 못했으나 예의 그 홍지수 만큼은 꼿꼿이 고개를 들고 상장을 수령했기에 수군거림은 더해졌다. 단상에서 내려 온 지수가 정한의 곁을 지나쳐 제 자리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여보란 듯 큰 소리로 지수를 험담했다. 정한은 단정히 내린 지수의 앞머리가 채 가려주지 못한 이마의 푸른 멍과, 핏기가 가시지 않은 뺨의 열상과 터진 입가를 똑똑히 보았다. 다음 날 홍지수는 처음으로 결석을 했고, 오전 내 지수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던 정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미술실로 향했다.
홍지수는 거기 있었다. 커튼이 모조리 내려져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미술실 모퉁이에 태아처럼 몸을 구기고 앉아 숨이 차도록 울고 있었다. 오래되어 삭은 미닫이문이 비명 같은 마찰음을 냈음에도 지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차라리 큰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면 그저 지켜보는 것 만으로 이토록 마음이 아리지는 않았으리라. 정한은 지수를 부르지도, 그 곁으로 다가가 앉지도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한 정적을 깬 것은 지수였다.
"아버지가 오셨어."
다 갈라진 목소리였다.
"대회에 몇 번을 출전해도, 또 몇 번을 우승해도.. 내가 나가는 대회 같은 거 한 번도 보러 오신 적 없는 분인데, 객석에 아버지가 앉아 계셨어. 태우 때문에."
그 애는 내가 하는 건 다 하고 싶어 해.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어. 내가 길고양이한테 밥을 주면 그 고양이까지 자기 방 안에 들여야 했어. 내가 뭔가를 가지는 걸 견딜 수가 없나 봐. 왜? 다 가진 건 그 애잖아. 명예도, 진짜 가족도, 아버지 사랑도, 다 그 애 거잖아. 그 애는 검도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어. 그런데도 그 애들은 그 자리까지 올라왔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너무 잘 알아. 그걸 알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지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지수의 곁에는 온통 화려한 것들 뿐이었으나 그 중 '지수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지겠다고 욕심을 내 손을 뻗으면 바스라질 허상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발아래는 끝없는 낭떠러지 일 것을 알기에 지수는 제가 딛고 있는 것이 얄팍한 소금성일지라도 부디 무너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태초부터 퇴적 되어 온 결핍과 외로움 속에서 지수는 천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무릎을 굽힌 정한이 지수와 눈높이를 맞춘 채 엉망으로 젖은 지수의 볼을 쓸고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정한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잠잠히 눈을 내리 감는 지수의 눈 아래 새로이 생긴 눈물길까지 정한이 엄지로 꼼꼼히 닦아냈다. 늘 물결치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눈 속에는 정말 바다가 들었을까. 이다지도 연약한 네가 슬픔의 파도에 밀려 침잠한다면 나는 뭘 해줄 수 있을까.
"네 잘못이 아니야."
"……."
"대회에서 진 것도, 아이들이 너에 대해 수군대는 것도, 그 망할 집안 사람들이 너를 괴롭히는 것도.. 네가 잘못 한 건 아무것도 없어."
"……"
"내가 위선자라고 생각해?"
지수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정한을 그렇게 생각 해 본 적은 없었다. 빈틈이 생기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스스로를 조각내어서라도 억지로 끼워 맞추던 일상 속에 작은 균열이 일어나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어떻게든 메워보려 애쓰던 그 균열을 그냥 그대로 두어볼까 생각했던 어느 오후도.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저도 몰래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어떤 옆얼굴도. 오히려 너는, 내게. 잠시 숨을 고르던 지수가 속삭이듯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날 동정해?"
정한이 다 말라버린 눈물길을 쓸던 손으로 지수의 뺨을 감쌌다.
"아무도 동정하는 사람이랑 키스하고 싶어 하지는 않아."
정한의 입술이 지수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손 안에 담긴 지수의 어깨가 잘게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정한은 그제야 지수가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끊임없이 균열하던 지수의 일상 속으로 기어이 정한이 스며들었다. 처음부터 사랑이었다. 정한도 지수도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나 애써 외면했던 것은 둘의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것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시나브로 이 감정을 시작해야 한다 정의를 내리고 받아들이기가 겁이 났다. 가진 것은 없었으나 모든 게 잃을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어쩌면 살기 위해 서로를 외면하고자 했으나,
"항상 네 옆에 있을게. 언제든, 너랑 내가 어디에 있든 그럴게. 부를 수 있고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을게."
"……."
"나는 완전히 네 거란 이야기야."
기실 사랑 또한 살려달라고 하는 일이 아니겠나.
4.
지수는 검도부를 그만 두었다. 그 날 지수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생채기가 몇 개 더 늘었다. 나 괜찮아, 이제 짐 하나 덜었다. 흐리게 웃는 지수를 정한은 말없이 감싸 안았다. 그 품에 안긴 채 지수는 한참을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 하다 이내 입술을 즈려 물고는 정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내 지독한 질식 속 유일한 호흡은 너 하나이게 되었다. 처음 입 맞추었던 미술실에서 차마 하지 못 한 말이었다.
5.
지수는 곧잘 정한을 그렸다. 사실 이전에도 정한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그린 그림들이 몇 장은 되었다는, 그 말도 제가 먼저 하지는 못하고 지수가 그린 그림들이 궁금하다며 우격다짐으로 스케치북을 빼앗아 간 정한의 입꼬리가 슬슬 귀에 걸렸을 때야 겨우 이야기 했다. 급하게 스케치만 한 거야. 그림이라고 할 것도 못 돼. 음료수 캔을 쥔 손끝이며 신발끈이 풀어져 널부러진 운동화 같은 것들은 다소 다급한 듯 투박한 선으로 그려졌으나 그럼에도 다정하고 섬세해서 정한은 그것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야, 실물보다 훨씬 낫다. 이거 나 가져가도 돼? 묻는 말에 대답 없이 스케치북을 도로 낚아내는 귀 끝이 발개서 정한은 또 웃다가, 실물이 훨씬 낫거든…. 눈도 못 마주치고 웅얼거리는 소리에는 불가항력으로 녹아내렸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금방이라도 탄내를 풍길 듯 탁탁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는 수위실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것을 정한이 몰래 집어 온 거였다. 에어컨이 나오는 교실을 장렬히 포기하고 나란히 보충수업을 짼 두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기도 했다. 정한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바삐 손을 놀리는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여린 바람도 바람이라고 교복 자락을 날리는 것을 지수의 방향으로 고정해주고 이젤 곁으로 다가가자 지수가 기척을 알아채고는 몸을 살짝 기울여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줬다.
"뭐 그려?"
"너."
아닌 게 아니라 스케치북 안에는 정한이 있었다. 소파에 길게 누워 가슴팍에 펼친 책을 엎어놓은 채 졸고 있는 모습이 며칠 전 방과 후에 미술실에서 지수를 기다리던 제 모습과 같았다. 우와, 작게 감탄하자 지수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지만 정한은 지수가 민망해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익숙해 질 법도 한데 지수는 언제나 태어나 처음 칭찬을 받는 어린애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네 뒤에 있었는데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렸어?"
"넌 그릴 수 있어."
"왜?"
"안 보고 있을 때도 항상 네가 보여."
정한은 조금 멍한 기분이 되어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는 곧잘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도리어 제가 생각지도 못한 고백을 받은 사람마냥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곤 괜한 딴청을 부렸다. 정말이지 놀려주고 싶게 귀여운 성정이었다. 너 방금 되게 로맨틱한 말 했다? 시끄러워. 작게 웃은 정한이 허리를 숙여 열이 오른 목덜미에 턱을 기대자 어깨가 흠칫 굳었다. 지수야. 속삭이듯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지수가 정한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뗐다. 등줄기가 간지럽게 전율하는 느낌에 정한이 급히 지수의 입술을 찾았다. 촘촘한 속눈썹이 천천히 내리 감겼다. 쪽쪽, 장난을 치듯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나 싶더니 이내 아랫입술이 아프지 않을 만큼 잘게 물렸다. 베어 물듯이 삼킨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간 정한의 혀가 지수의 여린 입 안 깊숙이 저를 묻었다. 머뭇대며 굳어있는 지수의 혀 아래를 정한의 혀가 가볍게 쓸자 느리게 두 혀가 얽혔다. 고개를 틀 때마다 코끝이 부딪치는 느낌이 생경했다.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의 젖은 마찰음이 유독 크게 들려 정한의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높게 올라갔던 그네가 내려올 때의 기분, 정상까지 올라갔던 롤러코스터가 급 하강 할 때의 기분. 그것은 지수도 마찬가지라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이 얌전히 있지를 못하고 연신 손끝을 말아 쥐었다, 폈다 했다. 깊게 섞이는 혀에 자꾸만 뒤로 넘어가려는 지수의 목덜미를 단단히 붙들려 정한의 손이 올라가던 차였다.
"…-!!"
"아 깜짝이야."
급하게 들어 올린 정한의 손에 치인 스케치북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며 철썩 소리를 냈다. 뺨이라도 맞는 듯 요란한 소리에 놀란 지수가 저도 모르게 정한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조금 머쓱해지려던 정한은 지수의 낯이 아연해지는 것을 보고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평생을 상처만 받고 살아 온 주제에 지수는 제가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아픔에 무뎌진 탓에 제가 주는 상처의 깊이를 가늠 할 수 없음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로 인해 받게 될지 모를 미움이 지레 두려워서도 그랬다. 둘 다 정한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게 좀, 속상했다.
"..미안."
"아냐, 뭐가 미안해. 네가 밀친게 낫지 내가 밀쳤으면 너 저기까지 뒷구르기 했을 수도 있어."
"……."
"너무 오바지."
"..응."
킁, 빈 코를 들이마시며 어깨를 으쓱하는 정한 대신 떨어진 스케치북을 주우려던 지수가 멈칫했다. 누군가 지나가는 일이 드문 복도 끝에서 말소리가 들려서였다. 누구 오는 것 같아. 그냥 지나가는 걸 수도 있잖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정한은 누군가 잠겨 있는 문을 흔들며 이거 원래 잠겨있냐, 하는 걸 듣고야 화들짝 놀라 지수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문을 열고 나가는 건 너무 이상하고, 단 둘이 문까지 잠근 채 미술실에 있었던 걸 들키는 건 더 이상하다. 좁은 미술실 안을 둘러보던 정한이 다급하게 벽 한켠의 캐비냇 문을 열었다. 야아, 여길 어떻게. 괜찮아, 내가 들어가 봤어, 충분해. 여길 왜..! 지금 그게 중요하냐? 당황하는 지수를 들여보내고 이내 제 몸까지 구겨 넣은 정한이 작은 홈에 손을 끼워 넣어 겨우 문을 닫았다. 아슬한 타이밍으로 미술실 문이 열리더니 미술부원인 듯 싶은 아이들 몇이 우루루 들어왔다. 아까 무슨 소리 나지 않았냐? 무슨 소리? 주고받는 말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헛소리 하지 말고 챙겨. 빨리 갖다놓고 집에 가게."
"아님 말고."
심드렁하게 대꾸한 아이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학년 몇이 사생 대회에 나간다더니 그걸 준비하는 모양인지 잘 쓰지 않는 이젤 따위를 겨드랑이에 끼워 넣던 아이들이 이내 장난질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거 너 닮았다. 뒤질래?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덕지덕지 점토가 붙은 아그리파를 가리키며 키득대는 아이들을 문틈으로 지켜보던 정한이 짜증을 냈다. 저 새끼들은 할 거 다 했음 빨리 꺼지지. 그러다 캐비냇 천장에 머리를 박은 덕에 한쪽 손으로는 정수리를, 한쪽 손으로는 입을 막은 채 악 소리를 숨겼다. 혼자 원맨쇼를 하는 정한을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보던 지수도 이내 양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키득대는 소리를 죽였다.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캐비냇은 다행히도 두 사람이 몸을 숨길 정도는 되었으나 유달리 훤칠하기까지 한 남고생 둘이 넉넉한 텀을 두고 설 만큼 넓지는 못했다. 웃음기가 가시자 여기저기 구겨진 몸이 불편한지 지수가 바르작댔다.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던 지수의 다리가 정한의 중심에 가 닿자 정한이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의식하지 않을 땐 몰랐는데, 이제와 보니 거리가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데다 좀 전까지 키스를 하며 달아오른 몸이 아직 식지 않은 채였다. 정한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홍지수, 좀, 가만히. 잔뜩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정한을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데록 거리던 지수가 이내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헙, 입을 다물었다. 한껏 맞닿은 몸을 타고 좁은 캐비냇 안에 미지근한 열기가 흘렀다. 딱 죽을 맛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한은 속으로 아침 조회 할 때도 부르지 않던 애국가를 불렀다.
떠들썩하던 아이들은 한참만에야 미술실 밖을 나섰다. 열렸던 자물쇠가 도로 잠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빼꼼히 캐비냇 문을 열어 밖을 살핀 정한이 먼저 밖으로 나오고 이내 지수가 따랐다. 바람도 들지 않는 좁은 곳에 한참 갇혀있던 탓에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여러 의미로 서로를 잔뜩 의식하고 있었던 터라 더했다. 정한이 차마 지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교복 셔츠 목덜미께를 잡아 펄럭였다. 아, 덥다. 그러게. 양 손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뺨의 열기를 시키던 지수가 문득 정한을 보고는 풉, 웃었다,
"야. 너 팔에."
미술 도구를 되는대로 집어 넣어두는 곳이라 캐비냇 곳곳이 물감이며 분필로 범벅이었을 거다. 아마 벽 어딘가에 묻어 있었을 물감이 땀에 녹았는지 정한의 상체 곳곳이 엉망이었다. 아이씨, 이게 뭐야. 난장판인 제 팔뚝이며 팔꿈치 같은 곳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정한이 지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홍지수."
"왜."
"너도 만만찮거든."
"어?"
그제야 제 몸도 정한과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수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둘 다 그냥 푸스스 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정한이 먼저 손을 뻗어 지수의 양 빰을 감쌌다. 조금 전에는 어쩔 줄 모르고 무릎 위에서만 부산스럽던 제 손을 지수가 이번에는 정한의 어깨 위에 올렸다. 두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6.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한다는 것은 지수를 둘러 싼 수많은 풍문들 중 거의 유일하게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반은 틀렸다. 지수는 회사의 후계자 따위를 바란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비에게 연민 섞인 눈길이라도 한 번 받아보고자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창조주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카인처럼. 그러나 홍지수는 카인을 자처하기에는 너무 물러 터졌고 차마 손도 댈 수 없는 아벨 대신 스스로를 죽여 갔다. 온 마음이 무너진 채 지수가 차마 저를 찾지도 못하는 날이면 정한은 자신의 존재가 지수에게 그 어떤 위로도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애가 탔다.
나, 데리러 오면, 안 돼?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차마 단숨에 내뱉지도 못하고 잦아드는 음성에 앞뒤 잴 것 없이 달려 나갔을 때 지수는 차가운 비를 온 몸으로 맞아내고 있었다. 제 머리 위로 우산이 드리워지는 것을 알고서도 한참동안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한 지수였다. 겉옷 하나 제대로 걸치지 못한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눈으로 다 보일 정도였지만 그것이 단순히 추위 때문이 아닐 것을 정한도 알았다. 그저, 부를 수 있는 데 있겠다고 했잖아. 차마 뱉지 못할 위로를 입 속으로 수십 번 곱씹을 뿐이었다.
마침 부모님이 안 계시는 날이라 천만 다행이었다. 계셨대도 지수를 데리고 오지 않을 리는 없었겠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욕실로 밀어 넣고 보일러 온도를 올린 정한이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두드렸다. 지수야, 씻고 있어? 나 들어가도 돼? 대답이 없음에 손을 얹어본 문고리는 쉽게 돌아갔고 지수는 여전히 정한이 등을 떠민 그 모습 그대로 욕실 문 앞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정한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지수야."
"……."
"춥잖아. 감기 걸려. 우선 씻자."
정한의 손길이 젖은 옷자락에 닿자 텅 비어있던 지수의 눈에 일순 빛이 돌았다. 저도 모르게 정한의 손을 쳐내려다가, 의아해하는 정한과 눈을 마주치자 겁먹은 눈으로 손을 거두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싫어? 네가 할래? 조심스러운 정한의 물음에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지수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보기 싫을 거야.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정한은 이내 힘없는 손으로 툭툭 벗겨지는 옷가지 속 몸을 보고는 새어나오려는 비명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운동을 해서인지 겉보기에는 제법 다부져보인다 생각했던 몸인데, 옷으로 가려진 부분은 죄 깡마른데다 누군가 엉망으로 한 낙서처럼 곳곳에 푸르고 노란 멍이 가득이었다. 이거 다 네 아버지가 그랬어? 이런 짓 하는 게 아버지야? 이를 악 문 정한이 지수의 몸을 애써 못 본 체 하며 욕조에 온수를 채우는 데 집중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지수가 무서워 할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보기 싫을 거라고 했잖아."
정한이 몸을 돌려 지수의 어깨를 잡아챘다. 놀라 동그래진 눈에서 언제 고였는지 모를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야, 홍지수."
"……."
"누가 보기 싫대."
"……."
"홍지수가 보기 싫은 부분이 대체 어디 있냐? 이렇게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
"..야,"
"손도 발도 예쁘고 다 예쁜데."
"……."
"지 이쁜 거 지만 몰라, 하여튼. 사람 불안하게."
바보야. 지수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붙였다 뗀 정한이 따뜻한 물 속으로 지수를 이끌었다. 씻고 나와, 밖에 있을게. 그럼에도 불안하게 흔들리는 지수의 눈을 알아서,
"아무데도 안 가고 여기 딱 붙어 있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알았지?"
젖은 뺨을 쓰다듬으며 덧붙이자 그제야 지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떼고 욕실에서 나온 정한이 제 방으로 향했다. 그새 축축해진 옷을 갈아입고, 지수가 입을 옷가지를 내어놓던 정한이 문득 협탁 위 가족사진을 들여다본다. 웃고 있는 엄마아빠와 여동생, 그 사이의 저. 구김 하나 없어 보이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한이 조심스레 액자를 엎어두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샤워를 마친 지수가 덜 마른 머리칼을 하고는 욕실에서 나왔다. 마른 목덜미로 물방울을 떨구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주는 정한에게 지수가 먼저 입술을 붙여왔다. 그새 열이 오르는지 닿아오는 입술이 메마르고 뜨거워 입을 맞추면서도 가만가만 이마며 뺨을 짚어내자 지수가 어린 아이처럼 정한의 품을 파고들어 안겨왔다. 약한 모습을 쉽게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같이 보낸 두 계절 동안 익히 겪어 알고 있었다. 정한은 더 이상의 말을 아끼며 그저 지수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에는 이유가 없었다.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언론 보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다못해 태우가 바깥에서 사고를 치고 들어왔을 때도 모진 매질을 받아내는 것은 언제나 지수였다. 볼 품 없는 년의 피를 타고 태어난 천한 새끼. 집안의 수치.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그 천한 피의 반은 아버지가 주신 것 아니던가요. 이 집안의 대문을 넘어서던 날 엄마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발버둥 치던 제 손을 끌어당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셨는걸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설움을 눈물과 함께 삼켜내며 지수는 제게 쏟아지는 칼 같은 말들을 악착같이 견뎌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아버지의 방에서 나온 다음 날이면 어린 날의 지수는 으레 열병을 앓곤 했지만 그마저도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아픔조차 누르고 눌렀다.
하지만 오늘은, 오늘만은 네가 떠오르더라고. 정한의 팔을 베고 누워 정한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내맡긴 채 지수가 말했다. 나에게도 이제는 네가 있는데, 태우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지지 못할 내 것이 나에게도 하나는 있는데 그걸 두고 혼자 아픔을 삭이려니 그게 그렇게도 억울하더라고. 작게 투정을 부릴 때 조차도 덤덤한 말투가 도리어 정한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찢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한 채 네가 견뎌야 했던 수많은 말들은, 또 밤들은 얼마나 아득했을지. 정한은 제 얼굴을 쓰다듬는 지수의 손끝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지수야. 낮은 부름에 눈이 마주치고 이내 입술이 맞물렸다. 숨이 엇갈리는 찰나에도 서로가 멀어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정한이 지수의 등 아래로 팔을 끼워 받쳐 들었다. 지수가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린 덕에 수월하게 상의가 벗겨졌다. 이내 제 티셔츠도 벗어낸 정한이 지수의 입술로, 목덜미로, 하얗게 드러난 가슴팍으로 입술을 내려놓았다. 생경하고도 따스한 온기에 지수가 연신 눈가를 찡긋거렸다. 분명히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데도, 잠깐이라도 정신을 잃으면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빨려 들어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치 낙인을 찍듯 지수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던 정한이 허리께를 쓸던 손을 바지 속으로 미끄러뜨리자 지수가 멍해지려던 정신을 붙들었다. 놀라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알아챈 정한이 무기를 버린 군인처럼 제 양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가 그 손으로 천천히 지수의 뺨을 감쌌다. 동그란 코끝에 짧게 입을 맞춘 정한이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지수야, 무서워?"
대답을 찾지 못한 지수가 제 입술을 깨물자 정한이 손가락으로 지수의 입술을 살살 쓸었다. 그러지 마, 나는 네가 너를 괴롭히는 게 싫어.
"너 무섭거나 싫으면,"
"나 괜찮아."
"무리 안해도 돼."
"정한아. 나 진짜 괜찮아."
"……."
"나는, 너면 다.. 괜찮아."
물끄러미 지수와 시선을 맞추던 정한이 지수의 입술에 깊게 저를 묻었다.
네 아버지가 너에게 모질게 대할 때도, 너를 모르는 아이들이 한없이 가벼운 말과 활자로 너를 난도질 할 때도, 오랫동안 네게 하나 남은 동앗줄이나 다름없었던 검도를 놓을 때도 너는 언제나 괜찮다고만 했지.
너 그거 아니. 네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이 막혀.
버겁게 파고드는 아래에 온 몸을 굳히던 지수는 정한의 움직임이 멈추자 겨우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지수야, 많이 아파? 미안해. 하얀 몸 이곳저곳에 바쁘게 맞춰대는 입술이 퍽이나 상냥했다. 지수의 떨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던 정한이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이자 지수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아, 정한아, 너무, 흣, 정한, 아, 천천히…. 오롯이 저로 인해 쏟아지는 달뜬 신음성이, 저만을 찾는 목소리가 견딜 수 없이 좋아서 정한은 연신 지수의 눈꺼풀이며 코끝에 입을 맞춰댔다. 예쁘다, 지수야. 너 지금 진짜 예뻐. 너무 예쁘다, 홍지수.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이토록 애달팠던 적이 있었나. 정한은 목소리에마저 온도를 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친애를 가득 담아 제 몸에 내려앉는 입술이 짙고 옅은 멍 위를 수놓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말보다 눈물이 앞섰다. 정한아, 정한아…. 제 목덜미에 이마를 파묻은 채 신음하는 목소리가 젖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정한이 드물게 당황한 낯을 했다. 지수야, 울어? 많이 아파 지수야? 힘들면 그만 할까? 끊임없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지수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지수는 다정함을 견디는 게 힘들었다.
"정한아."
"응, 지수야."
"이름, 흐으, 내 이름 불러줘. 예쁘다고 해줘."
"……."
"지수야, 하고, 계속 불러줘…."
아득해지는 느낌에 지수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정한이 지수의 귓가에 잘게 입을 맞췄다. 지수야, 울지 마. 나 아무데도 안 갈게. 네 옆에 있을게. 걱정하지 마. 우리 지수, 예쁜 내 지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애정에 꼭 데일 것만 같아 지수는 울면서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문득, 지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절대 지수를 다 채울 수 없을 것 같다는 묘한 갈증을 느꼈다. 지수도 저도 영원한 기갈에 시달릴 것만 같았다.
7.
어릴 때 엄마랑 LA에 살았었어. 길게는 아니고, 중학교 입학하기 전에 몇 년 잠깐. 영어 이름? 있었지. Joshua. 슈아가 뭐야, 아무도 그렇게 안 불렀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눈에 띄지 말라고 쫓아냈던 거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그래도 그 때는 엄청 행복했어. 말도 잘 안 통했고, 외국인이라고 못되게 구는 애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잘 해주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고 날씨도 좋았어. 거기는 햇살이 정말 좋아. 어떤 우연도 기적으로 바꿔 줄 것 처럼 따뜻해. 그러니까 만약에 네가 나를 잃어버리면, 아이, 만약이라고 했잖아. 그럼 우리 꼭 LA에서 만나자. 어디서? 글쎄, 그걸 약속하지 않아야 기적이지. 바보야.
사실 가장 좋았던 건.. 엄마가 늘 웃고 있었다는 거. 매일 밤마다 나를 안아주면서 그랬어. 우리 지수 좋은 하루 보냈니, 좋은 꿈 꿔,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을 거야. 그러면 그 날 얼마나 힘든 일이 있었든 정말 다 괜찮아 질 것 같았어. 나, 사실 다른 나에 대한 건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하나도 상관 없는데 우리엄마에 대한 소문들은 되게 억울했다? 아버지를 꼬셔서 팔자 펴려고 했다느니, 그런 거 아니었거든. 우리 엄마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착하고, 순진하고. 엄마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살면서 아주 나쁜 일들을 잔뜩 겪었지만 그게 다 나를 만나기 위한 거였다면 두 번이든 세 번이든 다시 겪을 거라고 했어. 내가 정색을 하고 그러지 말라고 하면 막 웃었어. 나한테 왜 그렇게 낡은 이어폰이랑 엠피쓰리를 가지고 다니냐고 물었지? 한국 들어오기 직전에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준거야. 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사실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미 낡은 거였어, 엄마가 플리마켓에서 사다 준 거였거든. 엄마가 엄청 미안해하면서 다음에 꼭 새걸로 사주겠다고 했어. 난 그걸로 정말 괜찮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그러는 거야. 아버지한테 가면 이런 걸 열 개고 백 개고 가질 수 있다고. 나는 새 엠피쓰리 같은 거 정말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는데, 이미 충분히 행복했는데, 엄마가.. 너무 많이 울었어….
8.
잦아드는 목소리와 다르게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몸이 차가운 눈보라 속으로 내쳐진 소동물처럼 하염없이 작고 연약해보여서 정한은 지수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잠투정 하는 어린애 마냥 제 목덜미에 눈두덩이를 비비는 지수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정한이 잠긴 목을 겨우 열었다.
"잘 자, 지수야. 좋은 꿈 꿔."
"……."
"내일은 더 나을 거야."
"……"
"네 내일에도 내가 있을거니까."
잠시 멎었다 이내 웃음처럼 흩어지는 숨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응, 하고 대답했다. 정한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숨소리 같은 속삭임에 정한은 지수가 있어 다행인 건 오히려 제 쪽일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내가 네 질식 속의 유일한 호흡이라고 얘기했지만 기실 메마른 내 세상 속에서 살아 숨 쉬어 주는 것은 오로지 너 하나였으므로. 지수와 함께라면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애틋했다.
9.
“쩡한. 담임이 너 찾아."
"나? 왜?"
"모르지."
어깨를 들썩이며 멀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가버린 여름방학이었다. 개학날 부터 부를 만한 일이 뭐가 있지. 설마 보충수업 짼 걸로 매타작이라도 당하는 걸까.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동안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 정한이 교무실 문을 열며 넉살 좋게 표정을 바꿨다. 쌤, 잘생긴 정한이 왔는데요. 장난기를 가득 담았던 정한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교무실의 분위기를 느끼고는 머쓱하게 굳어졌다. 무슨 일 있나. 교무실 가운데쯤 앉아있는 담임에게로 걸어가며 정한이 빠르게 교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선생 몇의 영 떨떠름한 시선이 제게로 꽂혔다가 모른 척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시선이 주는 이질감에 뒷목을 주무르며 담임에게 다가간 정한이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쌤, 찾으셨다고. 심각한 모습으로 뭔가를 생각하던 담임이 그제야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어어, 정한아. 눈을 마주치지 않는 담임에 정한은 왠지 예감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앉아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상담실에 데려오다 못해 선생님들이 무슨 전투식량마냥 쟁이는 녹차까지 내어주는 담임을 보고 정한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자꾸 뜸을 들이며 요즘의 학교생활 따위나 묻는 것을 보니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
"아, 쌤. 저 이런 캐릭터 아닌 거 아시면서."
"..그래, 정한아, 선생님이 너 믿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
임용에 합격한 이후 20년 동안 남중남고만 맡다가 공학으로 온지 2년 만에 인상이 확 폈다는 담임은, 그 말이 무색하리만큼 깊이 팬 이마의 주름을 채 지우지 못한 채로 발치에 내려놓았던 종이가방을 뒤적였다. 그 가방 속에서 나온 물건을 본 정한이 급한 숨을 들이 마시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수의 스케치북이었다. 지난 여름방학, 그 미술실에서 잃어버린. 지수가 그린 저의 모습이 가득 담겨있을 스케치북. 아이들이 한바탕 몰려들었다 사라진 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기에 급하게 몸을 숨기다 발에 치여 어디 서랍장 아래라도 들어갔겠거니 했었다. 속상해하는 지수를 달래며 안 봐도 그릴 수 있다며, 지금부터는 실컷 볼 텐데 더 많이 그릴 수 있지 않느냐고 실없는 농담을 던졌던 기억이 선명했다. 저게 왜 여기에. 입 안이 바짝 말라 와서 정한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런 거 본 적 있니?"
JS. H. 스케치북 모서리에 낯익은 글씨가 선명했다.
"……."
"……."
"..아뇨, 처음 보는데요."
꽉 쥔 주먹 속에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정말 처음 봐?"
"..예, 정말요."
잠시 정한과 눈을 마주치던 담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너는 처음 보는 거다 이거지?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따라오는 대답이 없음에도 담임은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스케치북을 종이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주인 찾아주려고 물어 본 거야. 됐으니까 이만 가 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정한은 익히 아는-기실 저만이 알고 있어야 할 그 이름을 못 본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신 마른 침을 삼킨 목이 따가웠다.
상담실을 나선 정한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지수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정한이 자리를 피하는 것 보다 지수가 저를 발견하는 것이 더 빨랐다. 순간 그 얼굴에 떠오르는 다정한 빛을 본 정한이 울렁이는 속을 누르려 교복의 가슴께를 꽉 쥐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지수가 뭔가 말을 하려다 희게 질린 정한의 얼굴을 보고는 걱정스런 낯을 했다.
"어디 아파?"
지수가 손을 뻗었고, 정한은 그 손을 피했다. 아…. 둘 모두 말을 잃었지만 크게 당황 한 것은 정한이었다. 그게, 하고 튀어나오려는 변명을 지수가 가로막았다.
"미안. 학교에선 이럼 안 되는데."
"……."
"교실에서 봐."
작게 미소를 지은 지수가 제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정한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을 했다. 씨발, 씨발. 비겁한 새끼. 시뻘겋게 열이 오른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날 지수는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한도 미술실에 가지 않았다.
10.
지수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지 사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천하의 모범생 홍지수가 방학 내 보충수업에도 나오질 않더니 이제는 결석까지 한다고, 아이들은 또 갖은 소문에 살을 더해 잔뜩 부풀려댔다. 사흘간 지수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고 그건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상담실 안에서 지수가 들은 이야기가 무엇이었을지,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지수는 제 손길을 피하던 정한을 떠올렸을지. 겁이 나서 도저히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정한은 지수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멍하니 휴대전화 액정을 껐다, 켰다 하다가 이내 서랍으로 던지듯 집어넣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머리 위로 친구들의 대화가 오갔다.
"야, 그거 들었냐?"
"뭐?"
"홍지수 그 새끼 호모라매?"
정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비명처럼 내지르는 소리에 놀란 친구들이 눈을 껌뻑이다가 아이 씨발 깜짝이야 하고 짜증을 부렸다. 왜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야 새끼야, 간 떨어질 뻔 했잖아. 정한의 반응이 단순한 경악이라고 생각했는지 유난이야 새끼, 하고 혀를 찬 친구들이 말을 이었다.
"그 새끼가 우리 학교 애 하나 좋아했나보던데."
"여자?"
"남자니까 호모지 병신아. 아주 하루 24시간 내내 졸졸 따라다니면서 걔를 그림으로 그리고 별 지랄을 다 했다는 거 아니냐. 근데 걔 스케치북을 이번에 사생대회 나갔던 1학년 애가 연습용인 줄 알고 갖고 갔다가 딱!"
"딱 뭐?"
"뭘 뭐야. 게이새끼 스케치북이니까 애가 얼마나 놀랬겠냐? 바로 학생부에 갖다 낸거지."
"헐, 말도 안 돼."
"야, 진짜야. 홍지수 요새 학교 안 나오는 것도 그거 때문이잖아. 임재원이 교장실 갔다가 그 새끼랑 선생들이랑 걔네 아빠랑 얘기하는 거 들었대. 원래 둘이 같이 징계 때리려고 했는데 걔가 죽어도 사귄 건 절대 아니라고, 지 혼자 좋아 한 거라고 그러더래잖아. 그래서 걔가 강제전학, 일 뻔 했는데 걔네 아빠가 자퇴 시키겠다고."
사귄 건, 절대, 아니라고.
"미친, 존나 더러워."
혼자, 좋아 한 거라고.
"홍지수 그럼 남자 생각하면서 딸도 치고 그런 거야? 야 씨발 걔는 무슨 죄냐."
"어? 야, 윤정한. 어디 가?"
"냅둬. 오바이트 하러 가나 보지."
도저히 앉아있을 자신이 없어 정한은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등 뒤에서 쉼 없이 오가는 저급한 단어들의 남발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닥치라고, 네 녀석들이 홍지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근데 걔가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까 뭘 돌려달라고 했다던데. 엄청 울면서.”
홍지수에 대해 떠드는 그 누구보다도, 정한은 제 자신이 가장 혐오스럽고 끔찍했다.
11.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정한은 머리맡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지수였다. 전화를 받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진동이 끊겼다가, 다시 울리고, 다시 끊기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지수의 이름이 액정 위로 세 번째 떠올랐을 때야 정한은 떨리는 손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지수도, 정한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정한아. 지수가 속삭였다.
- "..나, 데리러 오면, 안 돼?"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의 밤처럼. 지수는 숨을 끊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겠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늘 부를 수 있는 곳에 있겠다고 했는데. 누군가 있는 힘을 다해 목덜미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콱 막힌 숨소리 말고는 나오는 것이 없었다. 정한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조용하던 지수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응, 안 되는구나. 잔뜩 상처 입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정한은 누군가 심장을 발로 짓밟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정한아."
"……."
- "나, 네가 나한테 나에 대해 다 말해달라고 했던 날.. 사실 끝까지 말 안 했던 게 있었어."
태우가 데려갔던 길고양이 있잖아. 사실은 죽었어. 태우가 사실 방에 가둬놓기만 하고 밥도, 물도, 자유도 주질 않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금방 그렇게 돼버렸어. 대문 밖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길래 내가 묻어줬어. 엄마가 사 준 엠피쓰리도, 사실 좀 더 조심히 다뤘으면 몇 년은 더 쓸 수 있었을텐데 내가 욕심 내서 매일 만지작거리다가 고장나버렸어. 내가 마음을 줬던 것들은 다 망가져. 내가 소중한 걸 아낄 줄 몰라서 그래. 미리 말 했으면 좋았을 걸, 너까지 잃어버리기 싫어서 내가 숨겼어. 그러니까 이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 놓는 거야. 내가 도망치는 거야, 나 때문에 너까지 망가질까 봐.
- "정한아. 윤정한."
"……."
- "나, 괜찮아. 정말이야."
아아. 너는, 기어코.
- "그러니까.. 울지 마."
전화가 끊어졌고, 정한은 그제야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번이고 지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지수는 받지 않았다. 정한은 잠들었던 가족들이 놀라 달려 올 만큼 큰 소리로 울었다.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고, 꺽꺽대는 숨을 내뱉으며. 자신은 울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에게 난 작은 상처 하나에도 겁을 내는 착해 빠진 홍지수는 곪을 대로 곪아버린 제 마음 속에 또 한 번 칼을 찔러 넣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입술을 악 물고 있을 것이었다. 정한에게 미움 받을 것이 두려워서. 나를 미워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너라는 말을 끝내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정한은 그 애를 대신해 울어야만 했다.
12.
홍지수가 사라졌다. 말 그대로 증발이었다. 자퇴를 했으며, 어디로 가서 무얼 하고 살 것인지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대화를 섞을 친구가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수에게 전화를 걸 때면 고저 없는 기계음이 없는 번호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기실 운이나 다름없었던 단 한 명의 개천 용 이후 예술가 육성의 꿈이 영 시들해진 학교는 정한이 수능을 마칠 무렵 쓸 데 없이 넓기만 한 미술실을 깨끗하고 좁은 별관으로 옮겼다. 검도부실 위층이었다. 정한과 지수의 이야기가 담긴 미술실은 특별학습실로 환골탈태 하여 신식 도어락을 달았다. 그 애의 허락 없이는 차마 추억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어 그저 억겁을 박제 될 수많은 비밀들이 낡은 벽 아래 묻혔다. 졸업식 날 정한은 지수와 나눠가졌던, 이제는 열 곳이 없는 미술실 열쇠를 강물 아래로 던져버리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끌어안은 채 그 자리에서 또 한참을 울었다. 지수가 그리울 때면 서랍장 깊숙이 넣어둔 열쇠를 꺼내어 봤다가 나중에는 열쇠를 꺼내어 볼 때마다 지수가 그리워져서 관뒀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지수가 떠난 계절이 다가오면 늘 은은한 미열을 달고 살았다. 남들은 환절기 감기 한 번 알람처럼 앓는다고 웃었지만 정한은 빌어먹을 여름방학이 할퀴고 간 상흔임을 알았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영혼을 내어주고라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지수에게 지금 가겠노라 대답을 해주지 못한 때로, 상담실 앞에서 지수의 손을 피한 때로, 지수를 안았던 때로. 차라리 지수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그 날로. 처음부터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다. 지수는 제가 정한을 망가뜨릴 거라 했으나 기실 그 애의 외로움에 기생해 화수분 같은 연심을 갉아먹으며 위선을 키운 건 자신이었다. 나는 침잠하는 너를 구해주지도, 끌어안고 함께 가라앉지도 못하고 혼자 도망친 겁쟁이였다.
13.
눈을 뜨면 온통 그 애와의 기억이라, 도망치려 눈을 감으면 속절없는 회귀였다. 두텁게 드리운 시간의 장막 사이로 노을빛이 어룽지면 정한은 속으로 가만히 셋을 세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배경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오래된 미술실. 낡은 창틀을 가리려 허술하게 달아놓았던 새하얀 커튼 너머 홍지수가 있었다. 작은 얼굴에 어깨가 다부졌던 열여덟의 그 소년. 창틈 새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짐 없는 얼굴 위를 덮으면 채가 긴 눈이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내리 감겼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이 마른 턱 끝으로, 가련한 귓바퀴에서 가늘고 긴 목덜미로, 그리고 다시 부드러운 뺨으로 마음껏 오르내리던 순간을 정한은 깊이 사랑했다. 세상에 오직 너와 나 단 둘 뿐인 것만 같던 순간들. 지수야, 무서워? 힘들진 않아? 선이 고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버릇 같은 물음을 건네면 지수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 짓고는 쉴 곳을 찾은 어린 짐승처럼 정한의 손에 뺨을 묻었다. 나는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수백 번의 재연 속에서 지수의 대답은 단 한 번도 달리 되었던 적이 없었다. 다른 대답을 하는 그 애, 떼를 쓰거나 불만에 찬 입술을 삐죽이거나 대학에 가거나 가지 않거나- 그 누구보다 멋진 어른이 되어 갈 그 애의 모습을 상상 할 수조차 없다는 게 가장 큰 아픔이 되었다. 고해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시절이 생애에 걸쳐 남긴 화상은 영영 앓으며 살아가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14.
하지만, 네가 허락 한다면 나는 네게로 돌아가고 싶은데. 네가 아니라 내가 놓아버린 네 두 손을 꼭 잡고 네 앞에 무릎 꿇고 끝내 하지 못한 속죄를 끝없이 되뇌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처럼 나를 미워하지 못 한 채 또 한 번 괜찮다 대답하고야 말 너를. 다정해서 더 시리게 외로운 그 내음을 코끝에 가득 묻히며 보드라운 너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지수야, 홍지수. 나는. 내가 너를 얼마나.
15.
LA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 지수와의 기억을 더듬어 나가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한 가지는, 정한이 지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수도 마찬가지였으나 그 애는 매 순간 온 몸으로, 눈빛으로, 호흡으로 정한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 정한은 지수에게 채 한걸음이 모자랐다는 것을 그 애 또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또 한 가지는, 지수를 처음 품에 안았던 밤 지수가 했던 이야기.
지수는 정한에게, '네가 나를 버리면' 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잃어버리면' 이라고 말했다.
다 알면서도 너는 왜 끝까지 나를 원망하지 않았는지.
지수를 사랑하는 것 조차 정한에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윤정한은 홍지수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16.
LA에서 이주일을 지내는 동안 정한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거리를 거닐며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데 사용했다. 사진만으로도 넋을 빼놓는 관광지로 가득한 여행 책자는 가방에서 꺼낸 적도 없었다. 수없이 눈을 마주쳐도 전혀 부담 될 것 없는 인파 속을 거닐며 정한은 언젠가 지수가 말했던 캘리포니아의 기적을 떠올렸다. 졸음과 울음으로 자꾸 감기는 눈을 비비면서도 정한의 너스레가, 나지막한 대답이, 온기를 나눠주는 품이 좋다며 순하게 웃던 홍지수. 당장 눈앞에 있는 홍지수의 아픔을 다 옮아 올 수 있을 것처럼 굴기에 급급했던 제가 이리도 비겁해 질 것을, 그 때의 지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와 그 기적이 가장 간절한 것은 정한이었다.
내일 밤이면 정한은 LA를 떠나야 했고,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었다. 동이 터오를 무렵 이미 조바심이 나서 이른 아침부터 발길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밥을 먹고, 문득 발길이 멈추면 한참을 그냥 그 자리에서 해바라기를 하기도 했다. 시간은 허무하게 흘러 정한이 이름도 가물가물한 어느 해변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저녁나절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숙소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자 인상 좋은 주인이 다가왔다. 그가 건네는 메뉴판을 보는 둥 마는 둥 대충 주문을 마친 정한이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가게는 넓지 않았고 인테리어가 독특했다. 손바닥 만 한 것부터 어린 아이의 키만 한 것까지 액자가 한쪽 벽에 가득했다. 솜씨가 제법인 연필 데셍들. 주문을 받고도 어쩐 일인지 정한의 곁을 떠나지 않던 주인이 신이 나서 말을 붙였다. 이야깃거리가 생긴 게, 혹은 정한이 그림들에 관심을 가진 게 즐거운 듯 했다.
「전부 다 내 친구가 그린 거예요. 아시아 사람인데 아주 예쁘고 상냥하죠.」
「솜씨가 좋네요.」
「한국인인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아주 좋아요! 내 친구도 한국인이라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굉장한데요.」
「기다려요. 소개 시켜줄게요. 바로 저쪽에 있어요.」
「아뇨, 그럴 필요는.」
「당신도 멋지지만, 당신에게 충분히 어울릴 만큼 멋진 친구예요. 아마 좋아 할 거예요.」
이런 주인들은 아마 지구 어딘가에서 양성되어 오는 모양이지. 바다 건너에서 이렇게 오지랖 넓은 아저씨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친구라는 사람이 온다면 적당히 상대 해 주다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하며 정한이 벽에 걸린 그림들을 천천히 눈으로 따라갔다. 베니스 비치의 야자수, 퍼시픽 파크의 관람차, 거리의 아이들, 인상 좋게 웃고 있는 사장, 집시 노인.
운동장 벤치에서 바라본 교문, 음료수 캔을 들고 있는 손, 신발끈이 풀어져 널부러진 운동화….
급하게 자리를 박차느라 의자가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가게 안의 손님들이 놀란 표정으로 제 쪽을 바라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벽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소파에 길게 누워 가슴팍에 책을 얹어놓은 채 졸고 있는 얼굴, 턱을 괴고 있는 팔꿈치, 비를 맞으며 달려가는 뒷모습. 투박하지만 한없이 다정한 선들.
그리고 그 그림들의 끝에는, 흑백의 세상 속 유일하게 빛으로 채색 된 그림 하나가.
「Hey, Josh! I've someone to introduce to you.」
팔뚝에 얼룩덜룩한 물감을 가득 묻힌 그 여름, 갈색머리 소년이.
"여기서 뭐 해?"
꿈에서나 겨우 그려봤을 법한 멋진 어른의 모습으로, 그러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사랑스러운 미소로.
처음의 그 날 정한이 건넸던 말을 건네며 지수가 웃었다.
17.
사실은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그림처럼 투명한 얼굴로 신입생 선서를 읽어 내리던 너를 보던 그 날. 입 안에서만 몇 번이나 굴리던 너의 이름. 가볍게 공기를 가르는 동그란 소리로 시작해 지, 하고 꼭 길게 웃는 것 같은 입매를 만들었다가 도로 부드럽게 모아지던 세 글자, 모난 데 하나 없는 그 이름을 가만히 발음해보던 그 순간이 시작이었다고. 네가 나와 같은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날에 내 심장이 얼마나 겁이 날 만큼 빠르게 뛰었는지. 나는 너를, 아마도 처음의 처음부터.
18.
"..나,"
떨리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자꾸 고이는 눈물에 지수의 얼굴이 흐려지는 틈도 아까워서 손등으로 눈가를 마구 문지르자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제 손을 마주잡아왔다. 제가 놓았고, 지수가 잡은 손.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멀리 있었는데,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렸어?"
"넌 그릴 수 있어."
"..왜?"
물결치는 두 눈 속에 영원히 마르지 않을 사랑을 가득 담고서 지수가 대답했다.
"안 보고 있을 때도 항상 네가 보이니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정한은 지수를 제 품에 가득 안았다. 지수에게는 이제 떠도는 사람에게서 나는 쓸쓸한 바람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 자리는 다른 향이 채웠다. 비바람을 이겨내고 깊게 뿌리를 내린 나뭇가지에서 갓 피어난 꽃처럼 포근하고도 찬란한, 말하자면 사랑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19.
슬픔의 파도에 밀려 침잠하는 너에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애달프던 시절을 되돌려 너의 눈을 바라보면 그 속으로 가라앉고 있던 것은 기실 네가 아닌 나였다. 오랫동안 깊은 바닷속을 떠돌던 나는 너로 말미암아 부상했고 정처 없이 부유하던 우연은 비로소 수십 억 년의 우주 속 가장 빛나는 햇살을 만났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지수야."
다른 말로는, 네가 나의 기적이었다. 박제 된 비밀을 이제야 추억 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함께.
"사랑해."
바야흐로 다시 첫사랑이었다.
* 작중 인용 된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황학주, 사려니 숲길을 가는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장이지,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문태준, 가재미3-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안녕하세요, 전야입니다.
제 손을 떠난 글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읽어주시는 분들의 몫이니,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염치 없이 정한이를 위한 변을 조금 해보고자 합니다. 정한이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겁이 많거나 위선적인 아이는 아니었을 거예요. 가장 보통의 남고생에 가까운, 오히려 보통보다는 조금 더 용감하고 상냥한 아이였을 겁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생각보다 더 크고 많은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열여덟의 정한이는 너무 어렸고 그래서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법까지는 아직 몰랐던 게 아닐까 해요. 지수 조차도 떠나는 순간까지 정한이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정한이는 용기있게 기적을 찾아 떠났으며 결국 사랑을 손에 쥐었으니 이만하면 굉장히 멋진 어른으로 자라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애틋한 우리 지수도, 이제는 정한이의 지난 후회마저 사랑으로 감싸 마모 시킬 수 있는 너른 바다가 되었으니 더 이상 아프지 않을거예요. 둘은 지나간 시간들을 기쁘게 추억하고, 서로가 함께 하는 먼 미래를 그리며 늘 곁에 두고 아껴 주고 사랑하고.. 그렇게 지낼 겁니다.
모자란 글솜씨에, 혼자만의 다사다난했던 우당탕당 마감 연대기를 거쳐 많이 부족하고 불친절한 글이 된 것 같아 글 속 두 아이들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예쁜 정한이와 지수를 앞세워 어엿브게 봐주십사 감히 청해 봅니다.
좋은 자리 만들어주신 합작주분들(끝의 끝까지 귀찮게 해드려서 정말이지 면목 없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들숨에 재력 날숨에 행운이 따르셨으면 합니다.), 멋진 작품 빚어내주신 합작러분들(저 너무 떨레요),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가장 고마운 두 사람, 우리 정한이랑 지수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내 행복 전부 여기 있네.
바뀌는 계절 가운데 이제 이 글 속의 정한이와 지수는 정말 온전히 제 손을 떠나 여러분의 마음 속으로 갑니다. 어딘가에서 서로의 숨이 되어 살아가고 사랑할 정한이와 지수가, 그리고 여러분이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모두 건강하세요. 윤홍 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