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쯤되면 동거인지 납치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데. 출근을 안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수도세, 전기세 내란 말도 없다. 그렇대도 아예 신체적 위협이 없는 건 또 아닌데 결박까진 안 가고, 돈이나 몸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정작 본인도 날 어쩌지를 못하는 게 여실히 드러났고 그건 그거대로 귀여운 느낌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나와 마주보고 저녁 메뉴를 고르다 고르다 못 골라서 라면을 먹고 있는 납치범이자 세계 최강 이능력자, 조슈아에 대한 얘기였다.
“국물 튀었는데.”
“어, 아이고. 미안해요.”
“저기요. 내일 쉴 수 있어요, 가게?”
“왜요?”
“나랑 어디 좀 갈래요?”
“어디요.”
반 세기에 걸쳐 모든 사람이 각자의 특기가 극대화 됐다. 그러니까 초능력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그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게 조슈아였다. 조슈아는 불사가 아니고, 천년 만년이 지나도 저 앨 이길 수 있는 이능력자는 없다는 예언가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그간의 조슈아를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는. 무려 네 개였다. 공식적으로 인정한 초능력이 무려 네 개. 어중 띄게 갖고 있는 건 더 많단 소리겠지. 염력에 자가 회복에 순간이동, 예언까지. 식탁의 라면 국물을 닦는 것처럼 간단하게 휘두룰 수 있는 게 그 초능력이었고, 그 조슈아였다.
그 최강이라는 이능력자가 빌런도 아닌 이다지도 평범한 나를 납치한 이유로 돌아가자면, 그게 조금 길긴 한데.
“미안한데 아무래도 당신을 살려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밥 먹는데 그런 얘기를 한다고요? 뭐, 어디 절벽에서 밀기라도 하려고요?”
“어떻게 할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일단 누가 죽어도 아무도 모르는 데는 알아 뒀어요.”
“푸흡.”
”한 번만 더 국물 튀면 그냥 지금 창문 밖으로 던지구 싶을 것 같고요.”
모든 사람이 초능력을 갖는 와중에 주 아주 쓸모없는 능력. 그게 내 능력이었다. 진품명품 폐지시키기, 가 아니라 만물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거였다. 죽었든, 살았든, 내 앞에 있든, 아니든. 그래서 조슈아는 날 납치한 거다. 난 조슈아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거든. 아무도 모르는, 조슈아의 진짜 이름. 나만 알고 있는. 나만 알 수밖에 없는.
“나야말로 미안한데 나 안 죽어요, 조슈아 씨.”
“다중 능력자였어요?”
“그건 아닌데 안 죽더라고요.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가지 맙시다. 우리.”
“근데 다른 방법이 안 떠올르던데. 어쩌죠.”
이름이 없는 것들은 버려졌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기억 안 나고. 그냥 이름이 없는 것들은 기본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삶이라는 가치를. 근데 난 그 이름이 다 보이는 거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학생 땐 더 조용히 다녔다. 엮이면 귀찮잖아. 개학 첫 날 처음 보는 애가 사복 차림으로 내게 와선 너는 무슨 능력이야? 물을 테지. 음, 난 그냥. 뭐가 좀 보여, 땡땡아. 이러면 얘가 이름을 보는구나라는 생각은 못 하더라고. 신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다물고 다물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노상을 냈다. 이름의 가게. 이름을맞춰드려요, 단돈삼천원. 재미삼아보고가세요. 지금은 버젓이 상가까지 들어갈 정도로 커졌어도 여전히 어느 쪽으로는 엮이지 않고 싶거든, 난.
이능력자라기보단 스타였다. 나 말이야. 진품명품을 폐지시킨 장본인으로써 그 대신을 하기 위해 브라운관에 얼마나 나왔는지 모르는데도 가게에선 가격 동결, 사장님이미쳤어요 단돈삼천원. 이 잘생긴 얼굴 삼천 원에 볼 수 있다고 얼마나 인기가 좋은 줄 알아. 여타 분식집보다 장사 잘 돼. 제일 재밌는 건 손님 애인 선글라스에 비친 상간남녀 이름 맞추기. 그 정도였다. 문화재나 귀품은 큰 거 한 장씩으로 가격 올리고. 경찰이랑 조폭과는 아예 상종도 안 해. 경찰이랑 조폭 명단 줄줄이 외우고 가게 들어오면 바로 손절치는 거, 그거 어려운 것도 아니었거든.
“조슈아씨. 우리 이미 이주일 넘게 같이 지냈잖아요. 나에 대한 믿음은 안 생기는 거예요?”
“저 아무나 안 믿어요. 어떡해.”
“아니, 내가 아무나냐고. 이럴 거면 키스는 왜 했어?”
“어디 가도 말 못하게 혀를 뽑아버리려고 했다, 왜! 그리고 니가 했지 내가 했니?”
“와, 방금 조슈아 씨 무서워 나 죽을 뻔 한 거 알아요? 근데 안 죽어요. 봤죠?”
조슈아는 날 알고 온 건 아니었다. 내 능력을 알고 온 것도 아니었고. 근데 조슈아 능력중에 순간이동이 있잖아. 조슈아를 콜택시 취급하는 초능력 협회 소속 뭐시기가 데려온 거더라고. 그땐 몰랐지만 협회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기록까지 삭제한 미친놈 하나가 있는데, 걔 이름 알아내겠다고 이 새끼가 제 와이프랑 바람난 새낍니다 하면서 입을 털었던 거고. 보안에 목 메다는 협회에서 날 찾아올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던 바람에 내가 그 말에 속아서 얼마나 신나게 수다를 떨었는줄 알아. 언제 바람인 걸 알았냐부터 시작해서. 어후.
서비스 차원의 수다가 끝나고 절대 모를법한 이름을 대번에 말하는 날 보고 가만히 나만 쳐다보던 조슈아는 내 소매를 잡고 자기 집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그게 이 동거보다 먼 납치보다는 가까운 사이의 시작이었다.
“장난 좀 그만 쳐요. 그리고 그 일은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잖아요.”
“조슈아 씨. 그게 없었던 일이 어떻게 돼요?”
“좋은 말로 할 때 언급하지 마요.”
“네엥.”
조슈아의 진짜 이름? 없다.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이름이 없으니까. 내 눈엔 천 오백 년이 넘은 식물의 이름도 보이는데. 그러니까 조슈아는 세계 최강 이능력자이면서, 알고 보면 기본의 가치도 없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조슈아는 그게 무서웠나봐. 그걸, 내가 알고 있는 게. 눈앞에서 본 조슈아의 이능력은 정말, 폭발적이었다. 진짜로 폭발적이었다고. 초능력 억제기를 초능력으로 터뜨리더라니까. 상가로 들어간 이후론 실력 좋고 나만큼 잘생긴 보디가드도 문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조슈아가 그냥 억제기를 뜯어내곤 날 납치했다니까. 초능력 무력화를 무력화하는 실력이라니.
“근데 조슈아 씨는 이름이 없는 게 싫은 거예요, 아님 이름을 갖고 싶은 거예요?”
“갖고 싶다면 가져지나? 바보 같은 소리 했으니까 설거지는 그쪽이 해요.”
“설거지는 내가 하는데, 갖고 싶으면 갖게 해줄게요.”
“뭐를요.”
“방법을 찾아보자면서요. 내가 죽는 방법 말곤 조슈아 씨가 이름을 갖게 해주는 것밖엔 없죠.”
순간이동으로 날 찾아오고 납치한 염동력자 조슈아의 이유를 설명하려면 한 가지 능력이 더 있어야 된다. 그게 예지인데, 여타 예언가와는 다르게 조슈아는 오로지 본인의 앞날만 알 수 있었다. 대신 그 앞날에 껴 있는 타인을 구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 조슈아의 꿈에 3일 연달아 나온 게 내 얼굴이었대. 근데 어떤 행동을 하지도 않고, 무슨 말만 계속 했다는 거야.
가뜩이나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꿈에 나와서 뭐라 말하는데, 자기한테 하는 그 한 마디가 들리지도 입술을 읽을 수도 없어서 3일 내내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르겠는 와중에! 날 만나게 된 거라고. 가게에 들어서서 꿈에서 봤던 그 얼굴을 마주하곤 경계하던 찰나에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니 조슈아가 기함해서 데려올 만도 했지. 완벽하게 이해갈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진짜.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네요. 당신은.”
“아직, 이주일 정도 밖에 안 됐잖아요.”
“이렇게 두고 볼 생각은 없었는데.”
날 납치한 조슈아의 손을 잡곤 겨우 잡힌 멱살을 풀면서 침착하게 댈리기 시작했다. 나 쓰레기다, 여태까지 늘 불륜의 이름에만 흥미를 느꼈고 너 같은 사람이랑 한 번도 엮여본 적 없다, 나 어릴 때 지나가는 국회의원 개명 전 이름 말하고 한 번 죽을 뻔 했다, 그 이후로 그런 쪽이랑은 절대 안 엮인다, 내가 뭘 해야 믿을 거냐. 그러니까 누그러진 조슈아가 말하더라고. 일단 내가 좀 지켜봐야 될 것 같아요. 사실 국회의원 얘긴 뻥이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진짜 지켜보게 뒀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 협회 소속 직원에겐 제 값을 받아 냈고, 경호원에게도 조슈아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만두지 말라고 말했고. 다음날부터는 정상적으로 출근해서 일을 하곤 조슈아가 날 납치하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조슈아의 집에서 오늘 누구를 만났고, 내일은 어떤 스케줄이 있고, 모레는 누가 오기로 했는지 빠짐없이 말하는 날 보고도 조슈아는 경계를 안 풀었고. 그러니까 그 와중에 키스는 또 왜 했냐면.
“가요, 그럼. 자고, 내일.”
“안 죽는다면서요.”
“이해할 수 없다면서요. 그럼 이해하게 해 줘야지.”
조슈아 집엔 침대가 하나고, 소파는 좁았다. 그럼 내가 그냥 염력으로 잘 테니까 그 쪽은 침대에서 자라는 조슈아에게. 어떻게 그래요 마음 불편하게, 그냥 같이 자요한 게 나였고. 침대는 퀸사이즈였지만 누워 있다 보니까 어색했고, 둘째 날에도 어색했고, 셋째 날엔 근데 조슈아 씬 잘 때도 향수를 뿌려요 하고 운을 띄웠고, 향수 뿌린거 아닌데 대답했고, 목 근처로 다가가서 킁킁대고 눈 마주치다 보니까 뭐. 왜 갑자기 수작을 걸었냐고? 누가 갑자기래. 잠결도 아니었는데.
개연성이 없긴 했다. 하지만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결국 조슈아는 옷 안으로 들어가 제 가슴팍을 지분대려는 내 손은 저지했지만, 그 도톰한 입술로 눌러 터뜨린 내 이유를 저지할 순 없었다.
이름의 가게
윤정한
홍지수
말랑해진 아랫입술을 입에 삼키고 놓자 은실이 길게 따라왔다. 천천히 눈을 뜨는 조슈아는 숨을 고르며 손을 뻗어 젤을 꺼냈고. 죽여줄 테니 가게 쉬라고 한 건 이런 뜻이었나. 원래 키스가 어렵지 그 다음은 쉽잖아. 오래 참은 거지, 이것도. 어찌 저찌 밤은 넘겨도 아침은 넘기지는 못 한다. 이미 반바지의 사타구니가 팽팽해진 내 허벅지에 젤을 툭 던진 조슈아는 본능에 졌다는 분한 표정이었다. 내 뒤에 바르란 얼굴은 아니란 점에서 특히 더 귀여웠고.
어쩔 수 없었다. 조슈아가 내게 그야말로 칭칭 감기는 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조슈아에게 그랬듯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운명인 셈이었다. 타고나게 쫀득하고 말랑한 살성을 뚫고 들어가다 보면 밑에서 흔들리는 조슈아에겐 꼭 매혹이란 태초의 이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제도 내가 꿈에 나왔어요?”
“도대체 언제 무슨 얘길 할지 궁금해 죽겠네.”
“꿈에서보다 지금이 더 잘생기지 않았어요?”
“자기 입술로 그런 말을 해요?”
“입술이 아니고 입으로.”
땀에 절은 후희를 정리해주는 새에도 손깍지는 놓을 틈이 없었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명랑하기만 한데 신체 부위를 언급하는 것뿐인데도 침묵이 감돈다. 침묵이 아니라 흥분이. 아. 입으로…. 말하던 조슈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려 애썼다.
“이제 없었던 일 하기엔 다 틀렸네. 그래도 여전히 먼저 한 건 그쪽이에요.”
“책임지고 눌러 살라고 하면 그럴게요.”
“웃기지도 않아. 씻기나 해요.”
집에 트와일라잇 같은 책을 두는 조슈아가 단 한 번도 우리가 운명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닌 이름이 없던 조슈아가 할 줄 아는거라곤 이름 때려 맞추기밖에 없는 이능력자를 만났는데 잘생기기까지 했잖아. 죽여 살려하는데 시키지도 않은 다정함으로 하루 일과를 얘기하고 끝엔 꼭 조슈아 씬 어땠어요 묻는데 잘생기기까지 했잖아. 잠자기 전이랑 자고 일어나면 늘 자길 쳐다보면서 잘자라거나 잘잤냐는 말은 묻지도 않는데 잘생기기까지 했잖아. 그냥 나, 되게 잘생겼잖아. 그것도 조슈아 취향으로.
아, 하나 더 있다. 조슈아는 신이 있다고 믿거든.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요?”
“네. 걱정 돼요?”
“아뇨. 근데 날아갈 건지는 물어보고 싶어서.”
“날아갈 건데, 진짜 좋은 말로 할 때 씻으러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공주님 안기로 데려가면 안 돼요?”
땀이 몽글몽글 맺힌 손바닥을 풀어 염력으로 내 몸을 통째로 밀어내는 김에 욕실로 걸음을 옮겨야 했지만, 날 보내는 조슈아의 손길은 곧 만족이었다. 아쉬워서 다시 잡고 만족할 때까지 뒹굴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자, 더 손을 붙잡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
*
신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조슈아 말이야. 기어코 내 겨드랑이를 붙들곤 아무도 볼 수 없는 하늘을 날고 있는 조슈아. 아마 조슈아가 사람 하나 죽인대도 조슈아를 비난할 사람, 많이 없을 걸. 초능력자가 생겨나고 조슈아가 나타나기 이전은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조슈아보단 못하지만 일반적인 능력은 아닌 이들이 군림하기 위해 전쟁하던 시절이었거든.
비어 있던 책장에 알맞은 책이 들어가듯 편안한 세상이 시작된 게 조슈아 덕분인데, 누가 조슈아한테 뭐라고 할 수 있겠어. 게다가 이렇게 예쁜 얼굴로 아, 실수 하고 사르르 웃으면 나 같아도 믿고 넘어가겠다. 그리고 그렇게 신으로 여겨지는 조슈아가 이름이 없단 걸 아는 게 나 하나인 거고. 조슈아는 자길 떠받들 듯 모시는 사람에 질색하고, 그저 그런 히어로이길 원하지만 추락하는 걸 원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거든.
“와아. 조슈아 씨. 누가 죽을 자리로는 너무 예쁘다, 여긴. 그쵸.”
“있잖아요, 지금 입고 있는 옷.”
“에이. 너무 본론부터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 옷 입은 그 쪽이 거기 서 있었거든요.”
“아. 꿈에서요? 드디어 오늘이구나.”
어쩐지 옷 골라 입을 때부터 표정이 심상치 않더니. 조슈아가 꿈에서 본 오늘. 조슈아의 꿈에 나올 정도로 불안한 예감. 건너편의 작은 폭포가 강에 묻혀 고요하고, 서 있는 땅 위에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은 무성한 나무, 발 밑 곳곳에 피어 있는 여린 꽃, 우연찮게도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 조금씩 해를 가리는 회색 먹구름,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꼭 영원할 것 같았다. 진실을 털어두기엔 제격인 장소였지. 내가 조슈아에게 할 수 있는 행동과 해줄 수 있는 말.
이제야 말하지만 내 꿈에도 조슈아가 나온 적이 있다.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으로 조슈아는 물살에 쓸려 내려간다. 그건 아마 꿈이었을 거다. 꿈인 것 치곤 난 그냥 눈을 감았다 뜬 기분이었지만, 그것만은 꿈이길 바란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악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 때문에, 내가 나오는 조슈아의 꿈도 악몽일까 걱정한 날이 있었다.
“난 조슈아 씨를 위협할 생각이 아예 없는데. 오히려 아까 아침이 더 위험했던 거 아닌가?”
“진짜 한 마디만 더 해요.”
“사랑을 나눈건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요? 아이도 아니고.”
“있잖아요. 모르겠지만, 난 이름이 없어서 어떤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좀 그래요. 어떤 이름도.”
“설마 날 사랑해서 한 게 아니었단 말은 아니죠?”
“난 기본적인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구요. 알잖아요, 당신만.”
이름을 갖게 해준단 거. 거짓말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름 모를 꽃에게도, 가짜 이름을 갖고 그렇게도 어렵게 살아온 조슈아에게도 미안하지만. 천천히 무릎을 굽혀 꽃들을 쓰다듬었다.
“이 꽃 이름, 뭔지 알아요?”
“데이지…인가? 모르겠어요.”
“아니긴 한데, 데이지가 좋으면 그걸로 해요.”
“뭘요?”
“어떤 꽃이 갖고 있던 데이지라는 이름, 조슈아씨에게 뺏어다 줄 수 있다고요. 조슈아 씨가 원하면. 그럼 조슈아 씨는 데이지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거고, 데이지건 뭐건이었던 꽃은. 이름이 없어지는 거고. 그럼 그 땐 날 사랑해서 안았다고 말해주면 되고.”
도덕이나 인격을 건드리려는 건 아니었다. 비꼰 건 더더욱 아니고. 진짜 그냥 그게 내 능력이었다. 내가 조슈아를 데이지라 부르면 사람들은 모두 조슈아가 데이지란 걸 알 수 있게 되고, 데이지가 데이지가 아니란 걸 알게 되어 가치 없는 것들을 삭제하게 되겠지. 꼭 그 이름은 아니어도 됐다. 만약 조슈아가 겨우 그 이름 하나를 가지지 못해서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지 가늠했다면, 난 감히 그 사랑이라는 모조리의 단어를 오직 조슈아의 진짜 이름으로 가져다 줄 수도 있었다.
내가 조슈아의 꿈에서 어떤 말을 했고, 지금 이 현실에서 어떤 말을 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있었다. 관계를 맺고도 나를 절벽으로 데려온 조슈아가 겨우 꽃의 이름을 뺏는 걸로 난색하며 고민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자괴감이 들 거라고. 하지만 조슈아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내 말을 이해했고, 큰 고민 없이 대답했다.
“데이지는 너무 예쁜데요. 해줄 거면 그냥 사람 이름으로 해줘요.”
“내가 줄 수 있는 사람 이름은 윤정한밖에 없는데. 뺏고 싶어요?”
“그럼 당신 이름이어야겠네요.”
“난 데이지보단 더 예쁘고, 조슈아 씬 내 이름을 한 번도 안 불렀으면서?”
조슈아가 원한다고 하면 대통령 이름까지도 뺏어올 수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조슈아는 믿는 것 같진 않지. 이름을 바꿀 수 있단 내 말을. 그러니까 기왕이면 내 이름으로 하겠단 말조차도 농담이지. 그래도 이름이 없었던 조슈아가 자기 고통을 남한테도 느끼게 하게끔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의외이긴 했지만. 사실 내가 꽤 예전부터 조슈아 빠였거든. 조슈아는 그럴 애 아냐.
“에이. 그 무서운 걸 어떻게 불러요?”
“내 이름이 뭐가 무서워요? 깨끗한 은하수라고, 좋은 이름인데.”
“그쪽. 딱 그 꽃 같거든요? 데이지인가 싶은데 아니라던 그 꽃. 이름을 다루고 죽지 않는 거. 난 그게 초능력이라고 아는데 당신은 능력은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거 생각보다 무섭거든요.”
“조슈아 씨는 세계최강 능력자이지만 어디 가서 누구에게 스스로 그렇게 소개하진 않잖아요.”
“그게 무슨….”
진실에 다가서는 조슈아는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도 겁먹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시절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손에 뭘 쥐고 있어도 달라지지 않을 소년이었다. 난 손에 쥔 걸 놓칠까봐 그렇게 이 세상을 망쳐왔는데.
“당신이 세계 최강 능력자보다 더 오그라드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란 거죠?”
“의심이 많다더니. 지금 조슈아 씬 내가 뭐라고 해도 믿을 눈빛인데요.”
“이렇게 오래 꿈에 나온 사람은 없어요. 아무도. 여태까지 별 일이 다 있었는데, 내 별 일 중에 당신이 제일일 일 것 같아서요.”
“아하하. 이제는 나도 아무것도 못 돼요.”
“왜요?”
“인간은 나의 요람을 잊었으니까. 완전히.”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반가운 건지, 두려운 건지. 눈이 커졌다가 입이 벌어지는 조슈아의 표정만 봐도 지금 나의 숨소리와 불어오는 바람까지 모두, 조슈아의 꿈에 나온 그 장면이란 걸. 그렇구나. 아. 난 이 얘길 조슈아에게 전하고 싶었구나. 이 말을 들으면 조슈아에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나의 존재를 밝히고 조슈아의 인생을 바꾸긴 하겠지.
나는 공명정대했다. 나는 자비로웠다. 나는 인간을 사랑했다. 인간은 나를 경배했고, 나를 찬양했고, 나는 빛이요 위대한 만물의 창조주였다. 나의 사랑스런 아이가 대홍수에 쓸려나가기 전까지는. 차마 그 옷가지 하나로 남기, 딱 그 전까지는.
“아주, 오래 알았어요? 나를?”
“오래 전에. …너무 짧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재볼 수 있을 만큼 오래 전요?”
“내가 뭔지 되게 궁금해 하네. 이유가 있어요?”
한참을 울었고 한참을 배회해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창조주로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기 시작했다. 서투른 처음은 창조물에 향했다. 한 동안 어떤 새로운 것도 이름을 갖지 못했고, 절실한 기도가 모두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공명정대하거나 자비롭거나 인간은 사랑하지 않았다. 각기의 것들은 스스로 이름을 찾았고, 뛰어넘어 이능력을 가졌다. 내 원망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상관없었다. 언젠가 신으로 불리울 사람이 나오더라도,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건 하나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가질 이름이 어떤 건지 알아야 하니까.”
“신의 이름을 갖는다고 특별해지는 건 없는데.”
“허어! 신이라서 그렇게 잘했구나?”
“뭐라고요? 아하하하.”
아마 너도 내가 보고 싶었나봐. 너도 내가 그리웠나봐. 신으로 불리는 사람이 돼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났으니까.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욕심도 없이 이름을 탐내지 않고도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너도 어쩌면 나에게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신의 권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관장하는 것. 그걸로 가게까지 냈으니까 이 창조주가 얼마나 정신이 나갔는진 알만도 하지.
초조했다. 어떻게 해야 조슈아가 날 만나게 될까. 어떻게 해야 조슈아가 날 만나러 올까. 어떻게 해야 그 입에 다시 입맞추고 기어코 그 사랑한단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너를 다신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엔 납치된 걸 보면 허공에 외쳤던 나의 기도가 어디엔간 먹혀들었나 보다. 조슈아가 내 가게를 찾아 왔을 때 딱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도 납치를 당할 지는 상상도 못 했지만.
“믿는 거예요? 내 말.”
“신이 아무나인 건 아니니까. 믿어야죠?”
“조슈아 씨가 오래 윤회했고 내가 조슈아 씨의 환생만을 기다렸다고 해도요?”
“신이 누굴 기다리기도 해요?”
“돌려줄 게 있었어요.”
신이 누굴 기다리기도 하냐니. 정말 조슈아 다운 질문이었다. 돌려줄 게 많단 건 윤정한 다운 대답이었다. 내가 조슈아를 위한 윤정한이 되도록 눈을 감았던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려놨는지 몰라. 아이의 머리칼에 꽂아줬던 하나의 비늘을 생각하며 모조리 뜯어 없앴고, 귀여워 놀리고 싶던 아이를 앞에 두고 차마 벗지 못했던 신의 위상을 던져 버렸다.
덕분에 너무 쉽게 손에 쥔 걸 조슈아에게 줄 수 있게 됐지만.
“뭘 돌려줘야 됐는데요?”
“홍지수.”
누가 가질세라 어떤 존재에게도 주지 않은 이름을 이제야 돌려준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알 수 없어 각국의 언어로 준비해 둔 이름 중 딱 너에게 주고 싶었던 이름을 돌려준다. 명명, 하는 순간 눈이 커진 지수에게 데이지나 윤정한은 덜 아름다운 이름이지. 다른 나라에서 불렀던 다른 이름은 아니었지만 몇 년이 흘렀는걸. 다시 나타난 아이가 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도 수 없이 한 시간이었는데, 이 정도면 감지덕지인데다가 충분히 행복했다.
앞으로의 일도 쉽게 생각할 순 없었다. 고귀한 만큼 위협이 많은 게 조슈아의 삶이었고, 앞으로 홍지수의 이름을 가져서 따라올 불행은 견딜만한 것들인지 가늠이 안 됐다. 하지만 이제야 만났는데 걱정 때문에 겁내하는 건 늘 인간이나 하던 행동이다. 게다가 지금의 조슈아랑 그때의 지수는 다를 수도 있어. 환생한다고 해서 삶이 연장되는 게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애초에 난 지수가 어떻게 조슈아라는 가짜 이름을 가졌는지도 모르고.
“와. 이게. 이런 느낌이구나.”
“주지 않은 걸 원망하진 않아요?”
“뭐. 고마운데. 어쨌든 줬잖아요.”
“별 일이 많긴 했나부다. 이런 일로 많이 안 놀라는 거 보면요.”
“아닌데. 지금. 거의. 승천할 것 같아요.”
실제로 염력으로 날아다니면서. 어쨌거나 지켜보고 있자면 도톰한 입술로 지수, 하고 작게 읊조리는 거 보면 싫진 않은가봐. 뭐든 손에 쥐어주면 좋아하긴 했다. 권능이 스쳐간 손바닥인데도 지수는 탐하는 것보단 남은 걸 소중히 한다. 내가 말 했잖아. 쟨 그런 애라니까. 몇 백 년 울고, 몇 천 년 방황하고, 또 몇 천 년을 외면했던 시간은 미소가 번진 지수의 얼굴로 모두 보상받았다.
그렇다고 앞으로 내 할일을 할 거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 많이 내려놨다니까. 나도 이제 좀 제대로 해 봐야지. 연애.
“당신 죽이려고 했던 거 취소. 그럴 이유 완전히 없어졌어요.”
“그러네. 내가 주고 내가 없애는 이유라니 되게 웃기다, 그쵸.”
“그러니까 이젠 납치 안 당해줘도 돼요.”
“아쉬우면 내가 이상한 건가?“
“대신 내가 매일 가게로 갈게요.”
그러면 계속 얘기해 줘요. 내 이름. 여전히 당신만 아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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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만큼 사랑스런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참여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