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fgebluht


호접지몽

J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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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나는 꿈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꿈이라는 것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꿈. 원체 가진 팔다리로는 날 수가 없을 것이고 날개 따위가 달렸을 거라곤 짐작했는데. 눈에 생경한 다리들이 보였다. 간만에 몸이 아주 가벼웠다. 가뿐하고 홀가분했다. 그렇게 한참을 날았는데 어느새 나는 다시 내가 되어 있었다. 추락하나 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탈피였다.

대체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호접지몽(胡蝶之夢) w. J2

 

 

-헤어지자

-...

-알지?

 

정한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끄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던데 몸이 가벼운 건지 마음이 가벼운 건지. 늘 그렇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정한이 자리를 나섰다. 정한이 말을 끝낼 때까지도 멍하니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던 지수가 정한아, 하고 불렀다. 이제 와서 붙잡기라도 하려는 건가? 뒤를 돌아보니 지수가 정한이 마시던 커피를 들고 있었다. 이거 안 가져가? 정한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시 지수가 드라마처럼 손에 잡히는 대로 끼얹을까봐 잘 마시지도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정한이었다. 너는 역시 아무렇지 않구나. 

카페 밖으로 나온 정한이 눈가를 슥 비볐다. 아 이놈의 미세먼지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 그래도 확실히 요즘은 멘트가 편하다. 나름 트렌드를 따라가 본건데 ‘알지?’는 좀 심했나.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홍지수 걔가 뭘 알겠냐고. 아마 지수는 모를테니 이러는 거였다. 묵은 비겁함을 알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정한은 오늘 열 번째로 지수를 찼다. 

   

 

-

 

 

시작은 남사당패 꼭두쇠와 참판댁 도령이었다. 정한은 수완이 좋아 이른 나이에 남사당패의 꼭두쇠가 되었다. 정한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재주꾼들을 모아 판을 벌렸다. 정한의 사당패는 금세 유명세를 탔는데 그 패의 예인들이 다 엄청난 미남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람 모으는 데 특출 났던 정한은 양인이더라도 조건이 괜찮으면 패에 합류시켰다. 사람들은 천것이 양인에게 재주를 부리게 한다며 욕을 하다가도 사당패의 재주를 보면 입을 꾹 다물거나 떡하니 벌렸다. 다들 정한이 얼굴 한번 가까이 들이대면 어쩌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놈의 얼굴이 다 뭐라고. 가끔은 씁쓸하다가도 주어진 건 아깝지 않게 잘 써먹자는 주의였다. 어차피 한번 살고 죽을 인생 이렇게 마음 맞는 아이들과 한바탕 놀다 가면 원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뒤집어지게 웃는 얼굴들만 봐서 그런지 하루는 입이 일자로 굳은 도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딱 보니 장가도 안 간 것 같은데 왜 상투를 틀었대. 사정은 모르겠지만 목 아래 꽉 매인 갓끈이 답답해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치근덕대고 싶었다. 정한이 빙글빙글 웃으며 도령에게 다가갔다. 뭐 끽해봐야 매밖에 더 맞겠나. 

 

-참판댁 아드님이신가?

-…

-이름이?

-...홍가 지수일세.

-지수... 내 또래같아서 하는 말인데.

-...?

-숨은 쉬고 사셔.

 

정한이 지수의 갓끈을 잡아 당겨 살짝 풀었다. 지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거 왜 이러시나 내가 저고리 끈을 푼 것도 아닌데. 끝까지 농을 치며 뒤돌았지만 지수의 표정에 두근거린 것은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부터 지수는 자주 사당패의 연희를 보러왔다. 참한 양반 도령은 재주를 구경하는 무리들 중 단연 눈에 띄었다. 혼자 금띠를 두른 듯 빛이 났다. 정한은 그 눈에 들고 싶었다. 그 눈에 비친 자신도 그렇게 빛나길 바랐다. 한동안 판 뒤에 물러나 있던 정한이 다시 놀음판에 나섰다. 잘생긴 꼭두쇠가 다시 판에 등장했다며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지수가 사당패를 보러 다니면서부터 홍 참판의 성난 목소리가 담장 밖을 넘었다. 매번 담벼락 밑에서 지수를 기다리다 덩달아 혼이 나는 정한이었다. 저렇게 혼나는데 내일은 못 오려나? 그런데 지수도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샌님인줄 알았는데 따박따박 말대꾸도 잘하더라. 분을 참는 얼굴로 집을 뛰쳐나오다 쭈그려 앉아 기다리던 정한을 발견하면 항상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정한을 만난 후 일자로 굳어 있던 지수의 입술 양끝이 갈고리 모양을 그렸다. 그 고리에 정한의 마음이 걸렸다. 

 

홍 참판은 말로해서 안 되는 아들 대신 천한 광대들을 족쳤다. 절뚝거리는 정한을 보고 지수가 많이 울었다. 놀이를 해야 하는데 볼기짝 다 터져서 어쩌느냐. 엉엉 우는 낯짝에 대고 그럼 네가 오질 말아야지. 네 아버지가 우리 다 죽인다. 하는 미운 소리를 해도 지수는 계속 정한을 보러왔다. 모은 돈을 다 털어 사당패에 약재를 넣어주었다. 

 

그날. 지수는 정한을 끌고 외딴 산기슭의 한 정자로 향했다. 

 

-정한아 여기 정자 이름이 뭔지 아니?

-.호...접? 

-그래. 호접정(胡蝶亭)이다. 

-여기는 왜?

-나비가 장수와 부귀를 가져다주는 상징이잖아. 여기서 지극히 원하는 바를 빌면 이루어진다 하더라고.

-넌 뭐가 그리 더 이루고 싶냐? 좋은 집에 태어나 입신양명 길만 걸으면 되는 양반댁 자제께서.

-…

 

지수가 대답하지 않고 소매에서 작은 호리병과 그릇 하나를 꺼냈다. 언제 그런 것은 챙겨 왔냐? 나 참 소매 넓은 놈들은 이래서 믿을 것이 못 돼. 정한이 툴툴거리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은 지수가 물 한 그릇을 따랐다. 

 

-정한아.

-응?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어?

 

정한이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지수와는 이틀에 한번은 꼭 보았다. 지수가 놀이를 보러오든, 자신이 지수를 찾아가든. 왜 그리 자주 만나는지는 서로 한 번도 이야기 한적 없었다. 글쎄. 나는 저 애를 어떻게 생각하나. 처음엔 지수에게서 나는 빛을 묻혀오려고 자꾸 찾아갔었는데. 지금은 그냥 안 보면 보고 싶었다. 사실은 같이 있어도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내 인생에 잃을게 생겼구나. 

 

-뭘 어찌 생각해. 내 재주나 보러 좇아오는 범생이 양반이지. 

-그게 다야?

-…

-나는…

-…

-나는 네가 좋다 정한아.

-...나도 네가,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 

-…

-나는 네가 정말 좋다.

-...

-너는 아니더라도 괜찮아. 여기도 내가 우겨서 억지로 온 것이라 해도 괜찮아. 네가 나에게 더럽다 해도 괜찮다.

-...

-그냥 내가 말하고 싶어서 그래. 네가 좋아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 정한아.

 

샌님 도령은 고집도 세고 겁도 없었다. 정한이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낼 생각도 못해 본 말이 지수의 입에서 술술 나왔다. 담담하게 진심을 고백하는 지수를 꼭 안고 싶었지만 한번 지수를 안으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정한의 속에서 무엇인가 끓어올랐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호흡으로 눌렀다. 조심스럽게 지수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너보다 신분도 낮고 가진 것도 없다. 

-…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어찌 살지 목표도 없어. 

-…

-그런데 너는 늘 보고 싶더라. 

-...정한아

-나 우리 애들한테 진심이야. 걔들이 내 자랑이고 자부심인데... 네 아버지한테 매 맞고 쥐어 터져도 너 따라 여기까지 왔지 않니?

-…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지수가 두 손으로 정한의 옷깃을 잡고 끌어당겼다. 정한이 숨고를 새도 없이 지수의 손이 정한의 얼굴을 감쌌다. 벅차올라 입술을 맞댄 것 치곤 서툴었다. 정한은 그런 지수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행여나 자존심을 건드릴라 얼른 웃음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지수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항상 긴장 되어 있던 지수의 등과 날개뼈를 어루만졌다. 정한의 손에 지수가 움찔하며 멈추었다. 그렇다고 입을 벌린 채로 멈추면 어떡해. 이번에는 숨소리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지수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입술 대 입술로 느껴보니 늘 봐오던 것보다 더 도톰했고 더 따뜻했다. 너는 입술에도 비단 옷을 입히나 보다. 정한과 지수가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잃을 것이 생겼다. 나쁘진 않구나. 아니 실은 너무 행복하다. 정한은 지수가 자신의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지수를 잃을까 불안하더라도 영원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지수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한은 홍 참판댁 아들 상(喪)의 제삿밥을 먹게 되었다. 

 

홍 참판이 아들 상을 3년씩이나 치른다고 손가락질 받는 동안 정한은 놀음판에 나서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하루 종일 낮은 천장만 바라보았다. 사당패 아우들이 몰려와 정한을 달래도 소용없었다. 참판댁 창고보다 못한 이 집이 폭삭 무너졌으면, 파묻혀 죽어버렸으면 싶었다. 

지수의 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릴 즈음에야 정한이 정신을 차렸다. 3년 동안 죽기만을 바랐는데 질긴 명이 끊어지질 않았다. 또 다시 잃을 것 없는 삶이 찾아왔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삼년이 걸렸다. 

 

-형님. 그런데 진짜 신기해요.

-무엇이?

-형님 그동안 제대로 먹은 것도 없고 내내 누워있기만 했는데. 어째 변한 것이 없어요?

 

정한이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아우들의 입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그대로였다. 한 터럭 먼지도, 세월도, 심지어는 슬픔도 거쳐 가지 않은 얼굴이었다. 

3년이 더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정한은 그대로였다. 사람, 시간, 심지어는 세상을 흔드는 거대한 세력의 판마저도 모든 것이 정한을 피해 스쳐지나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삶조차 잃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오래 살면 그렇게들 되는 것인지. 정자 이름도 겨우 읽던 정한은 한문을 통달하고 외국어까지 익히게 되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져도 제 몸 사리지 않고 살았다. 그렇게 강산이 두 번 바뀌었을 때인가. 

정한은 다시 지수를 만났다. 

 

또 사랑했다. 지수를 닮은 지수가 그리웠고, 간절했다. 지수였던 지수를 매일 찾아갔다. 처음처럼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그 입꼬리에 또 마음을 걸었다. 손을 잡고 걸었다. 서로를 보며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다시 만나기 위해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잊지도 않았구나. 곱절은 더 행복했다. 

하지만 지수는 정한과 달리 시간을 살았다. 그때 그 도령보다 가진 게 많은 정한이 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애정을 주었는데도 30년을 살기 전에 죽어버렸다.

 

두 번이나 지수를 잃어 문드러지는 속과 반대로 정한은 점점 더 빛이 났다. 모두 낡고 흩어져 갈 때 혼자만 반질반질 백옥같았다. 그러나 겉만 그대로였다. 알맹이는 몸 아까운줄 모르고 뛰고 구르던 옛날의 정한이 아니었다. 죽음이 무서웠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한이 충동에 휩싸일 즈음에 지수는 다시 나타났다.

 

이런 식이었다. 지수를 또 만나고 어김없이 사랑하고 매번 마음이 찢겼다. 이렇게 가다간 갈기갈기 조각나 나중에 지수가 나타나도 줄 마음이 없을 것 같았다. 정한은 이제 자신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처가 잡혔다. 

일본에 건너가게 됐어.

나 참전해

 

남 탓을 했다. 

 

지겨워졌어. 

내 마음이 변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도 해봤다. 정한이 지수에게 이별을 고할 때마다 지수는 다시 처음의 일자로 굳은 입모양으로 돌아갔다. 한 번도 왜냐고 묻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도 지수는 지수구나.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정한은 그렇게 99도까지만 끓게 됐다. 그래도 뜨겁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기대와 부담이 작은 몸에 쏟아져 왔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지수는 자주 앓았다. 늘 약첩을 달고 살았고 열 살이 되기 전엔 집밖을 잘 나서지도 못했다. 집안에선 남몰래 굿도 했다. 양반집에서 굿한다는 소문이라도 날까 몸 사리던 홍 참판을 보며 자란 지수는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제 몸이 약하니 누구든 과부 만들기는 싫었다. 지수는 혼례도 치르지 않고 상투를 틀어 올렸다. 

 

정한이 푼 건 지수의 갓끈만이 아니었다. 딱딱한 것은 깨지기 쉽고 언 땅도 봄 햇살에는 녹았다. 엄하게 자란 참판댁 도령 지수가 정한을 신경 쓰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르는 인생에 대한 호기심은 모르던 세계로 가는 길을 열었다. 정한의 손끝이 닿을 때 저릿했던 느낌이 가슴으로 옮아 온 것인지 새로운 떨림이 지수를 덮쳤다. 지수는 머리를 다시 내려 땋았다. 

 

아버지가 혼을 내는 것도 사당패를 불러다 매질하는 것도 다 지수를 걱정하는 마음임을 알았다. 하지만 정한은 지수의 첫 욕심이었다. 다른 것들과 다르게 잡아도 손 틈사이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시간을 지키지 못해 혹시 가진 않았을까? 지수가 맘 졸이며 나오면 정한이 고운 얼굴 담벼락에 닿는 줄도 모르고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수는 정말 정한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정한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수는 어차피 곧 꺼질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기어이 죽을 날을 받아 놓고 호접정에 갔다. 나비 정자. 소원을 이뤄준다는 정자였다. 그렇다고 소문을 믿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곧 죽을 사람에겐 어떤 기념식이 필요했다. 지수가 이루고 싶은 사람은 정한뿐이었다. 같은 마음이라면 달 아래 물 한 그릇 떠다놓고 간이 혼례라도 치를 셈이었다. 백년가약을 맺어도 정한이 과부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정한은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지수도 알았다. 

 

입을 맞추던 정한의 손이 지수의 옷고름을 당겼고 지수도 저고리를 젖혔다. 정한의 손이 저고리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밤엔 쌀쌀했지만 몸이 데워지니 상관없었다.

모든 것을 잃기 전엔 사람이 참 절박해지는구나. 지수는 정한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든 거듭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밝아져오는 것을 보며 지수는 정한을 두고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얼마 후 지수는 첫 번째 삶을 끝냈다. 

 

두 번째로 정한을 만났을 때 머리가 깨져 죽을 뻔했다. 전생의 기억이 밀려오는 느낌은 혼란스럽고 불쾌했다. 그래도 정한을 기억해냈다. 정한이 지수가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20년도 훨씬 지났을 텐데. 순간 정자에서의 밤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이 몇 번이든지 이렇게 살고 싶다고 빌었던 그 밤이. 동시에 정한이 무엇을 빌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한 번 사는 삶이라고 내던진 듯 굴더니. 너 그날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빌었구나. 

 

그래서 두 번째에도 열심히 사랑했다. 설렘을 즐겼고 순간에 충실했다. 매일을 아쉬워하며 행복하게 보냈다. 하지만 정한이 지수를 전력으로 사랑하면 할수록 지수는 빨리 죽었다. 죽음이란 지수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조급하다가 허망해지고 끝내 절망스러워 하는 정한을 보며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 우리 그날 잤지.

 

가슴 터질 것 같던 그날의 밤은 100도를 찍으면 끝나는 규칙을 만들어냈다.

 

다행이라 해야 할 지 관계 그 자체가 끝은 아니고 딱 감정의 순도인 듯 했다. 이걸 알고 조절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정한도 제법 감정을 조절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한편으론 씁쓸했다. 몸을 섞는 행위에 마음을 다 하면 안 되니까. 길게 만나기 위해선 오래 뜨뜻미지근해야만 했다. 

 

정한은 감정조절만 하는 게 아니라 나름 시간 계산도 하는 것 같았다. 지수가 서른이 되기 전에 어김없이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얼마 뒤면 실제로 지수의 ‘그 삶’도 끝났다.

이 방식을 거듭하며 깨달은 건 정한은 지수와 헤어질 때 지수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다 좋았다. 매 생에 만나는 윤정한도 좋고 노후 걱정 따위 할 필요 없는 삶의 반복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정한이 왜 한번을 안 물어보는지는 의문이었다. 다 기억하느냐고. 처음 다시 만났을 때 모르는 사람인양 쭈뼛쭈뼛 소개하는 모습이 귀여워 받아주었는데 그 이후로도 정한은 매 생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굴었다. 바보야 좀 물어보지. 

 

기록적인 8년의 연애가 끝났다. 아 윤정한 이번엔 되게 성의 없네. 알지? 알지가 뭐야 알지가. 그러고 보니 처음도 좀 성의 없었다. 지 상판대기만 믿고 번호 주실래요? 어이가 없어서. 다음에도 이딴 식으로 하면 확 다 말해버려야겠다. 나 다 기억한다고.

그래도 재미있었다. 평탄하게 만났다면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얼추 다해봤다. 연락 없이 불쑥 찾아가 함께 점심을 먹는 것, 쓸데없이 높은 곳 까지 올라가 번쩍거리는 도시의 야경을 보는 것, 밤부터 아침까지 같이 누워 꿈쩍도 안하고 안고 있기 같은 것 말이다. 정한은 몇 년을 만나도, 몇 번을 만나도 질리지가 않았다. 

 

지수가 정한이 남기고 간 커피까지 다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사뿐히. 기지개를 시원하게 킨 지수가 카페 문을 당겨 열었다. 

 

 

-

 

 

-지수야

-응.

-나 방금 꿈을 하나 꿨다.

-무슨 꿈?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이었다. 날개도 내 것이 아니고 그 다리도 내 것이 아닌데 그 날고 있는 느낌은 확실히 내 것이었어. 

-나비정자... 여기 이름값 하는가보다. 

-아 나 지금도 그 기분이 생생하다.

-나비가 되어 뭘 했는데?

-응?

-나비가 되어 무엇을 했냐고. 그냥 날아다니기만 했어?

-음…

 

아! 나,

 

꽃이 피기를 기다렸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