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시끄럽다. 3월의 강의실은 당연히 소란스럽기 마련이었으나 오늘 듣는 수업은 교양이었다. 아는 사람들이 모인 전공 수업과 다르게 교양을 듣는 강의실이 시끄러울 일은 없으니까. 그것도 개강 주에는 더더욱. 지수는 소란스러움의 근원지를 향해 눈길을 줬다. 단체로 같은 수업이라도 신청한 건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중심에는 노란 탈색 머리의 남자가 있다. 어깨를 넘는 애매한 길이의 머리 때문에 처음엔 여자인가 싶었지만 등빨을 보니 그건 아니다. 뭐, 어깨 골격으로 성별을 판단하는 것도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지수는 별거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한 눈가를 손바닥 끝으로 꾹꾹 누르며 소란과 멀어질 수 있는 자리를 물색했다. 이 수업은 다 좋은데 월요일 오전 9시에 시작한다. 강의명은 서울의 역사 탐방. 120명이 듣는 대형 강의였다. 중간과 기말이 없고 서울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다녀오는 조별과제로 인증사진과 레포트만 제출하면 되는 에타 강의평 4.9점의 꿀교양. 지난 2년 동안 매번 실패했던 수강신청을 이번엔 운이 좋게 성공했다. 3학년부터는 전공만으로도 빡세서 교양은 설렁설렁 들으며 점수 따고 싶은 간절함에서 나온 노력의 결과였다. 강의실 분위기가 어떻든 지수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기에 곧장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주위를 대충 둘러보니 같이 수강신청에 성공한 슬비는 아직 안 온듯했다. 지수는 제 백팩으로 슬비의 자리를 맡아놓고는 핸드폰으로 슬비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치려던 때 옅은 플로럴한 향에 고개를 들었다. 슬비 왔구나.
“슬비 오랜만.”
“와, 진짜 오랜만이다. 못 본 사이에 좀 탔네? 자리 맡아줘서 땡큐. 저기 봤어? 윤정한 있어.”
“…윤정한?”
“와, 대박. 복학했다더니 이 수업 듣나봐.”
어깨에 닿지 않는 기장의 단발머리를 귀 뒤로 꽂아 넘긴 슬비는 지수의 옆에 앉으며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동기는 지수보다는 강의 십 분 전인데도 시끌벅적한 쪽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아, 윤정한 알아? 오빠는 모르려나? 왜, 우리 학교에서 연영과 애들보다 유명한 사람 있는데 우리 입학할 때 군휴학해서 동기 애들이 아쉽다고 했었잖아. 그 아역배우 했다는. 기억 안 나려나.”
“기억나지.”
“진짜? 오~. 홍지수 기억력 좋은데~.”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슬비가 장난스럽게 지수의 팔뚝을 친다. 다짜고짜 2년 전 새터에서의 기억을 들이밀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기억나고말고. 이 학교에서 만큼은 연예인보다 유명하다는 이름 세 글자. 유명인이 복학했구나. 지수는 눈을 돌려 아까보다는 주변에 사람이 많이 빠져 더 선명하게 보이는 노오란 뒤통수를 잠시 응시했다. 복학한 줄은 몰랐는데. 윤정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군휴학 후 복학한 사람 머리가 뭐 저렇게 길어. 맨날 단백질만 먹나. 어쩌면 붙임 머리일지도.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윤정한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들은 다들 윤정한이 광고한 기저귀 썼다는 말도 있잖아. 아, 오빠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니까 안 써봤겠네.”
“너 그때도 이말 똑같이 했어. 어렸을 때 EBS에서 윤정한 나오는 프로그램 꼬박꼬박 챙겨봤다는 말도 기억나.”
“헐 뭐 그런 거까지 기억해?”
미간까지 모으며 질색하는 표정에 지수는 그냥 눈을 접어 웃었다. 방학 동안 잘 지냈어? 너 윤정한 말고 내가 뭐하고 살았는지는 안 궁금해? 지수의 말에 슬비가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아, 홍지수 씨 잘 지내는 거야 알지. 인스타에서 다 봤어. 캘뤼포뉘아에서 아주 즐거운 휴가를 보낸 거 같던데. 그래서 그런가? 좀 타셨어? 아, 우리 이번에 과대 누가 됐는지 알아? 다들 삼학년 되더니 아무도 안 하려고해서….
“안녕?”
“…네…?”
조잘조잘 지수가 미국 집에 가있던 동안 있었던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하던 슬비의 입이 낯선 목소리의 인사에 다물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슬비보다 살짝 더 긴 기장의 푸석푸석한 노란 머리. 이슬비의 미취학 아동시절 첫사랑. 이제는 평범한 일반인이지만 새터에서부터 같은 과도 아닌 사람의 정보를 줄줄 꿰고 있던 이유였다. 슬비가 입학하자마자 군휴학을 때려버린 야속한 그 때문에 얼마나 슬퍼했는지는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그런 윤정한이 제 앞에서 안녕이란 두 글자와 함께 웃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뻔했으나 이내 슬비는 안녕이라고 묻는 게 제가 아닌 옆의 홍지수라는 걸 깨달았다. 어라? 무슨 상황이지 이거? 슬비는 지수와 노란 머리, 그러니까 그 유명한 기저귀 아기 모델 겸 아역 배우 출신의 체교과 윤정한을 번갈아 쳐다봤다.
“옆에 슈아 친구분도 안녕하세여.”
묘하게 요와 여의 중간 발음이 꽤 발랄한 인상을 준다. 슈아라는 낯선 이름에 잠시 생각을 하던 슬비는 곧 지수의 본명이 조슈아라는 걸 기억해냈다. 학기 초에 미국에서 왔다는 한 살 많은 동기인 지수에게 진짜 미국인이냐, 미국 이름 뭐냐 등의 질문이 쏟아질 때 들었던 조슈아라는 낯선 이름. 그러고 보니 저 오빠 인스타 아이디도 조슈아 뭐 그런 거였다. 근데 저런 친근한 슈아라는 호칭이라니. 그보다. 둘이 아는 사이였다고?
“슈아야 나 너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 우리 진짜 오랜만인데 나 안 보고 싶었어?”
“오랜만이면 보통 잘 지냈냐고 먼저 물어볼 텐데 안 보고 싶었냐는 질문부터 나오는 게 참 너답다 정한아. 하나도 안 변했네.”
“ㅎㅎ 칭찬이지? 고마워. 너는 진짜 많이 변했다. 한 번에 못 알아볼 뻔했어.”
“칭찬 아닌데. 너한테 유리하게 듣는 버릇도 여전하네.”
홍지수는 당황한 얼굴도 그렇다고 기쁘거나 반가운 얼굴도 아니었다. 무미건조하다 못해 냉랭한 목소리와 어쩐지 그간 지수에게서 잘 볼 수 없었던 약간은 화난 듯한 눈썹. 그런데 또 입꼬리는 평소와 같이 온화하게 올라가 있다. 여기에서 당황한 건 슬비 혼자였다. 칭찬 아니라는 말과 꽤 뼈있는 비난을 듣고서도 윤정한은 뭐가 좋은지 실실 웃었다.
“옆에는 여자친구?”
“네가 궁금해할 건 아닌 거 같은데 정한아.”
“아~ 왜에. 궁금할 수도 있지. 우리 슈아 여친이면.”
아무리 사교성이 뛰어나더라도 여기서 아, 저는 그냥 지수 오빠 동기예요 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슬비는 눈치도 빨랐다. 둘은 아는 사이다 못해 두터운 감정이 쌓인 관계 같았다. 물론 그 감정이 좋은 쪽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에이, 니 여친 안 뺏어가. 우리 지수 못 본 사이에 많이 야박해졌네. 나는 반가워서 당장 안아주려고 그랬는데.”
“우리가 그럴 사이니?”
“못할 사이는 아니지? 아무래도.”
정한아, 여전히 너는 정신이 나갔구나. 지수는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문장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일단 여기는 강의실이고 옆에는 아직 2년을 더 같이 학교 다녀야 할 동기도 있으니까. 무슨 말을 더 해줘야할까 생각을 하며 아랫입술을 깨물던 때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급격하게 정리가 되는 분위기에 정한도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옆에서 슬비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수는 모르는 체하며 괜히 꺼내놓은 볼펜을 달깍달깍 눌렀다.
윤정한과는 악연이었다. 그래, 악연. 그리고 그 악연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 홍지수가 맞았다. 그래서 지수는 제가 원했던 게 이런 상황이었던 건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반은 맞고 반은 완전히 틀렸다.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한국. 그리고 4년 만에 재회한 윤정한.
“지수야아~ 슈아야~.”
“그만 불러, 정한아.”
홍지수는 개강 첫날부터 윤정한과 학교 앞 파스타집에서 파스타를 돌돌 말고 있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인기가 많아 힘겹게 성공한 수강신청인데 수강취소를 해야 할까. 분명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뭘 원하느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매모호한 상황과 상태. 늘 이랬다. 즉흥적이긴 해도 확실한 걸 좋아하는 홍지수가 윤정한과 엮이기만 하면 뭐든 경계가 흐릿해졌다. 감정도 태도도. 꼭 지금 윤정한의 애매한 머리 길이처럼.
“진짜 나 안 보고 싶었어? 한국 다시 왔으면서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너는?”
“나? 보고 싶었지. 당연한 걸 왜 물어. 나는 군대에서 네 생각하면서 일기도 썼어. 우리 지수는 미국에서 잘살고 있으려나. 대학은 어디 다니려나. 전공은 뭘까. 지수는 군대 안가니까 곧 졸업하고 멋진 사회인이 되겠지. 아, 지수는 무슨 일을 하려나. 정장 입은 지수 멋있겠다. 정장 아니고 유니폼이어도 잘 어울리겠지. 그런데 홍지수도 혹시 내 생각하고 있을까 등등.”
“그거 말고.”
“…그럼?”
“너는 왜 그동안 연락 안 했는데?”
그 말에 파스타 면을 쿡쿡 찌르던 윤정한의 손이 멈칫한다. 시종일관 히죽대던 입꼬리가 잠시 수평을 그렸다. 눈을 맞춘다. 부담스럽게 큰 눈이 또렷하게 지수를 응시했다. 지수는 피하지 않았다. 눈싸움하는 것도 아닌데 몇 초를 서로 시선만 맞추고 있었다.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윤정한이었다.
“내가 어떻게 먼저 연락을 해.”
이어지는, 지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대사.
“너, 나 미워서 말도 없이 간 거잖아.”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설핏 웃는다.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재수 없어. 왜 네가 그런 눈을 해? 윤정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을 긍정으로 알아듣는 윤정한은 억울한 홍지수의 심정도 모르고 분위기를 돌리려고 시답잖은 말이나 한다.
“근데 지수야 너 되게 많이 변했다. 엄청 멋있어졌어. 운동한 거야? 몸도 엄청 좋아지고.”
“정한아.”
“응?”
“머리 좀 잘라. 안 어울려.”
고등학생 때처럼은 긴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치렁치렁한 머리.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스타일이지만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머리. 정한은 손가락으로 제 머리칼을 배배 꼬았다. 어, 별루야? 변했어 홍지수. 예전에는 이 머리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했으면서. 말은 그렇게 하는데 퍽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다. 홍지수는 안다. 뭐를? 지금 윤정한은 홍지수의 말에 당황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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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아야, 나 이제 진짜 머리 잘라야 할까봐.”
“왜? 학주가 이제 진짜 가위 들고 따라다녀?”
“다음 주에 아이돌 데뷔할 거 아니면 당장 자르래.”
“이번 기회에 그냥 아이돌로 데뷔해, 정한아.”
지수의 말에 정한이 우는 시늉을 한다. 내가 춤을 어떻게 춰……. 2학년이 되면서 지수는 문과로 정한은 이과로 반이 갈라졌다. 정한의 교실보다 한층 위에 있는 지수의 반에 익숙하게 들어온 정한은 비어있는 지수의 옆자리 책상에 철푸덕 엎드렸다. 정한은 기분에 따라 지수의 이름을 바꿔 불렀다. 한국에서는 홍지수라는 이름이 많이 불렸지만 지수의 본명은 조슈아였다. 조슈아 지수 홍. 그걸 알려줬더니 정한은 슈아라고 부른다. 그게 뭐야. 하고 물으니 슈아라는 이름 귀엽지 않으냐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 식으로 불려본 적이 없는 지수는 당황했다. 미국에서도 아무도 슈아라고는 안 부르니까.
“그러게, 다음 주까지 춤 배워서 데뷔하는 건 좀 빡세긴 하다.”
“허얼. 나 진짜 데뷔시키려고?”
“으음… 아니. 데뷔는 좀.”
지수의 말에 정한이 흐흐흐 웃는다. 왜 잘생긴 정한이는 너만 보고 싶어? 어우, 얄미워. 지수의 대답에 정한이 책상 위에 올려놨던 볼을 떼고는 두 손으로 꽃받침을 한다. 오늘도 죽고 못 사는 공놀이를 하다 왔는지 선선한 가을 날씨에 정한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왜 대답을 못 해. 역시 무언은 긍정의 말?”
“얼굴 치워 윤정한. 부담스러워.”
“이제 이 얼굴에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어유, 한 대 때려줄 수도 없고.”
“내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정말이지, 홍지수는 윤정한을 이길 수가 없다.
평범한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머리를 묶을 정도로 기를 수 있는 남학생은 윤정한뿐이다. 격한 세수라도 하고 온 모양인지 옆으로 흘러나온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었다. 여자애들은 머리를 질끈 묶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윤정한에 대해서 대부분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잘생긴 애, 혹은 긴 머리만 고집하는 잘생긴 애. 아역배우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인지 아무도 평범하지 않은 긴 머리에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시절에 윤정한과 친한 여자애들은 저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걸 꽤 재밌어했다. 윤정한도 가만히 있는 편이었고. 지수는 그 묘한 장면을 꽤 오래 바라보곤 했다. 머리카락이 만져질 때마다 잠이 오는지 나른한 표정을 짓는 윤정한은 퍽 사랑스럽기도 했다.
“아, 쌤. 저 머리 길러도 된다고 했잖아요!”
“인마 그건 작년 얘기고!”
“올해는 왜요!”
학주는 정한과 마주칠 때마다 머리 얘기를 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정한과 같이 하교를 하던 지수는 제 뒤에 숨어 저를 방패 삼아 학주와 얘기하는 정한의 모습에 선생님께 난처하다는 눈썹을 하고는 웃었다. 매일 점심 저녁으로 온갖 공놀이를 하던 정한과 다르게 아직 골격이 다 자라지 않은 지수의 등에 정한이 가려질 일은 없었다. 결국 지수의 어깨 뒤로 넘어온 학주의 손에 정한의 귀가 잡혔다. 아아아, 쌔애앰. 제법 깜찍한 소리와 함께 봐달라는 눈빛을 마구 쏘아대는 통에 학주는 다음 주까지 자르라는 잔소리만 몇 마디 더 한 후 둘의 하굣길을 더는 방해하지 않았다.
“머리, 이제 그냥 자를까? 긴 머리는 머리 감는 것도 말리는 것도 일이고.”
지수의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대던 정한이 묻는다.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아 끙끙대던 지수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와 한 몸이 된 정한은 어느새 휴대폰을 놓고는 지수를 빤히 쳐다봤다. 온순한 강아지처럼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 지수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춘추복 니트는 불편하다며 벗어버린 지 오래였고 셔츠 단추도 다 풀어헤쳐 안에 받쳐 입은 흰 티가 보였다. 이미 지수는 교복을 갈아입은 후였다. 한 시간 넘게 책상에 앉아있었더니 온몸이 찌뿌듯하다. 기지개를 쭉 켜고는 정한이 누워있는 침대에 가서 앉았다. 정한은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지수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더니 자세를 고쳐 누웠다.
“내 대답이 필요한 거야?”
“완전 중요하지.”
흐트러진 정한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올린 지수는 이내 검은색의 얇은 고무줄을 쭉 빼냈다. 결 좋은 흑갈색의 머리칼이 지수의 허벅지 위로 간지럽게 떨어졌다. 학교에서의 여자애들처럼 정한의 머리칼을 살살 만졌다.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정한이 눈을 감는다. 지수야, 니가 머리 만져주니까 좋다. 졸리다. 우리 집 와서 나 잘 때마다 만져주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정한의 눈이 스르륵 감길 것도 같다.
“그럼, 자르지 마.”
“자르지 마?”
“응, 나는 네 긴 머리 좋은데.”
“아, 오늘부터 춤이랑 노래 연습해야겠다. 다음 주에 아이돌로 데뷔하려면 일정이 빠듯하네. 아니면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도 지원해볼까?”
“웃겨 진짜.”
키득키득 웃는 정한의 숨소리가 지수의 맨 허벅지 위로 흩어진다. 얼마를 더 정한의 머리칼을 매만졌을까. 천천히 호흡이 느려지던 정한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지수는 눈을 감고 곤히 잠든 정한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동그란 이마,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에 그늘이 진 눈 밑, 쭉 뻗은 콧대와 얇게 떨어지는 입술. 아름다운 얼굴을 둘러싼 단단한 골격의 턱과 목.
충동적이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보다 더.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 인생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 게 이날부터였다.
홍지수는 꼭 뭐에 홀린 것처럼, 곤히 잠이 든 윤정한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잠시 후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채 눈꺼풀을 다 뜨지 못한 눈과 시선이 얽혔다.
그러니까, 이건 18살 봄의 기억.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지수는 한국 생활을 급하게 정리하고는 LA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혼자 낯선 땅을 처음 밟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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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업은 늘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시끄럽구나. 어째 지난주보다 더 심했다. 보통의 교양 수업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에 지수는 열린 강의실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결국 수강취소는 하지 못했다. 학점이나 같이 듣는 슬비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결국 그렇게 된 거다. 지수는 생각했다. 사람 쉽게 안 바뀌는구나. 윤정한은 홍지수가 많이 바뀌었다는 소리를 열댓 번 정도 했지만 변한 건 얄팍한 겉껍데기뿐이었다. 그 점이 홍지수를 짜증나 미치게 만들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뭐해? 안 들어가?”
슬비였다. 어쩐지 지난주 수업보다 부쩍 신경 써서 단장하고 나온 듯한 슬비의 모습에 지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슬비에게 아무런 말을 못 해줬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긴 했으나 지수가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으니 왜 알던 사이면서 그간 모르는 사이처럼 굴었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르고 배려심도 좋은 친구였다.
“아, 뭐 좀 보느라. 들어가자.”
“곧 수업 시작하겠다.”
오늘도 소란스러움의 이유는 같았다. 옆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윤정한. 같은 과도 아닌데 인사하고 가는 사람만 서른 명은 되는 거 같았다.
“슈아야!”
“헐.”
지수가 강의실을 둘러보며 어디 앉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제 이름이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슬비의 감탄사. 지수는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윤정한을 발견하고는 슬비와 비슷한 감탄사가 나오려는 걸 목울대 밑으로 겨우 삼켜냈다.
“내가 자리 맡아놨어. 여기로 와! 슈아 친구 자리도!”
지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젓는 윤정한은 지난주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갈색의 짧은 머리. 애매한 기장을 벗어났고 튀는 탈색모를 얌전하게 덮어버렸다.
윤정한의 스타일 파격 변화가 저번보다 강의실이 더 시끄러운 이유일 거다. 남들처럼 평범해졌을 뿐인데 갑작스러운 변화이긴 하다. 홍지수에게는 그냥 어이가 없는 헤어 변신. 조금이라고 하기엔 심장을 쥐어짜는 기분이 들었다. 종잡을 수 없는 미친놈. 예전에는 윤정한이 저렇게 홍지수 말대로 다 할 거라는 듯이 굴면 기분이 좋기도 하고 조금 우쭐거리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또 짜증이 났다. 아니. 화가 나는 건가?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정한아. 치밀어오는 말을 또 꾹꾹 씹어 삼킨다.
대박, 엄청 잘생겼어. 슬비가 저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렸다가 지수의 존재를 깨닫고는 어깨를 움찔했다. 오빠도 오늘따라 더 잘생겼네. 하하. 눈치는 좋은 거 같은데 방향성은 잘못 잡았다. 지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너도 오늘따라 더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는 립서비스 아니라 진짜로. 지수의 칭찬에 헐, 나도 진심인데? 하며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린다. 현대사회 지성인 이슬비는 당장 윤정한의 옆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지수의 행동을 기다렸다. 옆에 앉고 싶지만 지수가 원하지 않으면 저기 가지 않을 거다. 당연히, 엄청 아쉽기야 하겠지만. 슬비의 마음을 알아챈 걸까. 지수가 묻는다.
“윤정한 옆에 앉고 싶어?”
“어? 아니, 난 상관없는데?!”
“상관있는 거 엄청 티나 슬비야.”
“아, 놀리지 마라. 그냥 그건 팬심이고.”
지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정한의 뒷자리에 가방을 놓았다. 뒤를 돌아본 윤정한은 섭섭하단 표정을 한다. 내가 자리까지 맡아놨는데, 슈아야. 그러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시키지 않아도 동기들 자리 척척 맡아주던 홍지수가 대답했다. 슬비는 정한의 뒷자리도 좋은지 볼이 빨개졌다.
오랜만에 담배가 말렸다. 운동 시작하면서 끊은 지 꽤 됐는데. 강의가 끝난 후 편의점에서 눈에 보이는 거로 아무거나 달라고 한 지수는 흡연구역으로 가 라이터 부싯돌을 굴렸다.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져 불이 나올 만큼 굴러가지 않았다. 아, 그냥 누르는 거로 살걸. 이제 와 후회해봤자다. 두어 번 더 부싯돌을 내리던 지수가 짜증이 날 때쯤 들고 있던 라이터가 손에서 쑥 빠졌다. 그리고 이내 경쾌한 부싯돌 소리와 함께 그렇게 안 붙던 불이 붙었다. 지수는 정한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담배 피워? 몰랐네.”
대답을 해야 하나. 보면 몰라? 하고 받아치려다가 그만뒀다. 마찰력으로 뜨끈해진 부싯돌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굴리는 윤정한의 얼굴이 무표정했다. 다시 만난 이후로 시종일관 나사라도 하나 빠진 인간처럼 굴더니. 앞니로 필터를 물어 캡슐을 깨자 포도향이 퍼졌다. 깊게 들이마셨다가 연기를 뱉어내자 윤정한이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좀, 낯설다 지수야.”
“낯설 만큼 오래 못 보긴 했잖아.”
“나는 담배 냄새 싫은데.”
“그런 사람이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갈색으로 덮은 머리 때문인지 저번보다 생기 있어 보이는 얼굴이 다시 싱긋 웃는다. 슈아야. 홍지수는 대답 대신 다시 필터를 깊게 빨아들인다. 저 잘생기고 재수 없는 면상에 연기를 뱉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이제는 키스하면 담배맛 나겠네.”
정한의 말에 사레 걸린 지수는 잘못 들이마신 매운 연기에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냈다. 결국 담배를 꺼서 버린 지수는 기침을 토해내느라 빨개진 코와 눈물 맺힌 눈을 하고는 정한을 쏘아봤다.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죄다 갈라졌다.
“너 미쳤어?”
“그런가. 나 미친 건가, 지수야?”
“꺼져 제발, 정한아.”
“지수야.”
“…….”
왜 그렇게 불러. 왜 그런 눈을 하고. 지수는 요즘 제가 분노조절장애라도 앓고 있는 건지 생각했다. 옛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곤 같은 눈빛으로 저를 본다. 홍지수는 매일매일 달라지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는데. 키도 얼굴도 몸도 예전과 달라진 거 없는 윤정한은 그런 지수에게 왜 그렇게 달라진 거냐며 투정을 부린다. 그러면 홍지수는 18살의 기억에 빠지고 만다.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부딪치던 그때. 서로의 입술을 달큰하게 빨면서 손바닥을 꽉 맞잡던 그때. 홍지수에겐 희망 고문과도 같았던 18살의 기억.
“지수야.”
“…….”
“보고 싶었어.”
이른 봄에 시작해 추우 겨울까지 이어진 기억이 토독토독 피어났다. 기억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핏빛 꽃처럼 번져간다. 하루하루 변해버린 홍지수는 이제 윤정한의 저 잘난 얼굴에 주먹 한 번만 날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못 해준 거 같아서.”
4년 전처럼 홍지수는 다시 헛된 기대를 품게 된다. 악연의 끈을 끊지 못하는 건 확실히 홍지수가 맞았다.
“정한아, 나는.”
나는, 네가 미워.
미련한 홍지수가 내린 미련한 결론이었다.

글이 주제와 영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사실 꽃이 피는 계절에 일어나는 일들 이라는 것 정도밖에는 관련성이 없긴합니다.
쓰면서 계속 생각을 하긴 했는데 과연 남자 고등학생이 머리를 어깨 이상으로 기를 수 있을까요? 현실성 여부는 모르겠으나 팬픽적 허용으로 넘어가주세요ㅎㅎ.
그리고 고생하신 합작주님 정말 감사드리고 죄송합니다. 마감에 대왕지각한 저를 기다려주셔서 그저 합작주님 고맙다... 뿐이지만...
제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구요.
합작에 참여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읽어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남은 여름 윤홍합작과 함께 모두 행복하길 바라요.

